히피(hippie·물질문명에 반대하고 자연친화적인 사상을 실천하는 사람들)들의 축제가 이런 분위기일까.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다닥다닥 늘어선 파란색 간이부스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나왔다. 유혹을 참지 못한 사람들은 저마다 먹거리를 손에 들고 나무아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식사를 즐겼다. 부스 안 쪽에선 앞치마를 둘러멘 사람들이 바쁘게 주스를 갈고 샐러드를 무쳤다. 불고기와 짜장면, 달콤한 파이까지 준비된 음식의 종류도 다양했다. 겉으로 봐서는 여느 음식점에서 판매하는 메뉴들과 다를 바 없어보였지만, 이 요리들은 모두 ‘식물성 재료’로 만들어졌다.
지난 1일 불광동 서울혁신파크에서 ‘제2회 비건페스티벌’이 개최됐다. ‘비건(Vegan)’이란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우유, 버터, 달걀을 먹지 않는 가장 엄격한 채식주의자를 일컫는다. 이날 현장에는 음식뿐만 아니라 의류, 생필품 등 다양한 비건 제품을 판매, 소개하는 개인과 단체 39팀이 참여했다. ‘커뮤니티’와 ‘먹거리’를 찾아 나선 비건을 비롯해 육식을 즐기는 이들과, 외국인까지 다양한 식성과 취향을 가진 시민 3900명이 축제 현장을 찾았다.
“채식주의자들은 어떤 음식을 먹을까?” “그들은 왜 채식을 시작하게 됐을까?” 국내에서 열리는 ‘비건인들의 가장 큰 축제’에 더나은미래의 청년기자 세 명도 함께했다. 비건을 시작한지 5개월차에 접어든 정한솔 청년기자, ‘고기반찬마니아’ 이형민 청년기자, 밥상 앞에 줏대 없는 조은지 청년기자다.
◇무궁무진한 ‘비건푸드’의 세계
‘비건이 아닌 청년기자들도 입에 맞는 음식을 찾을 수 있을까’ 잠시 걱정이 앞섰지만 기우였다. 샐러드와 과일주스만 있을 것 같았던 현장은 ‘1일9식’이라는 올해의 테마에 걸맞게 다양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파스타, 피자, 김밥까지 음식이 이정도로 다양하다면 비건으로 살아가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듯 싶었다. 특히 동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고기, 계란, 치즈를 식물성 재료로 구현해놓은 점이 인상깊었다. (일부 채식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콩고기 역시 결국 ‘고기’의 대체품이므로 진정한 채식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콩고기 패티 햄버거, 불고기
형민= 햄버거 패티에서 콩 갈아 넣은 느낌이 강하게 났어. 불고기 요리에 들어간 콩고기는 버섯이랑 식감이 비슷하더라고. 비슷하게 만들었다곤 하지만 ‘진짜 고기’를 먹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어.
은지= 분명히 고기맛이라고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원래 요리의 개성이 조금씩 살아는 것 같아 신기해. 다 같은 콩으로 만든 고기라해도 닭고기처럼 만든 콩고기, 양고기처럼 만든 콩고기, 콩 햄 등 만드는 방법에 따라 저마다의 맛이 있는 것 같아. (식물성 고기는 채소, 양념, 글루텐, 전분, 오일 등을 활용해 점도와 식감을 달리할 수 있다)
-식물성 치즈 피자
은지= 식물성 치즈는 처음 먹어봤는데, 일반 치즈보다도 맛있더라고. 하지만 피자 토스트에 들어있던 치즈는 늘어나는 모습만 모짜렐라 치즈하고 비슷하지, 내 입엔 지나치게 끈적여 불쾌할 정도였어.
형민= 치즈인데도 짠 맛은 덜했던 것 같아. 그리고 먹는 동안 달짝지근하면서 독특한 향이 내내 감돌았어. 어떤 식물성 원료의 향같았는데, 뭔진 잘 모르겠다.
한솔= 다들 미식가네. 보통 비건 치즈는 코코넛이나 캐슈넛으로 만들지만, 나는 우유로 만든 치즈랑 식감도 맛도 똑같다고 느꼈어. 비건 치즈는 구하기가 많이 어렵거든. 치즈를 좋아하는데 자주 먹지 못해서 아쉬워.
-계란 프라이
형민= 배가 불렀는데 ‘어디 가서 이런 계란은 못 먹는다’는 말에 냉큼 사버렸어. 노른자가 퍽퍽한 게 식감은 원래 계란 프라이랑 비슷하더라고. 하지만 여전히 콩 맛이 강하게 나는 것 같아.
은지= 내가 느끼기엔 식감이 일반 계란 후라이보다 훨씬 질겼는데. 꼭 불량식품 같았어. 맛은 평소에 먹는 계란프라이보다 더 고소했던 것 같아.
한솔= 그래? 나는 진짜 계란을 먹는 줄 알았는데… 내 혀가 5개월 동안 계란 맛을 잊은 건가(웃음).
비건이 가장 참기 어려운 음식 중 하나는 바로 ‘디저트’다. 아이스크림, 쿠키, 케이크 등 달콤하고 푹신한 식감을 가진 디저트는 대부분 우유와 버터 등 동물성 단백질을 활용해 만들기 때문에 비건이 먹을 수 없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오직 식물성 재료를 활용해서만 만든 디저트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음식을 먹을 때 보다 비건인 정한솔 청년기자가 특히 들떴다.
-브라우니, 마카롱, 타르트
형민= 브라우니랑 마카롱 모두 다 시중에서 파는 맛이랑 다른 점 없이 맛있었어. 이런 디저트에는 초콜릿이랑 버터 같은게 꼭 들어갈텐데 대체 뭘로 만든거지?
한솔= 채식을 시작하고 브라우니를 만든 적이 있는데 난 대추야자라는 열매를 갈아서 만들었어. 이렇게 오븐에 굽지 않고 날 것으로 먹는 채식 디저트를 ‘로푸드(raw food)’라고도 하더라고. 난 무엇보다도 마카롱을 먹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 콩 삶은 물로 머랭(계란 흰자에 설탕을 넣고 친 거품) 만들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그 동안 마카롱이 진짜 먹고 싶었는데 머랭을 대체할만한 재료를 못찾고 있었거든.
은지= 내 입에는 모든 디저트가 너무 달았어. 알고보니까 비건 음식은 과일로 양념을 해서 전체적으로 맛이 좀 더 달콤하다더라고.
◇채식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것
사람들이 채식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건강한 몸을 갖기 위해, 동물의 권리를 존중하기 위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은 채식을 통해 실천하는 ‘동물권보호’와 ‘건강’의 가치에 동의하고 있었다.
올해로 17년째, 비건으로 살고 있다는 지만구(69)씨 는 비건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 경상도에서 서울을 찾았다. 밖에서 사먹는 음식이나 공산품에는 대부분 동물성 재료가 포함돼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먹을 요리의 대부분을 직접 만든다. 건강의 비결을 채식이라고 믿는 그는 “채식을 하며 건강을 챙기려면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완전채식 하는 사람들은 난황(계란노른자로 가장 널리쓰이는 식재료 중 하나)이 0.001%만 들어가도 안 먹으니까 대부분의 음식이 걸린다고. 견과류처럼 단백질 영양소가 들어있는 음식을 잘 챙겨먹어야 해요. 그래야지 건강해. 내가 마지막으로 약을 먹었을 때도 캡슐은 제거하고 안에 든 내용물만 먹었어요. 연질 캡슐의 재료가 동물성 젤라틴이니까. 그 이후로 지난 5년간은 감기에도 한 번 안 걸렸어요.”
이설희(26)씨는 3년 전부터 건강을 위해 페스코(우류, 계란, 어류를 먹는 채식)를 시작했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완전채식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직장인인 그에게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페스코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사람들은 “왜 굳이 힘들게 채식을 하느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낸다.
“회사 다니다 보면 사회적인 압박이 있어요. 회식 자리 같은데 가면 제가 낄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다 보니까, 그럴 때 좀 불편한 것 같아요. 사람들 만나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이랑 항상 같이 먹긴 하는데, 제가 먹을 수 있는 걸 골라가지고 찾아다니는 편이에요. 음식점 같은 것도 제가 항상 예약하고요.”
이제 겨우 2회차를 맞은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에는 외국인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경기도 성남에서 영어교사로 활동 중인 부모님을 따라 한국으로 이사온 달마(Dharma·19·미국)씨는 “외국에서는 이미 채식이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잡았고, 채식인구도 많다”면서 “한국에 비건문화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자리가 많이 없기 때문에) 외국인이 많이 참석한 것 같다”고 말했다.
채식주의자들을 생각하면 대개 ‘결의로 가득 찬 마음’ ‘단호한 삶의 태도’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그들은 결코 유별나지 않았다. 모두가 살아가며 선택을 거듭하듯, 채식주의자 역시 역시 다양한 삶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이번 페스티벌은 완전 채식을 하는 비건의 식단에 맞춰 기획됐지만, 채식을 하지 않는 두 명의 더나은미래 청년기자를 비롯해 상당수의 비채식인이 참석했다. 한국채식연합이 추산하는 국내 채식인구는 약 2%로 점점 증가 추세에 있다. 이는 용인시 전체 인구와 맞먹는 수준이다. 서로가 선택한 삶의 다양한 방식을 존중하며, 긍정적으로 교류하는 식탁이야말로 비건 페스티벌이 지향하는 식문화가 아닐까.
정한솔·이형민·조은지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6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