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木工, 문화가 되다
나만의 이야기를 담아… 名品이 된 폐목재
나무라는 자연친화적인 소재로 나만의 물건 만든다는 특별함
기업·학교 등에서 관심 증가
친환경가구 제작, 공원 조성 등 폐목재 이용한 사업·활동도 활발
‘목공(木工)’ 열풍이 심상치 않다. 특별한 취미를 찾는 직장인, 제2의 인생을 바라는 시니어, 사회 혁신을 꿈꾸는 활동가, 노작교육(勞作敎育·신체활동을 통한 교육)의 가치를 깨달은 청소년까지 나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IT 기기로 인해 일과 삶의 균형이 깨지고, 점점 빨라지는 트렌드에 지친 사람들은 요리나 목공 등 직접 시간을 들이고 땀 흘려 만들어야 하는 ‘슬로 워크’에 몰려가고 있다. 버려진 나무에 주목하는 기업, 목공을 통해 소통하는 공동체도 점점 는다. 유행을 넘어 문화가 되고 있는 목공 열풍 현장을 따라가봤다. 편집자 주
해발 128m 높이 나지막한 산. 서울 강서구 개화동에 자리 잡은 ‘개화산’에는 특별한 길이 하나 있다. 정상에 이르는 길 700m를 1.8m 폭으로 만든 ‘무장애 숲길’로, 지난해 7월 말 완공됐다. 반들반들하고 평평한 나뭇길은 고령자는 물론, 장애인 휠체어에도 자유로움을 허락한다. 서울의 자치구 중에서 장애인 인구가 둘째로 많고, 65세 이상 어르신이 넷째로 많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보행 약자 친화형 산길이다. 목재 바닥 곳곳에 설치된 핸드레일이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판에도 약자를 위한 배려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난 13일, 이곳에서 만난 정방선(60·강서구 방화동)씨는 전동 휠체어 위에 앉아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정씨는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된 1급 지체장애인. 5년 전 앓았던 척수염의 여파다. 휠체어에 앉기 전에 자주 다녔던 이 산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된 건 ‘무장애 숲길’ 덕분이다. 정씨는 “다치고 나서 숲 공기가 참 그리웠는데 이곳은 불편함이 별로 없어 자주 온다”고 했다. 정상에 오르는 길에 위치한 두 곳의 작은 북 카페에는 지역 도서관에서 기증받은 책 400여권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임숙향(53·강서구 염창동)씨는 “개화산에 오면 항상 북카페에 와서 쉰다”며 “차를 마시며, 책까지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최고의 휴식 장소”라고 했다. 이 개화산 숲길과 북 카페를 만든 건 ‘희망나무 목공소’다. 그 재료는 놀랍게도 이 지역에서 배출한 폐목재들이다.
이틀 후 방문한 서울 강서구 개화동의 희망나무 목공소 마당에는 폐목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윤종식 희망나무 목공소 반장은 “주로 태풍에 쓰러진 나무이거나, 말라 죽은 고사목(枯死木)”이라며 “구청 담당자들이 수집하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직접 챙기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250㎡ 부지로 이뤄진 목공소 한쪽에는 작업을 마친 공원용 벤치, 야외용 테이블, 간이의자 등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목수 7명은 모두 제2의 인생을 누리고 있는 은퇴자들이다. 금융권에서 일했다는 최진선(63)씨는 “아직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도전했는데 적성에 맞아 2년째 일하고 있다”며 “버려질 나무에 새 생명을 주는 일이니만큼 뿌듯함과 자부심이 크다”고 했다.
◇목공의 재발견, 새로운 문화가 되다
“내 손으로 뚝딱뚝딱 만들어낸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박달재(30·서울 성북구)씨가 각종 목공기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 16일, 경기 파주시에 위치한 목공 전문기업 ‘위시스’의 쇼룸(Show Room)에서 만난 박씨는 현재 목공방 창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회사에 들어갈 마음은 없었다. 대신 선택한 것이 ‘목공’이다. 지난해 경기도 산본시에 위치한 남부기술교육원을 찾아 1년 과정의 목공 코스를 수료했다. 박씨는 “목공을 배우면서, 젊은 층들 사이에서 불고 있는 목공의 인기를 실감했다”며 “30~40대 수강생이 가장 많았는데, 대부분 다른 분야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같은 날 만난 조희준(49·목공예교사·서울 양천구)씨는 20여년간 청소년 체험교육 분야에서 일했다고 한다. 조씨는 “새로 청소년 (목공)진로체험장을 차릴 계획으로 필요한 장비를 구경하러 왔다”고 말했다.
목공 전문 브랜드 ‘위시스’는 30년 역사의 공구 유통업체인 ‘에스디상사’가 2010년 만든 회사다. 주로 목공장비를 취급하는데, ‘목공 체험활동’, ‘목공 무료 워크숍’, ‘목공 컨설팅’ 등의 활동도 병행한다. 장재섭 위시스 홍보마케팅팀 과장은 “지난 4월부터 일반인 15명을 대상으로 무료 목공 워크숍을 월 1회 진행하고 있는데, 서너 시간 만에 신청이 마감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면서 “나무라는 소재가 가진 자연친화적인 매력, 나만의 물건을 만든다는 특별함, 여가 문화의 달라진 풍속도가 맞물린 결과”라고 했다. 그는 이어 “2000억원 규모로 추산되는 시장 규모가 아직 스웨덴·핀란드·일본 같은 목공 선진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변화의 바람을 제대로 타고 있는 건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지자체나 기업에서 목공 체험을 원하는 수요가 부쩍 늘었고, 자유학기제가 확대되면서 교육계의 관심도 한몸에 받고 있는 등 빠르게 저변이 넓어지는 추세”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지난해 교육부 선정 ‘우수시설학교 대상’을 받은 ‘충남삼성고'(충남 아산시)는 교내에 목공 교육을 위한 전문 공방을 설치해 학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목공 기능장 금석경(42·위시스 소속)씨는 “목공은 창의력을 기반으로 하며, 협력과 대화를 동반해야 하는 작업으로 체험교육의 효과가 높다”며 “학교나 기업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했을 때 재교육 신청률이 가장 높은 것도 바로 목공 수업”이라고 했다. 경기도 성남에서 목수 전문 아카데미 ‘유니크마이스터’를 운영하고 있는 김흥국 대표는 “지난해 말 목공 수업 신청자가 예년에 비해 4배 가까이 늘었다”고 귀띔했다.
◇쓸모없다고? 버려진 나무의 가치에 주목하라
“2012년 총선 이후 현수막 10만개가 폐기됐다고 하더라고요. 건축공학을 전공한 저에겐 나무만 보였어요. 대부분 태운다고 하더군요. ‘부피가 작은 나무들은 어떻게 재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액자’라는 아이템을 생각하게 됐죠.”
추대엽(38) 자이트가이스트 대표의 말이다. 2011년에 결성된 ‘자이트가이스트'(Zeitgeist·시대정신)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회 혁신 그룹이다. 디자이너, 기획자, 스토리텔러, IT 개발자, 도시 개발자 등 구성원 모두 직업이 따로 있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될 때마다 모여 협업한다. 올해 초부터는 ‘폐목재로 만든 스토리 액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이 프로젝트는 지난 4월 크라우드 펀딩 ‘와디즈’에 처음 소개된 바 있다.) 추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한 해 버려지는 폐목재가 180만t이 넘는데, 작은 폐목재들은 대부분 소각된다”며 “이들을 액자로 재활용하여 지역과 마을, 환경을 살려보자는 의미를 담은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동네 목수와 청년들이 머리를 맞댔다. 이번 프로젝트에 동참한 20년 경력 목수 서봉조(43·큰숲목공소 대표)씨는 “평생 나무를 만졌지만, 여기에 스토리가 더해지고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고 했다.
나무를 활용해 다양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도 있다. 경북 울산에 있는 (예비) 사회적 기업 ‘제페토의 꿈의 공장’도 좋은 예다. 지난해 8월 뭉친 창업 멤버 4명은 모두 울산대 미대 출신 선후배. 한승준(29) 대표는 “작가들의 생계를 해결하면서 사회적 가치까지 높일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지역에서 버려지고 있는 폐자원에 디자인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게 됐다”고 했다. 이들의 대표작은 지역의 폐목재를 활용해 만든 ‘곤충호텔’. 곤충 생태계 유지를 미션으로 하는 다른 사회적 기업과 협업하여 이뤄낸 결과다.
“버섯을 키우던 소나무가 3~4년 지나면 폐기돼요. 하지만 어느 정도의 버섯포자는 남아있죠. 그걸 수거해서 곤충호텔로 단장하면 장수하늘소 같은 곤충의 애벌레에겐 최적의 서식 공간이 되죠. 지난해 말 울산 북구의 한 마을단지 안에 넣어놨는데, 1년 정도 지나면 곤충들의 생태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어요.”(한승준 대표)
‘디랜드협동조합'(충북 청주)은 지난 2005년 ‘청주가구제작동호회’를 모태로 지난해 협동조합 설립까지 10년간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친환경 목공 교육과 체험에 초점을 맞춘다. 성유경(51) 디랜드협동조합 대표는 “지난해 청주시 알코올상담센터 목공 체험 행사를 했는데,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 직접 ‘관’을 만들어 보고, 들어가 보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더라”면서 “과정 자체에서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게 목공 교육의 강점이자 매력”이라고 밝혔다.
성유경 대표의 꿈은 정식 커리큘럼을 가진 ‘목공학교’를 만드는 것. 그래서인지 나무 예찬론이 그칠 줄 모른다.
“나무는 고향이에요. 사람들이 피서를 갈 때 나무나 물이 있는 곳을 찾잖아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있죠. 목공도 마찬가집니다. 직접 해보면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나무와 도란도란 대화하는 기분을요(웃음).”
◇버려진 목재가 ‘단 하나뿐인 나만의 가구’로 재탄생
폐(廢)방수천으로 만든 가방으로 연매출 700억원을 이뤄낸 스위스 국민 브랜드 ‘프라이타크(Freitag)’와 비슷한 업사이클링 가구 회사도 생겨났다. 2010년 설립된 빈티지 가구 디자인 브랜드 ‘매터앤매터(Matter & Matter)’다. 이 회사 제품들은 인도네시아의 선박이나 트럭, 가옥을 해체하면서 나온 폐목재로 만든다.
“2004년에 구 서울역사가 폐쇄됐잖아요. 그 공간을 미술관으로 만들었는데, 개관 전시회에 우리가 참여했어요. 서울역을 철거하면서 나온 목재로 의자 같은 것들을 제작했는데, 그렇게 만든 의자 사이에서 1960년대 열차표가 나왔죠.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게 폐목재가 가진 가장 큰 매력 아닐까요.”
이석우 대표의 말이다. 이 대표는 “인도네시아의 대표 수종인 ‘올드티크(古材)’가 원래 굉장히 아름다운 목재”라며 “여기에 오랫동안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집이었고 배였던 소재들이 서울에선 책걸상이 되는 스토리가 더해지며 가치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지난 4월 매터앤매터의 업사이클링 가구 제품으로 카페를 꾸몄다는 베이비카페 ‘마마살롱'(인천시 연수구)의 이상헌(31) 대표는 “고객들이 ‘어디 제품이냐’며 관심을 보일 정도로 반응이 좋다”고 했다. 실제로 네덜란드 가구 회사 ‘피트 하인 이크(Piet Hein Eek)’ 제품은 찬장 하나에 700만원, 식탁은 1400만원이 넘는다. 어느 하나 똑같은 게 없다는 희소 가치에 예술성을 더했기 때문이다.
이석우 대표는 “빨리 사고, 빨리 버리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소재와 디자인은 100년 동안 물려줄 수 있을 정도로 유행을 타지 않는 것”이라며 “재활용 소재로 만든 물건을 버리지 않고 오랫동안 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친환경적인 제품”이라고 말했다.
최태욱 기자
고평온·권은비·김승우·김평화·변상근·이소연·장진영 청년기자(청세담 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