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륜이 빚은 경쟁력 고령 사회를 ‘기회’로

고령친화기업, 그 현장을 가다

바리스타·지역알리미 등 이색 직업에 도전…일자리 얻은 노인, 우울증 극복하기도
메뉴 개발·조리·배달 하는 ‘할머니손맛도시락’ 하루 주문량 1000건, 연매출 4억5000만원 달해

지난 18일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에 있는 ‘할머니손맛도시락사업단’.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감쌌다. 하얀 위생모와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 두 분이 능숙하게 팬을 흔들며 불고기를 볶고 있었다. 갓 지은 밥솥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살피더니 “딱 됐다”며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그 옆으론 메추리알, 진미채, 우엉조림 등 반찬을 보기 좋게 담아내는 이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시락 한 상자에 ‘9첩 반상’이 펼쳐졌다. 할머니 6명이 300인분의 도시락을 완성하자, 대기하고 있던 할아버지들이 재빠르게 청주 각 지역으로 도시락을 분리해 배달 준비를 마쳤다. 7년째 도시락 배달을 맡고 있는 연제인(72)씨는 “일을 시작한 후부터 심신이 더 건강해졌어”라며 힘차게 배달차의 시동을 걸었다.

◇손맛으로 연 4억 매출 만드는 ‘할머니손맛도시락’

할머니손맛도시락은 연매출 4억5000만원에 달하는 ‘지역 맛집’이다. 하루 주문량만 최대 1000건에 달하고, 도시락 메뉴 개발부터 조리 및 배달까지 전 과정을 모두 어르신들이 책임진다.

직원 수는 총 40여명. 모두 65세 이상의 시니어다. 설립 당시 15명에서 무려 3배 정도로 늘었다. 1명당 주 3회 일하고 최대 월급 100만원까지 받는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도시락 업체들과 경쟁 속에서 9년간 성장세를 이어온 비결은 무엇일까. 가장 큰 비결은 어르신들이 알려주신 오랜 ‘손맛 비법’. 할머니손맛도시락엔 조미료도, 인스턴트 음식도 없다. 메뉴도 매일 바뀐다. 할머니들이 직접 메뉴를 개발하고, 메뉴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요리법을 선정한다.

재료 역시 지역의 신선한 농산물로 채워진다. 1년에 8시간씩 외부 강사를 초빙, 최신 음식에 대한 교육도 이뤄져 연령별로 입맛에 맞는 음식들이 수시로 개발된다. 할머니손맛도시락이 별다른 홍보 없이 ‘소문’만으로도 유명세를 타는 이유다.

1·2 경기도 화성시 ‘노노카페(No老카페)’ 직원 대다수가 모두 만 60세의 노인들. 고품질 서비스로 창립 7년 만에 32개 지점이 생겼다. 3·4 사회적기업 ‘은빛둥지’는 라영수 교육원장을 포함해 직원 10여명 모두 고령자들이다. 각종 대회 수상 등 뛰어난 IT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5지역 토박이 고령자들이 전기 자전거를 운행하며 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부산 ‘이바구 자전거’. 6·7 충북 청주시 ‘할머니손맛도시락’은 40여명의 시니어들이 메뉴 개발부터 배달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고 있다. /각 사 제공
1·2 경기도 화성시 ‘노노카페(No老카페)’ 직원 대다수가 모두 만 60세의 노인들. 고품질 서비스로 창립 7년 만에 32개 지점이 생겼다. 3·4 사회적기업 ‘은빛둥지’는 라영수 교육원장을 포함해 직원 10여명 모두 고령자들이다. 각종 대회 수상 등 뛰어난 IT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5지역 토박이 고령자들이 전기 자전거를 운행하며 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부산 ‘이바구 자전거’. 6·7 충북 청주시 ‘할머니손맛도시락’은 40여명의 시니어들이 메뉴 개발부터 배달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고 있다. /각 사 제공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고령인 탓에 일이 익숙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귀가 어두워 여러 번 설명을 반복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이에 어르신들 스스로 가능한 만큼의 업무량을 결정하도록 해 갑작스러운 대량 주문에도 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비슷한 연령대가 함께 일하며 서로간 의지하는 사내 문화도 큰 몫을 한다.

6년 차 매니저인 이수복(65)씨는 “업무 분장을 칠판에 적어둬도 여러 번 묻고 또 묻는 이도 많지만, 어려움이 비슷하다 보니 이해가 되고 품을 여유가 생긴다”며 웃었다.

◇’커피 맛’ ‘IT 기술’ 등 젊음에 도전하는 시니어들

“직원 6명이 3~4년간 인근 대학의 교수님부터 일반 카페 사장님들까지 쫓아다녔어요. 커피 제조 방법부터 카페 설립에 관한 법률 지식까지 배워야 했죠.”

안슬지 화성시니어클럽 팀장이 ‘노노카페(No老 카페)’의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노노카페는 화성시의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시작한 고령 친화 기업으로 화성시니어클럽이 운영·지원하고 있다. 지난 17일 경기도 화성시 남부노인복지관 1층에 있는 ‘노노카페(No老 카페)’는 커피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커피 가격은 시중의 절반인데, 자체 개발한 원두로 맛은 물론 향까지 월등하기 때문. 밀려드는 커피 주문에도 흔들림 없이 뚝딱 만들어내는 이들은 60·70대 노인, 일명 ‘실버 바리스타’다. 모두 전문 강사진으로부터 커피 원두에 대한 이론 교육부터 고객 응대 방식까지 100여 시간의 체계적인 교육과 실습을 거쳤다. 고품질 서비스 덕분에 연매출은 9억여원(12개 지점 기준)에 이른다.

소문이 퍼지면서 농협,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의 가게 창업 후원이 이어졌고, 노노카페는 현재 화성시에만 32호점을 오픈할 만큼 급성장했다. 전체 고용된 노인 직원은 188명에 달한다. 안 팀장은 “은퇴 후 우울증에 걸리신 한 어르신이 계셨는데, 4년간 카페에서 일하면서 몰라보게 밝아지셨다”며 “올 연말까지 8곳을 추가로 개점해 더 많은 신규 시니어 일자리를 창출할 예정”이라고 했다.

경기도 안산에 있는 사회적기업 ‘은빛둥지’ 역시 편견을 깨고 시니어들이 IT 사업에 도전, 연매출 1억원을 돌파했다. 2001년 라영수(75) 은빛둥지 교육원장으로부터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던 노인 수강생 셋이 “더 가르쳐달라”고 요청하면서 IT 전문 사회적기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취미로 갈고 닦은 컴퓨터 기술은 경기도실버정보화경연대회 대상·전국노인정보검색대회 금상 등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최근엔 여성부의 경력 단절 여성을 위한 영상 교육, 노인 맞춤형 컴퓨터 교재 제작까지 도맡고 있다. 2012년부터 노인인터넷TV를 자체 운영하고, ITV에 통일포럼-은빛미디어 영상을 제작해 제공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를 통한 수익금 전액은 노인 정보화 교육을 위해 다시 투자돼 ‘배움의 선순환’을 만든다.

은빛둥지에서 10년째 일해온 박상묵(68)씨는 “예전엔 자식들이 컴퓨터 고장날까 근처에도 못 가게 하더니, 이젠 나에게 되레 물어본다”며 웃었다. 라영수 원장은 “노인들도 디지털 기술 영역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가장 큰 성과”라며 “앞으로 노인 일자리의 범주가 더 넓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 특색 살린 이색 직업까지… 고령 인구의 가치 주목해야

노인 일자리 창출이 ‘지역 커뮤니티’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올해 부산시니어클럽이 시작한 ‘이바구 자전거’ 사업이 대표적인 예. 지역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이 전기 페달로 움직이는 자전거에 관광객을 태워 지역 곳곳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다.

1시간가량 진행되는 어르신들의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토박이들만의 산 경험들로 채워진다. 덕분에 주말에는 30~40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자전거 해설사 최정경(70)씨는 “부산에서 나고 자랐으니 모르는 것이 없다”면서 “내 고향 알리는 것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일주일에 세 번 자전거 운전대를 잡고 고향 자랑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월 50여만원의 급여이지만, 지역의 얼굴이 된다는 사실이 뿌듯해서다. 이같이 고령 친화 기업을 육성하려면 시니어의 전문성과 노하우를 발굴·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포천지 선정 글로벌 500대 기업의 총 직원 중 26%가 50세 이상이며, 미 항공사 아메리칸에어라인(American Airlines)은 직원의 36%가 시니어다. 미국 시니어 연구 기관 리아이얼먼트잡스(RetirementJobs) 등 유명 연구소들은 앞다퉈 ‘고령 노동자들은 더 적은 이직률, 더 강한 노동 윤리, 더 높은 소속감으로 새로운 경쟁력을 발휘한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국민의 약 13%(통계청, 2015년 2월 기준)에 이를 정도로 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최재성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전 세계가 고령 인구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국내에도 ‘고령’이 장애물이 아닌 또 다른 ‘기회’로 바뀐 사례가 더 확대되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정유진·강미애 기자

기하영·김원석·박자은·이미령·장혜승·조은총·정다솜 청년기자(청세담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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