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4일(일)
4년간 5626건… 환자 두 번 울리는 막판 기증 취소

조혈모세포 기증 수난사 “골수기증 아니냐” 오해에 가족 반대
직장선 “법이 어쨌든 휴가는 못 줘” 실제로는 헌혈처럼 간단히 채취 가능

“생명 살릴 기회, 독려 분위기 조성하고… 교육 통해 기존 희망자 이식률 높여야”

최근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던 은모(4)양은 절망적인 소식을 접했다. 1년을 기다린 끝에 나타난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가 수술 이틀 전, 갑작스레 의사를 번복한 것이다. 조혈모세포란 적혈구·백혈구·혈소판을 만들어내는 줄기세포다. 중간 지원기관에서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기증 신청자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식 수술을 위해 무균실에 들어가 백혈구 수치를 0으로 낮추던 은양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백혈병에 걸린 13세 아들을 둔 이모(45)씨 또한 비슷한 일을 당했다. 조혈모세포 기증 없인 생명이 위독한 상황이던 아들에게 다행히 기증자가 나타났고 흔쾌히 동의를 받았지만, 기증 희망자가 수술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 기증을 하지 않겠다며 연락을 끊어버렸다. 기증자가 의사를 번복한 지 1년 만에 아들을 떠나보낸 이씨는 “잠시라도 희망을 가져본 것이 어디냐”면서 원망스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국내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 누적 인원은 약 30만명. 그러나 지난 4년간 이식 수술을 앞두고 기증을 취소한 건수는 무려 5626건에 달한다. /조선일보 DB
국내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 누적 인원은 약 30만명. 그러나 지난 4년간 이식 수술을 앞두고 기증을 취소한 건수는 무려 5626건에 달한다. /조선일보 DB

조혈모세포 기증을 신청했다가 돌연 이식을 거부한 이들로 인해 고통을 받는 환자와 가족이 상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최근 4년간 기증 신청 이후 막판에 거부한 사례가 무려 5626건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지난 20년간 조혈모세포를 실제 이식한 기증자의 누적건수는 4458회에 불과하다. 기증 신청자 중 이식에 성공한 사례보다 기증을 거절한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가족, 직장 등 기증 막는 사회… 매년 3000명 환자가 기증자 기다려

“아이 눈빛이 자꾸 떠올라요. 아직도 정말 미안합니다.”

김모(28)씨가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지난해 자신과 조직적합성항원(HLA)이 일치하는 백혈병 환아가 있다는 소식에 흔쾌히 기증 의사를 밝힌 그녀였다. 그러나 조혈모세포 기증을 위해 병실에 누워 있던 중, 김씨는 부모로부터 뺨을 맞고 끌려나갔다.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김씨는 결국 기증을 포기해야만 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기증 희망자 3명 중 1명이 김씨처럼 가족의 반대로 기증 의사를 철회하고 있다.

어렵사리 가족의 동의를 받았더라도 직장인의 경우 또 다른 장벽이 있다. 이식을 위해선 최소 1일에서 최대 4일까지 휴가를 받아야 하기에, 회사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장기 등을 기증하는 근로자에게 병가 또는 유급휴가를 주도록 하는 법률이 시행됐지만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조혈모세포 기증 신청을 했던 직장인 A씨는 “기증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회사에 유급 휴가를 신청했는데, ‘회사가 이렇게 바쁜데 기증하려고 휴가를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단번에 거절당했다”면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잃은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매년 백혈병 등 혈액종양 환자 3000여명이 기증자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 중 조혈모세포 이식에 성공하는 경우는 15%(2013년 기준, 평균 450명)에 불과하다.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까지 기증자를 찾으며 애태우는 환자와 가족들이 대다수다. 환자와 유전자형(HLA, 조직적합성항원)이 일치해야만 이식이 가능한데, 부모와 자식 간 일치 확률은 5% 이내, 형제 자매는 2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범수희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팀장은 “최근 자녀를 한 명만 낳는 부모가 늘면서 가족 외 타인 중 기증자를 찾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이 경우 일치 확률은 3만~5만명 중 1명”이라면서 “이 때문에 어렵게 찾아낸 기증 희망자가 수술 직전 이식을 거부할 경우 가족들이 받는 상처는 더 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한 장기이식센터 간호사는 “유전자형이 일치하는 기증 신청자에게 연락했을 때, 실제로 기증까지 이어지는 비율은 절반도 안 된다”면서 “환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우리 사회가 아직 잘 몰라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식 방법에 대한 오해 많아…홍보 및 지속 관리 필요해

조혈모세포를 기증할 경우 건강에 나쁘다거나 위험하다는 편견도 많다. 실제로 ‘조혈모세포 기증을 하겠다’는 일반 국민의 동의율이 2010년 60%에서 매년 꾸준히 감소, 2013년 54%까지 떨어졌다. 전선호 한국조혈모세포은행연합 홍보팀장은 “아직도 조혈모세포 이식이라고 하면 골반(엉덩이) 뼛속에서 골수를 채취하는 방식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은데, 골수 이식은 조혈모세포 이식의 한 종류일 뿐”이라면서 “최근엔 헌혈과 동일한 방식으로 간단하게 조혈모세포를 채취하는 것이 보편적인 방식이고, 퇴원 직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기증자의 조혈모세포 수치는 2주 뒤면 원래대로 회복된다.

이에 전문가들은 “기증 서약자 확보에 집중하기보다는 골수 이식의 가치와 안전성 등을 충분히 교육하고 관리해, 기존 기증 희망자의 이식률을 높이는 게 관건”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국내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자 누적 인원은 2014년 기준 약 30만명. 그러나 매년 600명 이상의 기증 희망자가 전화번호 변경 등 ‘연락 불가’ 사유로 기증이 취소되고 있다. 독일의 경우, 이미 자국민을 위한 충분한 기부 희망자 풀(pool) 500만명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타국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조혈모세포 기증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인다. 영국은 최근 헌혈을 많이 한 20대 건강한 남성을 중점적으로 관리, 조혈모세포 기증 동의율을 높이고 있다. 김태규 가톨릭조혈모세포은행 소장은 “얼마 전 한 친구가 조혈모세포 기증 이후에도 건강하다는 점을 알리고 홍보하고 싶다며 미국으로 80일간 자전거 여행을 떠났는데, 그 모습을 본 미국인들이 박수를 치면서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 비용이 거의 안 들었다고 하더라”면서 “기증자들을 숨은 영웅으로 존중하고, 독려하는 사회 분위기부터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유진 기자

정은솔 청년기자(청세담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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