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경황 오파테크 대표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읽고 쓰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수단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점자를 사용할 줄 아는 시각장애인 비율은 5%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점자 교육을 위한 인프라와 콘텐츠가 부족한 탓이죠. 그러다 보니 점자를 배우기 시작해도 지루한 교육과정 때문에 중도 탈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경황(41) 오파테크 대표는 시각장애인이 쉽고 재밌게 점자를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점자학습기기 ‘탭틸로(Taptilo)’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의 스마트 점자 학습기로, 시각장애인 혼자서도 점자를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
오파테크는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성동구 소셜벤처 혁신경영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현대차 정몽구 재단의 소셜벤처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 ‘H-온드림’의 지원 대상 기업으로 선정됐다. 누적 투자유치 금액은 5억원 정도다. 해외에서는 더 유명하다. 미국·영국·독일·포르투갈·브라질 등 국가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지난달 10일 서울 성수동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기존 점자 교육 문제 해결
“기존 점자 교육은 점자 책을 읽거나, 식판처럼 생긴 여섯 개 구멍에 테니스공을 넣어서 읽어보는 방식으로 진행했어요. 하지만 책의 점자는 너무 작아서 처음 배우는 사람은 읽기가 어려웠어요. 테니스공을 활용하면 공이 너무 커서 정확한 점자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방식이 재미있을 리도 없죠. 그러다 보니 점자를 배우다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탭틸로는 작은 피아노처럼 생겼다. 점자의 모양(점형)을 느낄 수 있는 하얀 부분과 점자 쓰기(점필)를 할 수 있는 파란색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얀 부분을 만지며 점자를 읽고, 파란 블록에 있는 점자를 눌러 점자 쓰는 법을 익힐 수 있다. 블록 한 개는 스마트폰의 4분의 1 정도 크기로 한 손에 쥐어진다.
무료로 제공되는 애플리케이션에는 16주짜리 점자 학습 프로그램도 있다. 이 대표는 “커리큘럼을 마치면 천천히 점자를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에서 학습하려는 단어를 선택하면 음성 안내가 나오고 탭틸로 하얀 부분에는 해당 단어가 점자로 튀어나온다. 학습자는 하얀 부분의 점자를 손으로 읽고 파란 블록에 점자를 눌러 입력하면서 읽기와 쓰기를 배운다. 틀리면 “한 번만 더 해보죠”, 정답을 맞히면 “정답입니다”라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집중력이 부족해 점자 학습을 포기했던 학생이 탭틸로를 이용하니 놀라울 만큼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실제 탭틸로로 점자를 배운 시각장애 아동을 분석하니 학습 기간이 6분의 1수준으로 줄었고, 70% 정도던 점자 학습 포기자 비율은 약 20%까지 감소했죠.”
엔지니어에서 소셜벤처 CEO까지
이 대표는 기계공학 분야 연구원이었다. 그는 “내 기술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곳에 쓰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2015년 회사를 나와 사회적기업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다가 엎기를 수십번. 우연히 점자를 배울 때 쓰는 교구가 전부 구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 대표는 “점자 교구가 옛날 방식 그대로라 시대가 변해도 점자 문맹률이 낮아지지 않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는 떠올랐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탭틸로의 움직이는 점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점 하나하나에 초소형 모터를 달아야 하는데 이를 만드는 업체가 없었다. 커다란 사이즈의 시제품을 만들어 업체들을 설득해나갔다. 2년에 걸친 개발 끝에 2017년 탭틸로를 세상에 내놨다.
개발 직후 이 대표는 탭틸로를 들고 미국의 ‘보조공학박람회’에 참석했다. 세계 각국 바이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해외시장에 눈을 뜬 이 대표는 이때부터 기존에 탑재돼 있던 한국어와 영어 외에 스페인어·독일어·포르투갈어·아랍어·폴란드어 등 7개 언어를 추가했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올해 추가할 예정이다. 최근에 업데이트한 탭틸로에는 교사가 원격으로 지도할 수 있는 기능을 담았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비대면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대표는 국내에서도 탭틸로를 알리기 위해 복지관과 맹학교 등을 수없이 돌아다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거절’이었다. 150만원에 달하는 기기 가격을 부담스러워한 탓이었다.
현실적으로 가격을 낮추는 건 어려웠다. 그는 기업이나 비영리재단의 사회공헌 사업을 노리는 것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2019년 SK텔레콤과 손잡고 110개의 탭틸로를 전국 복지관과 맹학교 등에 보급했다. 지난해부터는 SK행복나눔재단과 3년간 500명의 시각장애 아동에게 탭틸로를 활용해 점자를 가르치는 ‘문해력 향상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 대표의 목표는 점자 문맹률을 1%씩 차근차근 낮춰가는 것이다. 그는 “전 세계 시각장애인 3억명 가운데 1%만 점자를 읽을 수 있게 돼도 300만명”이라며 “너무 큰 목표가 아닌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누구든 점자를 배우고 싶으면 언제든 쉽게 배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요. 탭틸로를 계속 보급하다 보면 맹학교나 복지관에 가지 못하는 사람도 점자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이재은 청년기자(청세담12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