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행복나눔재단 ‘시각장애 아동 보행 교육 프로젝트’ 현장
정안인(正眼人)은 보행을 ‘배우지’ 않는다. 태어난 순간부터 주위를 보고 따라하며 걸음마를 뗀다. 보통 80% 이상의 정보를 시각으로 얻기 때문에 정안인은 자연스럽게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에게 보행은 ‘배움’의 영역이다.
영유아기 때는 보호자가 동행하기 때문에 상당수 아동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보호자도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분리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녀가 성장하면서 ‘스스로 걷는 것’의 필요성을 점차 깨닫는다.
원래 시각장애 아동 보행 교육은 맹학교에서 정규 교과로 ‘치료교육’에 포함됐지만, 2007년 특수교육법이 개정되며 정규 교과에서 제외됐다. 지금은 원하는 학생에 한해 ‘방과후 특별활동’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현장에서는 주1회 정도로 교육이 진행되다보니 제대로 걷는 법을 익히기가 어렵다는 반응이 많다. SK행복나눔재단에서 올해 ‘시각장애 아동 보행 교육 프로젝트’를 론칭한 이유다.
시각장애 아동은 어떻게 걷는 법을 배울까. 지난달 19일, 기자는 보행 교육의 필요성을 체감하기 위해 안대를 쓰고 교육을 직접 받아봤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눈을 가리니 거리가 위험해졌다.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이날 기자가 보행지도사에게 가장 많이 외친 말이었다.
#1. 보행지도사와 함께 걸었던 10분… “경보하는 것 같았다”
“손이 아니라 팔꿈치를 잡아야 해요.” 교육은 보행지도사의 팔꿈치를 잡는 것부터 시작됐다. 흔히 손을 잡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지만,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끌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이 손을 놓고 싶을 때 놓지 못하는 것도 팔꿈치를 잡게 하는 이유라고. 시각장애인을 안내하기 위해서는 ‘어느 손이 더 편한지’, 혹은 ‘안내가 필요한지’ 등 그들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예의라고 했다.
“이동할게요.” 20년 경력의 보행지도사 이해자씨의 말에 한 걸음 내딛었다. “앞에 보도블록 한 칸이 있어요”, “오른쪽에 자전거가 있는데 안 닿으니까 계속 걸으시면 돼요”… 걷는 순간, 속도에 흠칫 놀랐다. 지도사는 평소 걷는 속도라고 말했지만, 경보를 하는 느낌이었다. 지도사의 팔꿈치를 놓치기 싫어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처음 스케이트를 신고 빙상장에 들어간 것 같았다. 다리를 움직였지만, 뻣뻣하게 굳은 느낌이었다. 넘어지는 것이 무서워, 엉덩이는 저절로 뒤로 빠졌다. 지도사는 “계속 엉거주춤 걷게 되면 추후에 자세를 교정받아야 한다”라며 “어릴때부터의 보행 교육이 중요한 이유”라고 했다.
평소 인지하지 못한 차소리도 3배 정도 크게 들렸다. 온갖 신경이 귀로 쏠렸던 탓인지 마치 기자에게 돌진하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손을 놓고 얼굴을 가렸다. “앞에 계단 3개가 있어요.” 지도사가 자세히 설명했지만, 몸이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한 발짝 올라설 때마다 무서웠다.
#2. 흰지팡이를 사용해 혼자 걷기, “보행은 너무 어려워”
시각장애인은 보행시 흰지팡이를 사용한다. 가장 적합한 길이는 본인 겨드랑이까지 오는 정도. 지팡이를 악수하듯이 감싸는 느낌으로 잡되, 집게 손가락은 전방을 향해 펼쳐야 한다. 또한 배꼽을 기준으로 자신의 앞으로 향해야 ‘비어링’ 현상이 오지 않는다. 비어링이란 한 쪽으로 방향이 전향되어 걷는 현상으로, 일직선으로 걷지 못하고 한 쪽으로 쏠려서 걷는 것을 말한다.
흰지팡이를 사용할 때는 이점촉타법을 익혀야 한다. 이점촉타법은 지면을 좌우로 두드려서 길을 탐색하는 것을 말한다. 전방 5~10cm를 부채꼴 모양으로 그리며 두 번씩 바닥을 치며 걷는다. 치는 방향과 발걸음은 서로 엇갈려야 한다. 흰지팡이로 왼쪽을 치면 오른발을 내디뎌야 한다. 이때 주의할 것은 지팡이를 너무 높게 들면 안된다는 것. 지도사는 “너무 높게 들면 시간차가 길어져 전방의 장애물이나 길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상에서 길을 가다가 흔히 시각장애인용 블록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블록은 2가지의 종류가 존재한다. 점형 유도블록은 위치 감지용으로, 장애물이나 위험 지점을 알리는 경고용으로 쓰이거나 길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을 안내한다. 선형 유도블록은 방향 유도용으로, 이 블록을 따라 걸으면 된다.
기자도 흰지팡이를 사용해 50m 정도를 걸어봤다. 평소 보행속도로 3분이면 갈 거리가 7분 넘게 걸렸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두려워 온전히 흰지팡이에 집중력을 모았다. 바닥을 이리저리 긁으며 유도블록 위치를 찾아야 했다. 이점촉타법으로 손과 발을 엇갈으며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중과 긴장으로 인해 땀은 비 오듯이 쏟아졌다. ‘걷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3. 시각장애 아동이 ‘걷는 법’을 배우는 방법
새삼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길을 걷는다는 것이 대단했다. 걷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운동이었다. 이 정도 에너지를 쓸 정도면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반면, 이날 만난 박소린(9·전맹)양에게 보행 교육은 ‘재미난 시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이 안보이던 소린 양은 7살 때 처음 보행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다만 이사를 하면서 지속적으로 훈련받지 못하다, 재단의 보행 교육 소식을 들었다. 김주원 SK행복나눔재단 세상파일팀 매니저는 “보행 교육 자체가 많이 없다”면서 “유아기에 교육을 받았더라도 아직 아동에게 체화되지 않아 교육을 다시 받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이날은 소린 양의 4번째 보행 수업이었다. 집에서 단지 내 도서관까지 도착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였다. 소린 양은 자유자재로 이점촉타법을 구사하며, 바닥을 긁으며 앞을 나섰다. 아파트 앞 현관문을 나서자 3시 방향에서 차소리가 들렸다. 기자가 앞서 차소리를 무서워한 것과 다르게, 소린 양은 주차장임을 기억하고 계속 걸었다. 흰지팡이로 화단의 돌을 더듬으며 ‘멈칫’하며 특이점을 느꼈다. 이처럼 청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을 활용해 길을 이해하고 외웠다.
도서관에 들어와 소린 양은 공간을 탐색했다. 흰지팡이를 집어넣고 온전히 촉각으로 공간을 이해했다. 도서관 입구 벽에 기대어 자신의 위치를 기억한다. 옆에 소파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오른쪽부터 한 발 한 발 나서기 시작한다.
“소린아 지금 만진 거는 어떤 물건인 거 같아?” 지도사는 새로운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질문을 건넸다. 소린 양은 “책꽂이인 거 같아요”, “모서리를 만져보니 책상인 거 같아요”라며 촉각으로 공간을 인지했다.
앞을 나서며 부딪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서관 한 바퀴를 다 돌고 난 후, 지도사는 아이에게 ‘어떤 것이 가장 많이 느껴졌어?’, ‘벽에 어떤 종류의 의자가 배치된거 같아?’ 등 질문을 계속 던지며 공간을 암기하게 했다. 겉면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속을 느꼈다. 입구를 1번 벽으로 지정하고, 맞은 편을 3번으로 지정해 걸어 나갔다. 중간에 위치한 책상을 만져보며 공간을 더 입체적으로 이해했다.
다음 목적지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복습 차원이었다. 소린 양은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도서관에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까지의 길을 기억해냈다. 화분과 단지 내 벤치 위치를 흰지팡이로 더듬으며 걸었다. 지도사의 목소리를 이정표 삼아 가게로 발걸음을 향한다. 소린 양은 “이 ‘치지직’ 소리 기억나요!”라며 만둣가게를 파악했고, 옆에 위치한 아이스크림 가게에 도착했다.
무더위를 달래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수업을 마치기 전, 소린 양과 지도사가 직접 만든 단지 점자 지도를 만지며, 오늘 걸어본 코스와 위치를 다시 한 번 기억한다. 지도사는 “시각장애인은 위치, 길의 방향을 오롯이 암기해야 해서 계속 다니면서 몸으로 익혀야 한다”라며 “소린이가 워낙 똘똘해서 금방 외운다”고 전했다.
#4. 부모도 보행 교육에 참여하는 이유
재단 ‘시각장애 아동 보행 교육 프로젝트’의 목표는 ‘수업이 끝난 후에도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독립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는 것’. 이를 위해 12회차 수업 중 부모도 6회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기자가 체험한 것처럼 부모가 아동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가정에서 보행 훈련을 이어가게 된다.
여혜진 SK행복나눔재단 세상파일팀 책임 매니저는 “실제로 지난 파일럿 기수 종료 후 70%의 아이가 스스로 집에서 학교까지 갈 수 있게 됐다”라며 “장애인들의 다양한 사회 진출을 돕기 위해서는 보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 1기는 전맹 아동을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추후 기수부터는 저시력 아동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이날 만난 소린 양도 “예전에는 엄마 손을 잡고 갔는데, 수업을 듣고 난 후 팔꿈치를 잡게 해서 훨씬 더 편하다”라며 “수업을 통해 혼자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제 핸드폰이 생겨서 친구들과 연락이 가능하다”며 “친구들이 놀이터에서 놀자고 하면 혼자 나가는 것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시각장애 아동에게 ‘혼자 걷는 법’을 터득한다는 것은 독립적인 주체로 성장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었다.
조기용 더나은미래 기자 excusem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