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제주에서 흩날린 교육의 씨앗, 아프리카서 열매 맺다

동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부룬디. 면적은 278만ha로 경상도보다 작다. 그간 12번의 내전을 겪었고, 빈곤과 질병에 많은 주민이 고통을 겪었다. 이러한 부룬디에서 올 초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지난 1월 29일 첫 국립 여자고등학교인 ‘최정숙여자고등학교(Muzinda Choi Jung Sook Girls High School)’가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는 소식이다. 최정숙여고는 제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전국 초대 여성 교육감을 지낸 고(故) 최정숙(1902~1977) 선생의 유지를 따르고자 하는 비영리사단법인 ‘최정숙을기리는모임(이하 최기모)’이 한국희망재단과의 협력해 세운 학교다. 고등학교 동창 6명의 모임에서 시작해 지구 반대편에 학교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을 듣기 위해 최기모의 현은자(70) 대표와 고효숙(64) 해외교류사업분과위원장을 지난달 18일 제주시 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동아프리카 부룬디에 국립 여자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한 비영리사단법인 ‘최정숙을기리는모임’의 현은자(왼쪽) 대표와 고효숙 해외교류사업분과위원장. /박준홍 청년기자

교육은 애국이다

“시작은 쪽방촌 노숙인 자립을 돕는 후원회였어요. 후원 구좌는 하나당 2000원. 아무리 많아도 1만 원을 넘지 않는 돈을 60여 명의 회원이 다달이 모아 30만~40만원을 송금해왔어요. 작은 힘이 모이니 큰 힘이 됐어요. 이렇게 모이면 정말 큰일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람들을 모아봤죠.”

고효숙 위원장은 2011년 제주신성여중 교사로 퇴직한 이후 노숙인 지원 단체 ‘한사랑 가족공동체 제주후원회’를 운영하면서 십시일반의 힘을 알게 됐다. 불가능한 일도 비영리 방식으로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위원장은 “당시 현은자 대표를 비롯해 학교 후배, 동료 교사 등 6명이 의기투합해 ‘샛별(신성·新星)들이 모였다’는 의미로 ‘샛별드리’를 결성했다”면서 “3년 뒤인 2017년엔 기금 1억 원을 모았는데,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알아보던 중에 빈곤국가 지원 국제협력단체인 한국희망재단을 통해 아프리카의 부룬디라는 나라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40년이 넘는 내전을 겪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부룬디에서는 남아 선호 의식과 조혼 풍습, 강제 임신 등에 의해 여성들이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다. ‘샛별드리’ 회원들은 이곳에 학교를 짓기로 결정했다.

“한국희망재단과 현지 NGO인 IPSDI를 통해 브룬디 정부에 문의했는데, 학교를 짓는다면 2만평 부지와 기숙사 건립을 지원하겠다는 답이 왔어요. 구체적인 예산안을 짜보니 1억원이 넘는 돈이 더 필요했어요. 그래서 모금 운동을 개방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게 ‘최정숙을기리는모임’을 만들게 됐습니다.”(현은자)

샛별드리는 왜 하필 학교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답은 최정숙 선생에 있다. 최정숙 선생은 제주 최초의 근대 여자교육기관이자 신성여중·고의 전신인 신성여학교를 졸업하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졸업한 뒤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했다. 1919년 3·1 운동에서 학생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1920년부터 제주명신학교, 목포 소화학원, 전주 해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고, 야간 강습소를 운영하며 문맹·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이후 37세의 나이에 고려대학교 의대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첫 학생으로 입학해 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1944년에 제주로 내려가 정화의원을 개소해 사실상 무료로 환자를 치료했다. 광복 이후엔 신성여중에서 1949년부터 무보수 교장으로 일했고, 1964년에는 초대 제주도교육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감으로 선출됐다.

“최정숙 선생님에게 교육은 애국이었어요. 우리나라도 가난했는데, 교육으로 지금의 성과를 이룬 거잖아요. 선생님 말씀이 의사는 몸을 고치고, 교육자는 몸과 마음을 함께 고친다고 하셨어요. 그 시절 통찰이 대단했던 거죠. 이 말을 들으니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 최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을 위해서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그분의 뜻에 따라 실천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졌죠.”

지난 2018년 아프리카 부룬디의 첫 국립 여자고등학교인 ‘최정숙여자고등학교(Muzinda Choi Jung Sook Girls High School)’ 건축 현장을 방문한 후원자들과 현지 주민들의 모습. /최정숙을기리는모임 제공

코로나 사태에도 학교는 열렸다

학교 설립 소식이 지역사회에 전해지자 지인들을 중심으로 약 300명의 후원자가 모였다. 따로 광고는 하지 않았다. “학교를 설립한다고 하자 제일 기뻐하신 분들이, 신성에서 선생님을 교장선생님으로 모셨던 분들이에요. 자기들이 할 일을 우리가 해줘서 고맙다고, 죽어서 선생님 얼굴을 어떻게 뵐까 하고 있었는데 너무 고맙다고 하신 거예요. 그분들 나이가 대부분 70대 후반인데 쌈짓돈을 내어주시고, 어떤 분은 그 나이에 또 귤밭에 나가셔서 번 일당을 주셨어요. 선생님 제자분들은 조금씩이라도 다 후원을 해주셨죠.”

자금이 모이자 학교 건립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한국희망재단과 현지 협력 단체인 IPSDI를 중심으로 오갔다. 예정된 장소는 부룬디 수도인 부줌부라(Bujumbura)에서 약 35km 떨어져 있는 중소 마을인 무진다(Muzinda). “부룬디에서 여자 학교 건립은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시도해보겠다고 나섰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8년 8월, 현지 주민들이 학교 건축을 담당한 지 8개월 만에 최정숙여고 준공식이 열렸다. 같은해 9월에는 신입생 100명을 대상으로 입학식이 진행됐다. 준공식에는 현 대표와 고 위원장을 비롯한 19명의 최기모 회원들과 부룬디의 니아벤다(Pascal Niabenda) 국회의장, 나라히샤(Janvière Ndirahisha) 교육부 장관 등 정부 관료 60여 명과 700명의 마을 사람들이 참석했다. 6개 교실과 기숙사, 도서관, 식당을 갖춘 최정숙여고의 정원은 225명이다. 부룬디 교육 당국은 최정숙여고를 특수학교로 지정하면서 학교에 IT 기기 등을 지원함과 동시에 보다 엄격한 학사 기준을 적용했다. 기숙 생활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다는 소식에 입학 경쟁도 치열해졌고, 66명의 졸업생 중 51명이 대학에 합격하면서 대학 시험에서도 전국 최고 수준의 성적을 냈다.

코로나 19가 아프리카 전역을 덮친 이후에도 최정숙여고에서 확진자는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껏 학교가 문을 닫았던 적은 없다. 코로나19를 견뎌내고 무사히 졸업하게 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0명 중 9명이 넘는 학생들이 취업이나 대학 진학을 희망했다. 결혼을 희망한 학생은 6%였다. 현은자 대표는 “대학에 합격해도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이 때문에 사범대학과 간호대학에 진학하는 우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학비를 지원해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1대1 결연도 시행하고 있다. 후원자 한 사람이 학생 하나를 맡아서 4년 동안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것이다.

대학 진학보다 한국행을 원한 졸업생 두 명은 제주에 2년간 머물면서 제빵, 양재 기술을 배울 예정이다. 지난 8월 19일 제주에 도착한 학생회장 출신 신씨아(19·Ciza Cynthia)씨와 테디안(19·Ndayisaba Thediane)씨는 9월부터 제주대학교에서 한국어 연수를 받고 있다. 이후 후원자 가정에 머물면서 기술 연수를 받는다. 항공편과 어학 연수비는 최정숙 선생 모교인 고려대 의대에서 부담한다.

학교는 마을 자립의 거점

학교가 하나 건립되자 마을은 활기를 띠었다. 학교가 단순 교육 기관을 넘어서 마을 사람들의 자립 기반으로 기능을 하면서다. 최기모는 최정숙여고 내에 병아리 부화장과 사료 공장을 만들었다. 그전까지 마을의 닭고기는 모두 수입해왔는데, 마을의 양계장과 학교의 부화장을 활용해서 주민들은 일자리와 양질의 음식을, 학생들은 실습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얻는 수익은 모두 학교 재정으로 쓰인다. 또한 팜나무가 많은 무진다 지역의 특성을 활용해 제주도 공적개발원조(ODA)사업의 일환으로 학교 내에 팜유 공장을 만들 계획이다. 팜나무 열매로부터 식용유와 비누를 만들 수 있고, 그 찌꺼기는 사료가 되기 때문이다. 무진다 지역의 자립 기반이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초등학교를 건립한 무쿤쿠 지역에도 자립 기반 시설을 세울 예정이다. 고효숙 위원장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가정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아야 한다”면서 “학교를 지원하는 모든 활동이 곧 마을을 후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 최기모에는 약 700명의 후원자가 있다. 전화비, 홈페이지 서버비 등 최소한의 운영비를 제외한 후원금 95%가 사업비로 사용된다. 고효숙 위원장은 “회계를 담당한 세무사가 최기모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고 비용을 받지 않는다”면서 “이런 식으로 최기모 활동에 함께해주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라고 설명했다. 자립 기반을 위한 시설들이 자리를 잡아서 원활히 운영되면 직접 지원은 중단할 계획이다. 현은자 대표는 “어느 선까지 가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서 “학교를 통해서 학생들이 어떻게 꿈을 펼치는지 지켜보고 싶다”고 말했다.

박준홍 청년기자(청세담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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