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닦는사람들 ‘2025 무해런’ 현장
용기도 다회용, 먹거리도 다회용
가끔 5km 정도 달린 기억은 있지만,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는 건 아주 먼 미래라고 생각했다. ‘국내 최초 쓰레기 없는 마라톤’이라는 문구를 보기 전까지는.
마라톤 대회에 나가본 적이 없으니, ‘마라톤’과 ‘쓰레기’는 서로 관계없는 단어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쓰레기가 있었기에 ‘없다’는 말이 뉴스가 될까. ‘지구를 닦는’ 마음으로 달린다는 건 또 어떤 경험일까. 호기심이 머리를 스칠 즈음, 기자는 어느새 ‘무해런’ 10km 코스 참가 신청을 마친 뒤였다.
참가자 550명이 4일 만에 마감된 대회. 이름처럼 ‘무해하게’ 달리기 위한 사람들이 여의도 한강공원에 모여들었다.

지난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기자가 가장 먼저 받은 것은 ‘갈색 배번표’와 ‘다회용 기록칩’이었다. 배번표는 쓰다 남은 크라프트지로 만들었고, 기록칩은 다시 반납해야 하는 구조다. 배번표를 꾸밀 수 있도록 마련된 부스에는 “갈색 대형 종이 봉투와 쇼핑백 등 사용하지 않는 크라프트지가 모여 어느 대회보다 특별한 무해런의 배번표가 탄생했다”고 적혀있었다.
기록칩 또한 다회용이니 “묶고 달린 뒤 꼭 반납해달라”는 안내를 당부했다. ‘양’이 있어야 ‘음’이 보이듯, 지구닦는사람들의 ‘다회용’을 보니 그 대척점에 선 ‘일회용’을 추측할 수 있었다. 배번표도 기록칩도, 이전에는 ‘쓰레기’였겠구나.
◇ 급수대에 종이컵은 없었다…“이런 마라톤은 처음입니다”
대회장 곳곳에서 ‘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먼저, 일회용 컵이 없었다. 대신 다회용 컵에 서울 수돗물 ‘아리수’를 담아 제공했다. 다 마신 컵은 회수통에 넣었다. 몇 초의 동작만으로도 쓰레기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은, 한 마디 말보다 설득력 있었다.
마라톤 대회 유경험자들은 “기존 대회에선 급수대마다 종이컵이 바닥을 뒤덮는다”며 “이번엔 너무 깔끔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6km 지점의 급수대는 컵 하나 바닥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다회용 컵을 간이 풀장에 던져넣은 것만으로도 현장은 정돈돼 있었다.
“제가 되게 느린 러너예요. 예전에 풀코스를 도전했는데, 제 앞에 이미 많은 사람이 지나갔잖아요. 급수대 바닥이 컵으로 뒤덮여 쓰레기장처럼 된 상태에서 물을 마셔야 했어요. 그게 참 불편하더라고요.” (이송이, 41세)
“평소에 10km씩 달리는데, 마라톤 대회에 나갈 때마다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컵 쓰레기가 엄청 인상적이죠.” (오의석, 38세)
대회 후반, 속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마주 오는 러너들이 건넨 “파이팅!”에 다시 몇 발자국을 내디뎠다. 격려와 응원이 그날의 ‘에너지 보충제’였다. 기록보다 응원이 먼저였고, 완주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달리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쓰레기 없는 마라톤’을 꿈꾸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이 모여 함께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벅차게 다가왔다.
◇ 기념품 봉투도, 먹거리 그릇도…모두 다시 쓰인 것들
완주 후, 다회용 기록칩을 반납하자 기념품이 건네졌다. 접이식 실리콘 용기, 대나무 칫솔, 비건 보디스크럽. 모두 다시 쓰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포장봉투도 제각각이었다. 로고도, 재질도 다 달랐다. 다만,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누군가에게서 받아 다시 쓸모를 얻게 됐다는 것이었다.
포토존도 버려진 종이와 병뚜껑으로 만든 ‘정크아트’로 꾸며졌다. 참가자들은 거기서 사진을 찍고, “지구야 고마워”, “같이 오래 살자”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기록판은 분필로 쓰고 지우는 방식이었다. 배번표는 그대로 접어 목에 걸고, ‘무해런 메달’이 됐다.
대회가 끝난 뒤 제공된 먹거리도 ‘무해’했다. 대체육이 들어간 비건 비빔밥과 비건 도넛이 나왔다. 비빔밥은 대접에, 도넛은 뻥튀기 위에 담겨 제공됐다. 남은 음식은 기념품으로 받은 접이식 실리콘 용기에 담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5년째 마라톤에 참가하고 있다는 남상은 씨(40)는 “비건으로 살고 있는데, 음식까지 신경 쓴 게 느껴져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물품보관소 풍경도 달랐다. 비닐 대신 대형 종이봉투가 배치돼 있었다. 작년에 자원봉사를 했다는 방영경 씨(45)는 “이전엔 물품보관함에서 비닐 쓰레기가 산처럼 나왔다”며 “이번엔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기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첫 마라톤이었지만, 불편하거나 버려지는 것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조용하고 단정한 풍경이 이어졌다.
포토존 옆 응원 메시지 게시판엔 다양한 문장들이 빼곡히 적혔다. 그중 기자의 눈길을 끈 건 한 줄이었다. “첫 10km 마라톤이 무해런이라 다행이야.”
황승용 ‘지구닦는사람들’ 이사장은 말했다.
“환경적인 마라톤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지금껏 선택지가 없었죠. 이번 대회를 통해 ‘무해한 방식으로도 마라톤을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기자에겐 첫 마라톤이었고, 모두에겐 첫 ‘무해런’이었다. 그 날, 여의도 한강엔 새로운 선택지가 달리고 있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