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상처와 마주하는 곳

국내 최초 국가폭력 트라우마 치유기관 ‘광주 트라우마 센터’

 

사진집을 펼치니 눈 앞엔 수많은 봉분들이 펼쳐졌다. 여섯 페이지를 빼곡히 채운 741기의 봉분. 5.18 신묘역에 있는 유공자 봉분이 그 안에 모두 담겼다.

곽희성 선생님은 사진을 찍기 전 모든 봉분에 일일이 절을 했습니다. 가까운 분들의 봉분 앞에서는 절 뿐 아니라 소주를 따르며 간단한 제를 지내기도 했고요. (강문민서 광주트라우마센터 부센터장)

곽희성(59)씨는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1년여 동안 진행된 사진치유 프로그램 2기 참여자다. 참여자 7명은 모두 5.18을 경험했다. 사진치유 과정에서 741기의 봉분을 찍은 곽씨는 “처음에는 미안해서 찍기 힘들었지만, 계속 보니까 이 분들 덕분에 나라가 민주화됐고 후대들이 혜택받는다고 생각하니 사진을 찍을 용기가 났다”고 소감을 밝혔다.

곽씨와 같이 사진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한 7명의 사진들이 최근 사진집으로 나왔다. 지난 11월 1일 열린 ‘5월 광주 치유 사진집-기억의 회복2’가 바로 이들의 작품집이다. 이날 열린 발간 기념행사에는 광주트라우마센터 프로그램 참여자 30여명이 함께해, 이들을 축하했다.

 

◇“남은 삶에서라도 행복하게 치유를 하다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기억의 회복 2 사진집 주인공 서정열, 이성전씨 (왼쪽부터)ⓒ광주 트라우마센터

광주트라우마센터가 사진치유 프로그램을 시작한 건 2015년 9월부터다. 강문민서 부센터장은 “사진치유 프로그램의 첫 번째는 5.18 경험자들이 회피하고 살아온 과거의 현장에 돌아가 당시의 기억과 대면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5.18 이후 37년 동안 꿋꿋이 살아온 삶의 원동력과 에너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사진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서정열(56)씨도 고3 딸과 함께 이날 행사장을 직접 찾았다. 딸 다빈 양은 “아빠가 사진치유 프로그램 초반에는 회피했던 과거의 현장에 가다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았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에 다녀왔다’며 사진을 찍은 현장 이야기를 해줬다”고 이야기했다. 사진을 통해 부녀 간의 소통 공간이 조금씩 넓어진 것이다.

서정열씨의 기억 속 5.18은 아직도 생생하다.

“1980년 5월 28일 밤 10시, 친구들과 함께 살던 자취집에 계엄군이 쳐들어와서 아무 말없이 우리들을 때렸습니다. 절반은 기절한 상태에서 포승줄로 묶여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차에 실려 31사단에 갔어요.”

사진치유 과정 중 그는 31사단을 찍어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처음엔 하지 못했다. 이후 다시 찾아갔을 땐 얼굴이 벌게진 채 멀리서 렌즈를 최대한 당겨 찍었다. 그렇게 여러 번 그곳을 찾았다. 덕분에 그는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와 대면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했다.

이날 사진집 발간 행사에 참여한 5.18 경험자들 중 유난히 환하게 웃던 문건양(82)씨는 광주트라우마센터가 주관한 증언치유 프로그램 ‘마이데이-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문씨는 5.18 당시 고1이었던 유공자 문재학 군의 아버지다.

“음악선생님이 말하기를, 우리 치유가 어느 정도 됐는지 눈여겨 보는데 그 기준이 있대요. 첫째는 센터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고, 둘째는 어떻게 하면 옷차림을 아름답게 만들어 볼까 생각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예전엔 아들 생각하면서 나 꾸밀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 집 밖에 나가기도 싫고. 지금은 이렇게 모자도 골라서 쓰고 다니지. 목요일마다 센터 가는 날인데 우리 마누라는 그날만 기다려.”

문씨는 광주트라우마센터를 한 마디로 ‘안식처’라고 말했다.

“그날의 악몽이 테이프처럼 돌아갔었는데, 상담을 하고 나니 많이 좋아졌지. 그 전엔 집밖에 나오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어. 근데 얼굴이 활짝 펴지고 마음 맞는 분들과 만나니까 항시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남은 삶에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행복하게 치유를 하다가 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심리 치유가 필요한데, 거동이 불편해서 못오는 사람들도 있어. 광주트라우마센터가 규모도 더 커지고 지원도 많아져서 회원들을 일일이 집으로 모시러 왔다 모셔갔으면 좋겠어.”

◇“꽃으로도 사람을 때리지 마세요”

센터의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 앞에 보이는 글귀. ⓒ김신애

5.18을 경험한 이들에게 ‘안식처’와 같다는 그곳, 기자는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직접 가보기로 했다. 광주광역시 서구 광주도시공사 10층에 위치한 센터의 문을 열자 눈앞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었다.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국가 폭력 생존자들이 계셔서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광주 트라우마센터는 5.18 민주화 운동 등과 같은 국가폭력, 고문 생존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치유기관이다. 김찬호 연구기획팀장은 “2008년 이후 두 달 사이에 여덟 분이 자살하는 사건이 광주에서 벌어졌다”며 센터가 설립된 이유를 설명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 등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20여년이 지나 2000년대 들어 관련 피해자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례가 점차 늘어났습니다. ‘이분들이 왜 자살을 할까’ 주목해보니, 진실규명이나 처벌 외에도 이분들이 겪는 심리적인 고통이 심각했습니다.”

센터에서 치유 프로그램을 수료하신 내담자 분이 적은 글귀가 나뭇가지에 걸려있다. ⓒ김신애

광주 트라우마센터 자료에 따르면, 5.18민주화 운동 구속자 및 유족 중 55.8%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경험했다. 또한 5.18 관련 사망자 중 자살률은 10.4%.다. 이는 한국 평균 자살률(0.02%)의 약 500배 높은 수치다. 이에 국가폭력 생존자와 그 가족들을 치유하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돕는 치유기관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2012년 10월 광주 트라우마센터는 보건복지부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국내 최초로 고문, 국가폭력 생존자와 그 가족을 위한 치유기관으로 출범, 올해 5주년을 맞았다.

 

◇트라우마센터 근무, 11명 직원 모두가 기간제 근로자

광주 트라우마센터 치유팀 김정주(51) 심리상담사는 “5.18 민주화 운동 관련자와 고문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센터에 오는 것은 쉽지 않다”며 “사건으로 인한 심리적 외상반응을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가 센터 이용률을 낮춘다”고 설명했다. 2017년 10월 기준, 광주 트라우마센터 이용자들은 총 488명이다. 이 중 5.18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인원은 420명.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5.18 민주화 운동 관련자(4125명)의 약 10%가 센터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주 상담사는 “센터를 이용할 때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낙인이 찍힐 까 두려워 오기를 꺼려하는 경우도 있다”며 “국가폭력 생존자와 가족 심리치유에 대한 국가, 사회적인 지지와 협조 그리고 인식전환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광주 트라우마센터는 지난 2012년 보건복지부 정신보건 시범사업으로 출범해 국비와 시비로 운영돼오다 2016년부터 광주시 지방재원만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때문에 센터에서 근무하는 11명의 직원들은 모두 기간제 근로자인 비정규직으로, 매년 계약을 갱신해왔다. 이와 관련, 지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는 국가폭력 생존자와 가족의 치유를 위해 센터에 국가예산을 지원키로 약속, 이에 지난 9월 광주 트라우마센터를 ‘국가 트라우마 치유센터’로 격상시키기로 합의했다. 해외 각국은 이미 고문 생존자들의 치료 및 재활에 대해 국가가 나서서 노력하고 있다. 현재 미국, 서구 뿐 아니라 인도, 필리핀, 네팔 등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 70여 개국에 140여개의 고문생존자 치유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진실이 회복될 때 치유가 일어난다

“고문,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완전히 치유하기 위해선 개인차원의 심리치유 외에 사회적 치유가 함께 더해져야 한다.”

오수성 광주 트라우마센터장의 말이다. 이른바 ‘사회적 치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회적 치유란 트라우마를 일으킨 고문 국가폭력 관련 사건에 대한 진실이 규명돼 사회정의가 바로서는 걸 의미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출간되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금지 됐을 때 5.18관련자들이 재트라우마를 겪는 것은 이런 이유다.

미술치유 프로그램 참여자가 직접 만든 작품. ⓒ김신애

김정주 심리상담사는 “트라우마 심리 치유를 위해선 내담자의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트라우마를 일으킨 관련 사건에 대한 진실이 왜곡돼 내담자가 사회를 부정의하다고 느끼면 그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덧붙였다. 진실이 규명되지 않으면, 오히려 내담자의 울분과 분노가 쌓여 치유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는 주변사람들이 던지는 의심 어린 시선이다. 공권력에 의해 부당한 폭력을 경험한 내담자임에도, 주변에선 ‘그래도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고 한다. 이를 위해 센터는 그날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5.18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그날의 진실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마이데이(My-day)’란 프로그램 등이 그 예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유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내담자와 상담사 간의 돈독한 신뢰감’이다. 광주트라우마센터 강문민서 부센터장은 “트라우마란 사회가 안전하다는 믿음이 파괴되어 생긴 것”이라며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중요한 점은 이곳에선 당신의 이야기를 마음 놓고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센터는 내담자와 상담사 간의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국가폭력, 고문 생존자와 그 가족의 트라우마를 완화하고 사회적 관계를 증진시키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심리상담, 정형도수 물리치료, 사진, 원예, 음악, 미술 치료 등 다양하다.

헌법 제 37조 2항에는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공공의 필요를 명목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기에, 거꾸로 누군가는 공권력의 억울한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제2, 제3의 억울한 5.18 피해자를 막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치유센터는 그래서 필요하다. 국가 트라우마센터는 우리 모두의 것인 셈이다.

김신애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8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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