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월)

‘학교’ 너머 희망을 보다…청소년참여활동단체 ‘혜욤’ 이야기

학교를 나온 아이들, 먼 세상 이야기 같나요?
학교 밖 청소년과 세상을 잇는 청소년참여활동단체 ‘혜욤’

청소년단체 혜욤을 만든 박배민 대표. /혜욤 제공
청소년단체 혜욤을 만든 박배민 대표. /혜욤 제공

30만명. 우리나라 학령인구 중 초·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을 제외한 숫자다. 제도권 교육 방법이 맞지 않아서, 몸이 좋지 않아서,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학교를 나오는 청소년은 매년 6만여 명씩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15년부터는 ‘학교 밖 청소년에 관한 지원 법률’이 시행되며 국가 차원의 지원도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만 있던 청소년들은 이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소재 파악이 되지 않아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청소년이 대다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문제는 학교 밖 청소년들이 소속돼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가 거의 없어, 한창 사회성을 길러야 할 나이에 오갈 곳 없이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 밖 청소년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청소년참여활동단체 ‘혜욤’을 만든 박배민(24·사진)씨도 그랬다.

회계사를 꿈꿨던 박씨는 실무를 배우기 위해 해당 직군과 관련된 특성화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박씨가 입학하고 본 학교의 실상은 기대와 달랐다. 입학한 학생들의 대부분이 특성화고 학생만 따로 뽑는 대학 입시 전형을 겨냥한 것이었고, 학교 또한 입시 실적을 내는 데 급급했다. 박씨는 ‘내가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고등학교 1년을 보냈다.

박씨의 학교에 대한 불만이 제도권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커진 것은 2010년, ‘김예슬 선언(당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이던 김예슬씨가 교정에 붙인 대학교육 거부 대자보)’을 접하면서다. 박씨는 “학교 교육이 학생들의 창의력과 인성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이 필요로 하는 톱니바퀴를 만들기 위한 컨베이어 벨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니던 학교라도 조금은 바뀔까 싶어 피켓을 들고 교문 앞에서 1인 시위도 했다. 하지만 친구들, 선생님으로부터 돌아온 건 무관심뿐이었다. 여기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박씨는 ‘학교 안에서 뭔가 변화를 이끌어내기가 어렵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미련 없이 자퇴서를 써 냈다.

◇ 철학 모임을 시작으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을 ‘헤아리는’ 단체가 되다

‘저는 철학, 사회복지, 회계, 독일어에 관심 있는 그냥 평범한 남자입니다. 혼자 공부하려니 힘들고 독단에 빠지기도 쉽고……. 그래서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소모임을 만들까 해요. 어려울 까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도 이제 막 철학 공부를 시작했으니, 처음부터 같이 공부하는 겁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학교를 나와 여유가 생긴 박씨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대한 답을 ‘철학’에서 찾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공부하기에는 막막했던 박씨는 2012년 9월, 온라인 커뮤니티 ‘세상이 학교인 자퇴생들’에서 함께 할 사람을 모았다. ‘헤아리다’의 옛 말인 ‘혜아리다’에서 착안해 모임 이름도 ‘혜욤’이라고 지었다.

지난 10월 27일 신촌에서 만난 김하영씨. 들고 있는 책은 김씨가 올해 4월 출간한 시집 『16-17』이다. /혜욤 제공
지난 10월 27일 신촌에서 만난 김하영씨. 들고 있는 책은 김씨가 올해 4월 출간한 시집 『16-17』이다. /정서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종각의 한 카페에서 9명이 처음 모였어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긴장도 했어요. 14살부터 20살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왔는데 ‘자퇴생’이라는 것만으로도 공감대가 있었죠. 혜욤이라는 모임이 자리를 잡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어요. 다들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나왔는데, 주제가 주제다 보니 어려워해서 금방 그만두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부담되지 않으면서도, 모임에 온 사람들이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학교를 나온 이들에게 혜욤은 단순한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 책읽기를 핑계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곳이었다. 아홉 명이 모여 시작한 혜욤의 온라인 회원은 어느새 140명으로 늘었다. 봉사를 자원하는 활동가들이 생겨 현재는 고양·대전·부천·성남 네 곳에 지부도 두고 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기획해 영화보기, 사진찍기, 등산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세상을 공부한다.

작년 9월에 자퇴한 김하영(18)씨도 혜욤의 ‘사박사박 맨발’ 활동을 시작으로 1년 가까이 혜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동대문 성곽길, 낙산공원, 마로니에 공원 등 맨발로 도시를 돌아다니는 이색 체험 프로그램이다.

김씨는 “학교에서는 학년과 나이를 따지고 나보다 어리면 반말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런 것 없이 서로 존댓말을 해서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김씨는 지난 7월 혜욤이 기획한 ‘학교밖청소년 박람회’에서 직접 쓴 시집 『16-17』을 판매하기도 했다.

◇ 학교 바깥은 청소년에게 여전히 험난하고 차갑다

30만 명이 넘는 청소년이 학교를 나왔지만 사회에서 이들은 여전히 낯설고, 생소한 존재다. “사람들은 뉴스에 자주 나오는 비행 청소년이 대다수일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 대부분이 집에 있거나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빠서 잘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에요. 저도 저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죠.” 지난 해 8월부터 혜욤 고양지부 활동가로 일하는 정지용(22)씨는 아쉬움을 표했다.

학교 밖으로 나온 청소년들이 고초를 겪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박씨는 “최저시급이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아도 청소년들을 지켜줄 학교가 없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현장 등에서 학교 밖 청소년들은 대우를 훨씬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장이나 공모전에 지원하려고 해도 자격이 ‘학생’으로 명시돼있는 경우가 많다. 지원이 가능한지 문의를 꼭 다시 해야 하고, 그마저도 답이 오는 경우가 적다고 한다.

이에 혜욤은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등과 연계해 피해 사례를 찾고 학교 밖 청소년의 권리를 지키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 꿈드림, 서울시립청소년이동쉼터 작은별, 청년허브 등의 기관들과도 협업하며 지원과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들을 발굴하기도 한다. 지난해부터는 기관에서 지원을 받게 돼 활동에 참여하는 청소년들의 금전적인 부담도 줄었다. 시에서 열리는 청소년 관련 포럼이나 회의에 참여해 ‘학교 밖 청소년’ 용어 개편, 청소년 참정권 등 정책 제언을 함께 한다.

지난 10월 13일 영등포구 도림천에서 스트레스해소모임이 진행됐다. 활동가들과 청소년들이 함께 농구를 하고 있는 모습. /혜욤 제공
지난 10월 13일 영등포구 도림천에서 스트레스해소모임이 진행됐다. 활동가들과 청소년들이 함께 농구를 하고 있는 모습. /혜욤 제공

어려움도 많다. 혜욤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할 수익원이 없어 2014년까지는 박 대표의 사비를 들였다. 지부의 활동가들도 돈을 따로 받지 못하다 보니 생업이 달려 있는 사람들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거나, 더 하고 싶어도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정씨는 “저도 여기서 배운다는 생각으로 일하니까 아직은 급여가 없어도 괜찮지만, 언제까지고 할 수 없으니 가족들이 걱정도 많이 한다”고 말했다.

혜욤은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정식 법인으로도 등록할 예정이다. 활동 지역 외에도 권리 보호나 또래와의 교류가 필요한 수많은 청소년을 만나기 위해서다. 또한, 법적인 성격을 갖추고 후원 등 자체 재정구조를 만들어 보다 지속 가능한 단체로 거듭나고자 한다.

“스무 살, 마흔 살의 만학도가 있듯이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도 많습니다. 그런 청소년들이라고 신기하거나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라는 걸 더 많은 분들이 공감했으면 합니다. 모든 청소년들이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받고, 자아를 찾을 수 있는 기회와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정서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청세담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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