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연방 보조금 통제 강화…비영리 “정치가 지원 좌우할 수도” [글로벌 이슈]

정치 임명직 보조금 심사 참여·DEI 지원 제한…진행 중인 지원도 중단 가능
시민사회 “정치적 지원 선별” 우려…공개 의견 29만 건·소송 검토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 보조금에 대한 행정부의 통제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규정 개편을 추진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개정안은 정치 임명직이 보조금 심사에 참여하고,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는 단체에 대한 연방 지원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시민사회는 정치적 판단이 보조금 지원 여부를 좌우하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논란이 된 것은 미국 예산관리국(OMB)이 지난 5월 입법 예고한 연방 보조금 운영 기준인 ‘통합 보조금 관리지침’ 개정안이다. 이 지침은 비영리단체와 대학, 주·지방정부 등 연방 보조금 수혜기관에 적용되는 공통 규정으로, 보조금 심사와 집행, 관리 방식을 정한다.

OMB는 이번 개정이 연방 보조금 운영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이고 납세자 세금이 본래 공공 목적에 맞게 쓰이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행정부 시기 연방 보조금이 DEI 정책 등 일부 이념적 사업에 사용되면서 본래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OMB의 판단이다.

개정안은 정치 임명직이 보조금 심사에 참여하도록 하고, 사업이 더 이상 국익이나 기관의 정책 방향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면 진행 중인 보조금도 중단하거나 종료할 수 있도록 했다. DEI 프로그램과 미등록 이민자, 트랜스젠더 지원 활동 등에 대한 연방 지원을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최근 미국에서는 비영리단체 ‘피딩 아워 퓨처(Feeding Our Future)’가 코로나19 시기 연방 아동급식 지원금 약 2억5000만 달러(약 3760억 원)를 빼돌린 사건을 비롯해 연방 지원금을 악용한 대규모 사기 사건이 잇따라 적발됐다. 이 같은 사건을 계기로 연방 재정지원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졌다. 다만 이번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은 회계 관리 강화 자체보다 정치 임명직의 심사 권한 확대와 보조금 지급 기준 변경이 적절한 수준인지를 두고 벌어지고 있다.

◇ “보조금 심사, 블랙리스트 우려”

현지 시민사회에서는 이번 개정안이 단순한 보조금 운영 규정 개정이 아니라 정부가 지원 대상을 정치적으로 선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최대 비영리 네트워크인 전국비영리협의회(NCN)는 트럼프 행정부의 연방 보조금 운영지침 개정안이 정부가 지원 대상을 정치적으로 선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며 철회를 촉구했다. /National Council of Nonprofits

미국 최대 비영리 네트워크인 전국비영리협의회(National Council of Nonprofits·NCN)는 정치 임명직이 보조금 심사에 개입할 경우 특정 단체를 사실상 지원 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라 사디안 NCN 공공정책 담당 수석부회장은 “정치 임명직이 더 이상 지원하지 않을 단체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매우 쉬워질 수 있다”며 “배제된 단체는 자신이 정치적 이유로 제외됐는지조차 알기 어렵고, 이에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제한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영리단체들은 특히 국익의 판단 권한이 행정부에 있다는 점을 가장 우려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지원 대상도 달라질 수 있고, 공익적 사명을 유지할 것인지 연방 지원을 받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거·의료·교육·식량 지원·재난 복구 등 지역사회 필수 서비스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히스패닉 연맹(Hispanic Federation)의 프랭키 미란다 회장은 “많은 회원 단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며 “연방 지원이 줄어든 상황에서도 빠듯한 예산으로 버텨온 단체들은 이번 조치까지 감당하지 못할 수 있다”고 크로니클 오브 필란트로피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 과학계 “연구비 정치화하면 중국과 경쟁서 불리”

과학계는 이번 개정안이 미국의 연구 경쟁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꼬집는다. 정치 임명직이 연구비 심사에 참여하면서 수십 년간 유지돼 온 전문가 중심의 동료평가 체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이유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미국의과대학협회(AAMC) 등은 정치적 판단이 연구비 지원을 좌우하면 연구의 자율성과 객관성이 훼손되고 미국의 연구 경쟁력도 약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과학저널 ‘사이언스(Science)’의 편집장 홀든 소프는 “과학적 우수성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 연구비 지원을 결정하게 될 수 있다”며 “지난 80년간 미국을 과학 강국으로 만든 원칙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 28만 건 의견 접수…비영리·과학단체 공동 대응

미국 예산관리국(OMB)의 연방 보조금 운영지침 개정안에 대해 13일 오후 3시(한국시간) 기준 29만 건 이상의 공개 의견이 접수됐다. /미국 연방관보 홈페이지 갈무리

13일 오후 3시(한국시각) 기준 OMB에는 이번 개정안에 대한 공개 의견이 29만 건 이상 접수됐다. 비영리단체와 과학계는 회원 단체들을 대상으로 의견 제출을 독려하며 공동 대응에 나섰다.

NCN은 개정안이 현장에 미칠 영향을 구체적으로 담은 의견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단협의회(Council on Foundations), 인디펜던트 섹터(Independent Sector) 등 주요 비영리 연합체와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우려하는과학자연합(Union of Concerned Scientists)도 회원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협의회는 다양한 사례가 담긴 의견이 많이 접수될수록 규정 검토 절차를 늦추고, 향후 규정 시행을 막기 위한 소송의 근거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조지워싱턴대 규제연구센터의 스티븐 발라 공동소장은 규칙 제정(rulemaking)은 여론조사가 아닌 행정절차인 만큼 의견 제출 규모가 크다고 해서 규정이 반드시 수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공화당 내부에서도 우려가 제기됐다. 수전 콜린스 상원 세출위원장은 OMB에 의견수렴 기간을 90일로 연장하고 일부 조항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진행 중인 보조금을 폭넓게 중단할 수 있도록 한 조항과 정치 임명직의 추가 심사 절차가 과학·의생명 연구와 소규모 지역사회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OMB는 현지시각 13일 자정까지 공개 의견을 접수하고 이를 검토한 뒤 오는 10월 1일 시행을 목표로 최종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시민사회는 최종안이 확정될 경우 소송 등 법적 대응도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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