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美 항소법원 판결로 다수 집단 차별 소송 문턱 낮아져
대법원 판례·트럼프 정책 속 “구조적 차별 간과” 우려
미국 연방항소법원이 소수자가 아닌 다수 집단이 제기하는 ‘역차별’ 소송의 입증 기준을 완화하는 판결을 내렸다. 백인이나 남성 등 다수 집단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차별을 주장할 때 별도의 추가 입증을 요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판결로 기업과 공공기관의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을 둘러싼 법적 공방이 확산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뉴저지주 등을 관할하는 미국 제3연방항소법원은 지난 3월 6일(현지시간) 뉴저지주의 한 경찰 승진 인사를 둘러싼 차별 소송을 다시 진행하도록 판결했다. 백인 경찰 부국장 크리스토퍼 매시가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아랍계 무슬림 경찰관이 서장으로 승진한 것이 인종과 종교에 따른 차별이라며 제기한 소송이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다수 집단이 제기한 차별 소송에 별도의 높은 입증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일부 법원에서는 다수 집단 원고가 차별을 주장할 때 ‘배경 정황’을 추가로 입증하도록 요구해 왔다. 이는 고용주가 다수 집단을 차별하는 특별한 정황이 있다는 점을 원고가 먼저 입증하도록 하는 기준이다. 일반적인 차별 소송보다 더 높은 문턱을 요구해 다수 집단의 소송을 사실상 걸러내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제3연방항소법원은 이러한 기준이 연방 민권법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에서 에밀 보브 판사는 “미국의 고용 차별 금지법인 1964년 민권법(Title VII)은 직장 내 모든 차별을 없애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며 다수 집단에 별도의 요건을 부과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이번 판결은 최근 미국에서 커지고 있는 DEI 정책 논쟁에서 나온 결정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부터 여성, 성소수자 등 대표성이 낮은 집단의 참여를 확대하는 DEI 정책이 역차별을 낳는다고 비판했다. 취임 이후 연방기관의 DEI 프로그램 폐지·축소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을 내리고 기업에도 관련 정책을 재검토하라고 압박했다.
◇ “법은 소수자뿐 아니라 모두를 보호”…역차별 기준 바꾼 대법원
판결의 배경에는 지난해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가 있다. 2025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오하이오주 공무원의 승진 차별 소송에서 다수 집단 원고에게 별도의 입증 기준을 요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오하이오주 공무원이었던 말린 에임스가 자신이 이성애자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탈락하고 강등됐다고 주장하며 제기한 소송이다. 에임스는 당시 동성애자인 상사 아래에서 일하던 중 승진에서 탈락하고 대신 동성애자 여성이 승진했으며, 이후 급여가 삭감된 상태로 강등되고 그 자리에 동성애자 남성이 임명됐다고 주장했다.

하급심 법원은 다수 집단 원고에게 추가적인 입증 책임이 필요하다며 사건을 기각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만장일치로 뒤집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하급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민권법은 소수자뿐 아니라 모든 개인을 동일하게 보호하기 때문에 다수 집단에 별도의 입증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이 판결은 일부 법원이 적용해 온 ‘배경 정황’ 기준을 사실상 무력화한 결정으로 평가됐다.
◇ 트럼프 DEI 금지 조치 효력 인정…기업 DEI 소송 이어져
법원 판결과 함께 행정부와 규제기관의 움직임도 이어진다. 2월 6일 제4연방항소법원은 트럼프 행정부의 DEI 금지 정책 시행을 막아온 하급심의 가처분 결정을 뒤집고 행정명령의 효력을 다시 인정했다.
다만 항소법원은 행정명령 자체의 위헌 여부를 곧바로 판단할 수는 없다고 보고, 향후 정부 기관이 이 정책을 실제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흐름은 기업의 다양성 프로그램을 둘러싼 실제 소송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2월 18일 미국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는 코카콜라 제품을 병입·유통하는 업체인 코카콜라 베버리지스 노스이스트를 상대로 성차별 소송을 제기했다.
EEOC는 이 회사가 약 250명의 여성 직원만을 대상으로 유급 네트워킹 행사를 열어 남성 직원의 참여를 배제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기업의 다양성 프로그램을 문제 삼아 제기된 첫 소송이다.
◇ “다수·소수 동일 기준 적용, 구조적 차별 간과한다”
역차별 소송 기준 완화가 소수자 보호 정책을 약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 법률방어기금(NAACP) 등 시민권 단체들은 지난해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다수 집단과 소수 집단을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하면 미국 사회에 남아 있는 차별의 현실을 무시하게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법원 내부에서도 비슷한 문제 제기가 나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DEI 금지 조치 효력을 허용한 판결에 참여한 제4연방항소법원의 알버트 디아즈 판사는 별도 의견에서 이러한 결론에 “마지못해 동의했다”고 전했다. 그는 정부 기관들이 ‘형평성(equity)’과 같은 특정 키워드를 기준으로 프로그램을 일괄 폐지하는 상황을 두고 “불길한 이야기(sinister story)”라고 표현하며 우려를 표했다.
2023년 연방대법원이 대학 입학에서 인종을 고려한 정책을 위헌으로 판단한 이후 미국에서는 다양성 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교육을 넘어 기업과 노동시장으로까지 번졌다. 최근 법원 판결과 행정부 정책이 맞물리면서 DEI 정책을 둘러싼 법적 공방도 기업과 노동시장 전반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