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 은행 청각장애인 ARS 인증 현황 전수 조사
2015년 3월, 배성규(38)씨는 청각장애인이 금융서비스를 이용할 때 전화 ARS 인증 시스템으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SNS를 통해 알리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서도 조사하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배씨가 이 사실을 청와대와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에 민원으로 넣자 ‘장애차별시정의원회’ 회의가 개최됐지만, 은행에서 대책을 마련 중이라 별다른 조치가 필요 없다며 기각됐다. 같은 해 6월 김명아(35) 씨가 이용하던 은행에 ARS 인증 문제를 항의했을 때도 돌아온 답변은 “인증 예외를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추가 인증 예외를 신청하려면 보안 사고에 취약해지는 것을 감수해야 했다. 이 문제에 공감한 이들은 2015년 9월 ‘청각장애인 ARS 인증 대책 모임’을 개설하기에 이른다.
◇청각장애인 울리는 ARS 인증…지난해 소비자원 조사 결과, 여전히 제약 존재해
청각장애인 ARS 인증문제가 불거진 것은 이전까지 이뤄지던 문자(SMS) 인증이 전자금융사기에 취약하다는 문제점이 나오면서부터다. 2013년 9월 말부터 공인인증서를 발급받거나 1일 일정 금액 이상을 이체할 때 추가 본인인증을 하는 전자금융사기 예방서비스가 전면 실시됐는데, 그 이후 스마트폰에 악성앱을 설치해 SMS 인증번호를 탈취하는 고도의 사기 행태가 나타난 것이다. 문자 인증이 스미싱, 파밍 등의 보안사고에 취약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자, 2014년 이후 다른 금융서비스에 필요한 추가인증 수단으로 전화 ARS가 주로 사용됐다. 청각장애인에게 선택권조차 없이 이 방식을 써야만 했다.
문제는 음성 안내에 따라 정보를 입력해야 하는 전화 ARS 때문에, 청각장애인은 금융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주변 사람의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불편은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 차별금지법)에도 어긋났다.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17조는 “금융상품 및 서비스의 제공자는 금전대출, 신용카드 발급, 보험가입 등 각종 금융상품과 서비스의 제공에 있어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을 제한·배제·분리·거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한다.
이에 일부 장애인은 2014년 11월 금감원에 민원을 넣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도 금융위원회(이하 금융위)에 시정을 요구했다. 금감원은 이후 보도자료를 통해 ‘비대면 거래 시 본인인증수단으로 신분증 사본전송, 문자 인증 등 합리적 방안을 허용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ARS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된 지 1년이 지난 2016년 말, 한국소비자원(이하 소비자원)은 청각장애인의 인터넷뱅킹 금융서비스 이용 실태를 발표했다. 소비자원이 주요 5개 은행(KB국민, 신한, 우리, KEB하나, NH농협)을 대상으로 ‘개인정보 변경’, ‘공인인증서 등록·복사’, ‘단말기 지정·해제’, ‘고액·일반이체’ 서비스 이용을 조사한 결과였다.
이에 따르면, 이용 단말기를 지정 신청할 때는 5개 은행이, 개인정보 변경 및 공인인증서 등록, 계좌이체할 때는 3개 은행이 각각 ARS 인증을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몇몇 은행이 ARS 승인 번호를 화면에 제공하고 있었으나 일부 서비스에 제한됐다. 당시 소비자원은 조사 결과를 사업자와 공유해 본인인증 수단 다양화를 권고했고, 금융당국에는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보이는 ARS’ 도입 등 개선 시도 있지만 제약은 여전
소비자원의 권고 이후 1년쯤 지난 지금, 문제는 개선됐을까. 기자는 ‘청각장애인 ARS 인증 대책 모임’과 함께 일주일 간 8개 은행을 대상으로 ‘보안카드’를 사용할 때의 전화 ARS 인증 현황을 조사했다. 그 결과 음성 ARS를 진행하던 과거와 비교해 대체수단을 마련하거나 ‘보이는 ARS’를 구축하는 등 개선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A, C, F 사의 결과에서 보이듯 PC 지정 해제, 고액이체, 일반이체, 개인정보 변경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땐 ARS로만 인증이 가능한 경우가 남아 있었다.
8개 은행 중 D사와 H사는 조사한 모든 금융서비스에서 추가 인증 수단으로 문자도 제공하고 있어, 청각장애인의 금융서비스 이용에 가장 우호적인 은행으로 판단됐다. A사, E사, G사는 ‘보이는 ARS’를 구축해 승인 번호나 전화 음성을 안내하고 있다. B사, C사, F사는 스마트 보안카드나 OTP, 1회용 인증번호 등의 대체 수단을 제공하지만, 영업점에서 발급받아야 한다는 점이 있었다.
조사를 함께 진행한 김명아씨는 “청각장애인은 사실 SMS 인증이 가장 편하고 좋다”고 했다. ‘보이는 ARS’ 인증은 있어도 전화를 사용한 경험이 거의 없어 긴장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은행에서 문자 인증은 보안상 이유로 금융서비스의 종류에 따라 제한적으로 사용되거나 아예 사용할 수 없는 수단이다.
◇청각장애인이 금융서비스 불편 없이 이용하려면…
청각장애인의 금융서비스 제약을 줄일 방법은 더 없을까. 2015년 청각장애인 ARS 인증 문제 제기가 본격화되자 국내의 한 시중은행은 ‘스마트 OTP(One Time Password)’를 무료 배포하고 시범 운영을 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스마트 OTP는 카드(IC칩)를 스마트폰(NFC 지원)에 접촉하면 앱에 번호가 표시되는 일회용 비밀번호 생성기다. OTP가 보안카드보다 보안등급이 더 높은 매체라 OTP를 발급받으면 계좌이체, 공인인증서 발급 등의 서비스를 이용할 때 추가인증이 줄어든다.
그러나 OTP 역시 추가인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은행마다 차이는 있지만, 보안등급이 높은 매체를 사용해도 고객정보의 휴대폰번호 변경, 현금 IC카드 비밀번호 등록 등 추가인증이 필요한 업무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은행마다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은행에서 OTP를 발급받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청각장애인에게 더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각 은행이 보안 사정과 시스템 등에 맞게 추가 인증 수단을 다양화하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B사의 경우 스마트 OTP를 ARS와 같은 추가 인증수단으로 인정해, 청각장애인이 OTP를 사용하면 다른 인증을 할 필요가 없다. F사는 “조사 결과를 보면 개인정보 변경 시 ARS 인증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추가 문의 결과 청각장애인 고객에게 문자 인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답변이 왔다.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금융위는 지난 9월 ‘장애인 금융이용 종합실태조사’(유형별 장애인 1192명 대상)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에 따르면 이용자 중 64.8%가 온라인·모바일 서비스 이용에서 불편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그중 30.7%에 해당하는 응답자는 ARS 등의 본인인증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답했고, 응답자는 주로 청각·언어·정신장애가 있는 장애인이었다. 이에 금융위는 “장애인 대상 금융서비스 제공을 강화하고 있으나 체감도가 높지 않은 상황”이라며 “장애인 고객에 특화된 안내, 상담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을 밝혔다. 언어·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상담, 수화상담, 보이는 ARS 등도 계속적으로 늘리겠다고 약속했다.
변우리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8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