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온으로 올라간 유리는 액체가 되기 직전, 가장 뜨거우면서도 단단한 형태를 유지해요. 그 지점이 500℃죠.”
유리의 뜨거움과 단단함을 뜻하는 ‘500℃’는 청주대학교 창업동아리의 이름이 됐다. 500℃의 회장 이승호(26·공예디자인학과)씨는 “유리처럼 뜨거운 열정으로 유리공예에 전념하자는 뜻으로 500℃라고 이름 붙였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500℃가 다루는 유리는 조금 특별하다. 재활용되지 않는 ‘수입 주류병’이 주재료다. 국산 주류병이 아닌, 수입 주류병에 이들이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주대 창업동아리 500℃를 찾아가 그 답을 들어봤다.
◇영롱한 빛깔…쓰레기에서 구해낸 수입 주류병
평범한 유리를 재활용해 액세서리를 만들던 500℃는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창업 아이템을 찾았다. 밤늦게까지 작업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500℃ 동아리원들은 학교 근처의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던 중 지금까지 보지 못한 파란색 맥주병을 발견했다. 이승호씨는 “국산 주류병은 대부분 초록색이나 갈색인 반면 수입 주류병의 색은 다양하고 디자인도 이국적이었다”고 말했다. 챙겨온 파란색 병으로 접시를 만든 500℃는 그날 이후 수입 주류병의 매력에 빠졌다.
알아보니, 수입 주류병은 ‘골칫덩어리’였다. 국산 주류병과 달리 빈병보증금이 없어 수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씨는 “국산 주류병이 수거되면 96%가 재활용되지만, 수입 주류병은 100톤 중 23톤이 수거되고 그 중에서 1톤 정도만이 재활용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최근 수입 맥주시장이 성장해 맥주병 폐기물량도 늘어나고 있었다.
500℃의 업사이클링(Upcycling) 기술이 꼭 필요한 분야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한다. 업사이클링이란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과는 달리, 디자인을 새롭게 하거나 활용방법을 바꿔 재활용품에 완전히 새로운 가치를 입힌 제품으로 바꿔내는 것이다. 이들은 ‘압축성형(토목)’을 통해 수입맥주병 유리를 잘게 부수거나 크기를 조절해, 시멘트와 섞어 벽돌과 타일을 만들기도 하고, ‘퓨징(공예)’를 통해 유리를 가마에 넣어 녹인 후 원하는 형태와 문양을 얻어 인테리어 소품으로 만들기도 한다. ‘블로잉(공예)’ 기법을 통해, 가열해 녹인 유리를 뜨거나 말아내거나 불어서 개성있는 꽃병 등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들의 손을 거쳐 소이캔들, 디퓨저병, 액세서리 등 각종 제품이 탄생한다.
“병을 수거한 후, 물로 깨끗이 세척하고, 라벨지도 제거합니다. 병에 그림이 그려져있으면 그 그림을 살려서 작업을 해요. 적당한 크기로 자르거나 구부려 초벌접시에 올려 가마를 때면 24시간 정도 지난 후 접시 형태가 나옵니다. 그러면 다시 세척하고 포장을 하죠.”
각 단계마다 수많은 세부 공정이 필요해 쉽지 않은 과정이다.
◇사회적 기업을 준비 중인 500℃
더 큰 어려움은 일정량의 수입 주류병을 지속적으로 수거하는 것이었다. 고물상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마땅한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수거한 병으로 만들 수 있는 제품군이 다양하지 않다는 것도 그들이 마주한 현실이었다. 시설이 여의치 않거나 기술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500℃는 수입 주류병을 수거하기 위해 고물상이 아닌 주점을 택했다. 이승호씨는 “처음에는 손님으로 간 후, 술을 마시면서 저희가 사업하고 있는 내용을 설명해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수입 주류병을 처리하기 위한 비용을 쓰지 말고 저희한테 맡겨달라고 하면 10명 중 9명은 도와준다”며 “매주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학교 주변이나 시내에 있는 업체에서 따로 모아준 병들을 수거한다”고 말했다. 500℃는 수거한 병을 이용해 기본 안주를 담는 접시나 찻잔을 만들어 수입 주류병 공급업체에 서비스로 드린다. 반응이 좋으면 구매한다고 하니 빈병도 얻고 판매도 하는 일석이조다.
수입 주류병의 재활용률을 높인 500℃의 친환경적 아이디어는 여러 차례 수상으로 이어졌다. 2015년 청주대학교 창업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작년에는 마을기업창업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올 2월에는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7기로 선정됐다.
◇ 500℃의 온도는?…뜨거운 포부를 뿜어내는 500℃
500℃가 키워나갈 사업모델은 수입주류병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수입주류병으로 만든 공예품은 현재 판매되고 있지 않다. 가격 책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호씨는 “이전에 잠깐 수입 주류병으로 만든 제품을 판매한 적이 있었다”며 “한 개에 1만원 정도의 가격을 매겼는데, 재활용 제품이 비싸다는 사람들의 인식에 가로막혔다”고 털어놓았다. 500℃는 곧 있을 법인 신청을 통과한 뒤, 본격적으로 수입주류병 판매 계획을 세울 예정이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500℃의 제품은 소이캔들 병, 디퓨져 병, 악세서리, 도장 등 일반 유리로 만든 제품이다. 청주시 한국공예관의 아트숍 3곳과 쇼핑몰 2곳에서 볼 수 있다. 충북시에는 유리로 만든 트로피를 납품한다. 20-30대 여성을 겨냥해 ‘교육키트’도 제작 중이다. 유리표면에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간단하게 유리 가공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제품이다.
500℃는 다양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씨는 “지금까지는 접시를 만들거나 빈병을 잘라서 컵을 만드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공부를 하면서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향후 제품군만큼이나 다채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수입 주류병으로 버스 정류장을 꾸미는 등 밝은 거리를 조성하는 것이다. 펀딩 플랫폼 오마이컴퍼니를 통해 진행한 ‘수입주류병 재활용 사업으로 취약계층 도움주기 펀딩’과 같은 활동도 지속할 생각이다.
이씨는 “‘팔리지 않는 포도가 최고급 와인이 된다’라는 말이 있다”며 “이 문구처럼 저희도 버려진 수입 주류병을 재가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누릴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다짐했다. 유리공예의 활성화를 위해 힘쓰고 유리공예 인재를 육성하는 것도 이들의 장기적인 목표다.
수입주류를 찾는 소비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빈병이 된 수입 주류병이 어디로 향하는지 고민하고 대안을 찾는 이는 적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패기로 수입주류병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500℃. 내년 2월 예비 사회적기업 신청을 앞둔 이들의 행보에 관심이 가는 이유다.
허세민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7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