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어떻게 ‘들을 권리’를 일상으로 만들었나

우승호 사단법인 히어사이클 대표

청각장애는 국내에서 매년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장애 유형이다. 2023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각장애인의 95%는 후천적 원인으로 장애를 겪고 있으며, 94.7%는 수어가 아닌 음성언어를 사용한다. 노화와 소음 노출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난청은 더 이상 일부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조건이 됐다.

그러나 이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보청기나 인공와우만으로는 넓은 공간의 울림과 배경 소음을 온전히 걸러내기 어렵다. 공공장소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조차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이유다. 난청인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보조기기’가 아니라, 제대로 들을 수 있는 환경이다.

이 간극을 메우는 기술이 ‘청취보조시스템(Assistive Listening System)’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공공 인프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에서는 개념조차 낯설다. 사단법인 히어사이클 조사에 따르면 국내에서 청취보조시스템이 설치된 곳은 전국 20여 곳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상당수는 작동하지 않거나 방치된 상태였다. 이 격차의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 14기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 ‘와우와우’는 영국을 찾았다.

◇ 청취보조시스템이 ‘일상’이 된 도시

지난해 9월 말 찾은 런던 킹스크로스역(King’s Cross Station). 하루에도 수십만 명이 오가는 분주한 역사 내 소음 속에서도, 매표소 창구마다 부착된 휠체어 표지 옆에 파란색 귀 모양의 청취보조시스템 안내 표지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기차 매표소와 지하철 개찰구, 은행 창구는 물론 공중전화 부스까지, 도시는 처음부터 ‘들을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돼 있었다.

기차 매표소 직원에게 사용 가능 여부를 묻자, 그의 의아한 표정이 돌아왔다. 인공와우를 텔레코일 모드(T-mode·보청기와 인공와우에 내장된 구리 코일이 전자신호를 직접 수신하는 기능)로 전환하는 순간, 주변 소음은 사라지고 직원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귀에 들어왔다. 직원의 그런 반응은 당연했다. 이곳에서 청취보조시스템은 요청해야 제공되는 특별한 서비스가 아니라, 항상 켜져 있는 기본 인프라였기 때문이다.

기차 매표소의 청취보조시스템 사이니지. 국제표준의 색과 모양을 준수하고 있었다. / 우승호 히어사이클 대표

한국에서는 장애를 밝히고 도움을 요청해야 겨우 닿을 수 있는 권리가, 이곳에서는 설명조차 필요 없는 일상이었다.

기술보다 ‘경험’을 먼저 묻는 기업들

런던 인근 뉴어크(Newark)에 위치한 앰페트로닉(Ampetronic) 본사에서 만난 샘 버킨쇼(Sam Burkinshaw) 사업개발이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공간에 맞는 만능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는 공간의 음향 구조와 이용자 특성, 그리고 사용자가 어떤 경험을 해야 하는지를 기준으로 기술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앰페트로닉은 1987년 설립 이래 전 세계 히어링루프 시스템의 설계와 제조를 선도해 온 청각 보조 기술 분야의 글로벌 기업이다. 교육 시설, 공연장, 교통 시설 등 다양한 공공 인프라에 최적화된 청취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앰페트로닉은 기존 히어링루프뿐 아니라 물리적 설치가 필요 없는 차세대 블루투스 기반 기술 ‘오라캐스트(Auracast)’까지 선보이며 선택지를 넓히고 있었다. 지난 5월에는 런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삼성전자와 협력하여 오라캐스트 기술 시연회를 개최하는 등 기술 확산에도 적극적이다.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접근이었다.

이틀 뒤에는 5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영국의 대표적인 청취보조시스템 솔루션 기업 컨택타(Contacta)의 이사이자 국제청각접근성협회(IAHA)의 회장인 앤드류 토마스(Andrew Thomas)를 만났다. 앤드류 회장은 우리를 런던 시내 곳곳으로 안내하며 ‘작동하지 않는 접근성’의 실태를 짚어냈다. 국제 표준 색상을 지키지 않은 표지판, 전원이 꺼진 채 방치된 장비들. 그는 “설치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가 장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접근성의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동선과 경험에 있다는 설명이었다.

런던 시내 곳곳의 청취보조시스템으로 우리를 안내했던 IAHA 협회장 앤드류 토마스(Andrew Thomas). / 우승호 히어사이클 대표

영국 국립극장(National Theatre)은 ‘작동하는 시스템’의 비밀을 보여주었다.  이곳은 공간 특성에 따라 히어링루프, 적외선(IR) 방식 등 서로 다른 청취보조시스템을 중복 설치했고, 최근에는 오라캐스트 기술도 시험 도입하고 있었다.

음향감독 벤 스테니츠(Ben Steinitz)는 “설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사용자가 쉽게 쓸 수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극장에서는 청취보조시스템 점검이 조명·음향 장비와 함께 공연 전 필수 리허설 항목에 포함돼 있었다. 고장을 사전에 확인하고 조치하는 체계, 장비를 부가 서비스가 아닌 극장의 핵심 자산으로 다루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영국국립극장의 음향감독 벤 스테니츠(Ben Steinitz)가 극장 내부의 청취보조시스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우승호 히어사이클 대표

정책을 움직이는 진짜 힘, 당사자의 목소리

영국 최대 청각장애 옹호단체인 왕립국립청각장애인연구소(이하 RNID)의 기술총괄 알래스터 무어(Alastair Moore)는 RNID 전략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했다. 

“캠페인도, 정책도, 기업 협력도 모두 신뢰에서 시작하며, 그 신뢰는 ‘데이터’에서 나옵니다.”

RNID는 약 1500명 규모의 당사자 리서치 패널을 운영하며 사용자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기업과의 협업에서 사용자 중심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자, 정부를 설득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정부는 ‘문제가 크다’는 주장만으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문제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의 말은 명확했다. 당사자의 경험이 숫자와 데이터로 축적될 때, 비로소 정책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3년간 청취보조시스템 설치가 늘고, 관련 조례가 제정되는 등 변화가 감지된다. 그러나 품질 기준과 운영 책임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급자 중심의 설치가 반복되고 있다. 국제 표준에 미달하거나 전원이 꺼진 채 방치된 시스템도 적지 않다. 기계는 늘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들을 권리’는 여전히 부족하다.

앰페트로닉(Ampetronic) 본사 앞에서 찍은 기념 사진. / 우승호 히어사이클 대표

영국 탐방을 통해 확인한 것은 기술의 우월성이 아니었다. ‘들을 권리를 사회가 어떻게 보장하느냐’ 하는 시스템의 차이였다. 제조사와 시설 운영자, 정책기관, 당사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사용자 경험’을 최우선에 두었기에 청취보조시스템은 도시의 기본 인프라로 기능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장비를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작동하게 만드는 책임이었다.

이번 탐방은 한국 사회에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청취보조시스템을 얼마나 더 설치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들을 권리’를 설계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지 말이다. 그 대답에, 300만 난청인의 평범한 일상이 달려 있다.

필자 소개

인공와우 사용자이자 청각장애인의 청각접근성 향상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2017년부터 청각장애 청년 커뮤니티를 운영했고, 2025년에는 청각장애인의 청취권 회복을 위한 단체 히어사이클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 본 기고문 시리즈는 아산나눔재단이 운영하는 사회혁신가 양성 프로그램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의 수강생들이 해외 선진기관 탐방에서 얻은 통찰과 우리나라 소셜섹터로의 시사점을 나누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본 기고문은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의 14기 수강생이 각 사회혁신 프로젝트 팀을 대표해 작성한 것으로, 아산나눔재단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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