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랏일 하는 집배원, 나랏돈은 못 받는다

우본, 공무원이 운영하는 ‘정부 기업’ 형태
세금 대신 사업 수익으로 모든 비용 충당
인력 확충 위한 잉여금 남길 수 없는 구조
격무에 과로사 이어져도 정부는 나몰라라

지난달 12일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30년차 집배원 김학미씨가 오토바이로 좁은 골목길을 누비며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다. ⓒ조선일보DB

집배원이 자꾸 죽는다. 지난달 19일 충남 당진우체국 소속 강길식(49) 집배원이 자택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올해에만 9번째. 사인은 뇌출혈로, 과로사 가능성이 크다. 전국우정노동조합에 따르면, 강씨처럼 장시간 중노동으로 사망한 집배원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91명에 달한다. 노조는 우정사업본부(이하 ‘우본’)에 정규직 집배원 증원을 꾸준히 요구해왔지만, 우본은 경영이 어렵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우본은 정부기관이면서 동시에 기업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신분상 ‘공무원’인 집배원들의 임금도 세금이 아니라 자체 사업으로 벌어서 감당한다. 국고 지원 없이 벌어서 쓴다는 얘기다. 이 같은 이중적 구조가 잇따른 집배원 사망의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우본, 공무원 조직인데 인건비는 자체 충당

우정사업은 우편, 우체국예금, 우체국보험 등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국민 공익사업이다. 정부가 관할하는 공익사업에는 이 밖에도 철도, 전기, 수도, 가스 사업 등이 있는데, 대부분 ‘공기업’ 형태로 운영된다. 그러나 우정사업을 하는 우본의 경우 공기업이 아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에서 우본이 직접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 기업’ 형태다. 즉 공무원들이 모여서 운영하는 기업인 셈이다.

우본은 보통의 정부 기관과 ‘회계’부터 다르다. 정부 기관은 국민 세금을 재원으로 하는 ‘일반회계예산’으로 운영되지만, 우본은 세금이 아닌 사업 수익을 재원으로 하는 ‘특별회계예산’으로 꾸려진다. 즉 집배원 임금을 포함해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사업 수익으로 충당해야 한다. 노조의 인력 충원 요구에 사측이 ‘경영 적자 카드’를 꺼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본의 경영 수지를 악화시킬 만한 요소가 많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게 수익이 날 경우 일정 부분을 국가가 가져가는 ‘일반회계 전출’ 기준이다. 우본의 특별회계는 우정사업 운영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우편사업특별회계 ▲우체국예금특별회계 ▲우체국보험특별회계 등 세 부문으로 엄격하게 구분된다. 지난해 우정경영연구센터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2018년 우편사업에서 일반회계로 전출된 금액은 1232억원, 예금사업에서는 1조1250억원이다.

김철홍 인천대 산업경영공학과 교수는 “수익이 나면 국고로 가져가도록 해놓고, 자체 예산으로 운영하라는 건 문제가 있다”면서 “집배원 인력 확충을 위한 이익잉여금을 남겨둘 수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공무원이 격무로 과로사하면 정부에 마땅히 지원의 책임이 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IMF 이후 4년간 집배원 5742명 감축… 집배원 사고 급증

우정사업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체신부에서 맡아 운영했다. 당시에도 우체국은 특별회계를 썼는데, 우편사업이 정부 독점 사업이면서 수익도 높았기 때문이다. 별도의 회계로 운영하면서 국고 지원을 받기보다 오히려 수익을 내면 국고로 귀속시키도록 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우편사업의 수익이 줄어들자 ‘공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정청으로 승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국회에서 나왔지만 모두 무산됐고, 우본은 어중간한 형태의 정부 기업으로 남았다.

전문가들은 현 구조에서 수익성과 공공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국내 우편은 400원이면 전국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편지를 보낼 수 있고, 산간벽지에도 도시와 같은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효율성과 경제 논리로는 불가능한 서비스다. 김철홍 교수는 “부족한 인력으로 공공서비스를 유지하려다 보니 그 결과가 집배원 목숨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집배원은 연간 2745시간 일한다. 국내 임금노동자 평균인 2052시간보다 693시간 더 많다. 하루 8시간 일한다고 치면 86일을 더 일하는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763시간과는 거의 1000시간 가까이 차이 난다.

전국우정노동조합에 따르면, 집배원의 장시간 중노동은 1997년 말 IMF 외환 위기 때 본격화됐다. 정부는 이 여파로 우체국 총원의 4분의 1을 감축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안을 발표했다. 1998년부터 2001년 사이 진행된 구조조정으로 집배 인력 5742명이 줄었다. 인력 감축에 따른 집배원의 피로 누적은 사고로 이어졌다. 집배원 중·경상자 수는 1998년 188명에서 1999년 233명으로, 2000년 433명, 2001년 508명으로 해마다 급증했다. 이후 상시 집배원, 특수직 위탁집배원, 재택 집배원 등 비정규직으로 인력을 늘려갔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우편사업 적자라 인력 충원 어렵다?… 예금·보험사업서 5600억원 흑자

우본은 우편사업이 적자인 현 상황에서는 집배원 인력을 충원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되풀이하고 있다. 우본의 대표 사업인 우편·예금·보험사업 가운데 우편사업은 유일한 적자 사업이다. 지난해 10월 감사원이 발표한 ‘우정사업 경영관리실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우편사업은 539억원 적자를 냈다. 그러나 예금사업과 보험사업은 각각 2697억원, 2966억원의 흑자를 기록해 총 5000억원 흑자를 기록했다.

우본의 복잡한 회계처리가 우편사업 적자를 키운다는 주장도 있다. 적자의 주된 원인은 우편 물량 감소지만, 우본 임직원들의 임금 등 총괄 경비를 우편사업 수익에서 지급하면서 경영 수지를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남훈 우정사업본부 재정기획담당관은 예금사업의 이익금을 우편사업의 인력 확충에 충분히 쓸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회계가 분리되어 있어, 예금의 이익금은 매년 제한된 범위내에서 지원되고 있다”고 답했다.

공무원 조직이라는 이유로 인력 채용도 자유롭지 못하다. 우본의 인력을 늘리려면 우선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공무원 정원을 관리하는 행정안전부에 증원 요청을 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조직 진단을 거쳐 소요 예산을 기획재정부에 제출한다. 소요 예산은 사업 수입과 지출이다. 이후 기획재정부가 타당성을 따져 승인을 내려야 집배원 증원이 가능하다. 이동호 전국우정노동조합 위원장은 “인력 충원의 시작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증원 요청을 하지 않는 게 문제”라며 “공기업에는 공공성 확보 명목으로 국고보조금을 지원하면서 정부기관인 우본의 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식인데, 구조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부가 나서서 길을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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