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1일(목)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하철 안내방송 안 들려요” 시각장애인들 요구에도 묵묵부답

한혜경(26)씨는 지하철역에 들어설 때마다 신경이 곤두선다. 개찰구를 지나 전동차가 들어서는 플랫폼까지는 익숙한 동선에 따라 움직인다. 문제는 객실에 들어선 뒤다. 각종 소음이 안내방송과 뒤섞이면 언제 내려야 할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씨는 지난달 수원역에서 천안역까지 가기 위해 1호선 급행열차에 오른 뒤 코레일에 민원 전화를 3번이나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안내방송이 잘 안 들려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소리 좀 키워주세요.” 이날 한씨가 수원역에서 천안역까지 약 50분을 이동할 동안 객실 안내방송 음량은 그대로였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전맹(全盲)인 한혜경씨는 지난달 26일 더나은미래와의 통화에서 “지하철 안내방송이 소음에 묻혀 정차하는 역과 내리는 방향 등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잦다”며 “시각장애인들도 지난 수년간 안내방송 음량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냈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전동차 내부. /조선일보DB

“지하철에 오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지하철은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대중교통이다. 버스보다 승하차가 쉽고, 대기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특히 계단이 2개 이상 있는 고상 버스는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회피하는 교통수단이다. 교통약자의 특별 교통수단인 장애인콜택시를 타려면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2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지하철 이용의 가장 큰 어려움은 소음이다. 서울교통공사의 신형 전동차에는 안내방송 스피커가 객차당 6개씩 설치돼 있다. 방송 음량은 평균 70~80㏈로 여름철 매미 울음소리, 진공청소기 소음과 비슷한 수준이다. 문제는 전동차가 주행할 때 발생하는 풍절음과 하체 소음이 60~70㏈에 달해 안내방송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착지를 안내하는 방송의 길이는 총 60초다. 이 가운데 도착 역을 알리는 시간은 3~4초에 불과하다. 나머지 시간에는 범죄 예방 안내, 국정원 신고 안내, 휴대전화 통화 자제 등이 이어진다.

시각장애인들은 안내방송 소리를 키워달라며 민원을 넣는다. 제때 반영될 때도 있지만, 방송 소리가 크면 싫어하는 승객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기도 한다.

결국 시각장애인들은 가장 불편한 방법을 택한다. 단거리 이동의 경우 지나는 역을 순서대로 외우고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면서 간다. 20분 이상 걸리는 장거리 이동 시에는 스마트폰의 지하철 안내 애플리케이션으로 확인한 도착 시각보다 3~5분 빠르게 타이머를 맞춰 놓는다. 타이머가 울리면 주변 승객들에게 정차 역을 물어봐 가며 하차한다. 한씨는 “안내방송은 시각장애인들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며 “지하철에 타면 안내방송 소리에 집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교통약자석에 스피커 추가 배치 필요

현재 수도권 주요 권역 지하철은 노선마다 서울교통공사, 코레일, 서울시메트로9호선 등 관할 기관이 다르다. 서울교통공사는 1~9호선 일부, 코레일은 1·3·4호선 일부와 경의중앙선, 경춘선, 수인분당선을 담당한다. 서울시메트로9호선은 25개 역사(개화~신논현)를 지나는 구간을 관리한다.

이들 기관에 통용되는 구체적인 안내방송 기준은 없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 시행규칙’에 관련 규정이 있긴 하지만 ‘자동 안내방송은 도착 정류장의 이름·목적지 및 문의 개폐 방향 등을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음량과 음색을 내어야 한다’고만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열차 소음 정도와 민원 접수에 따라 기관사 재량으로 음량을 조절한다. 호선별로, 시간대별로 편차가 큰 이유다. 서울시메트로9호선 관계자는 “여름철 냉방기 소음이 발생하거나 승객이 많은 출퇴근 시간에는 음량을 높인다”며 “개인이 선호하는 온도에 따라 냉방칸, 약냉방칸에 탑승할 수 있는 것처럼 방송 음량도 개인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률적인 기준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스피커 추가 설치를 요구한다. 서울교통공사의 신형 전동차에는 안내방송 스피커가 객차의 중앙에 일렬로 설치돼 있어 객실 양끝에 있는 교통약자석에서는 소리가 비교적 작게 들린다는 이유에서다. 홍서준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연구원은 “청각이 굉장히 발달한 사람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이 안내방송 청취에 어려움을 호소한다”며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보다 청각을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청각기관의 노화도 빨리 진행된다”고 했다. 이어 “주로 장애인, 노인이 앉는 교통약자석 위에 스피커를 하나 더 설치하면 교통약자들이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부담이 훨씬 덜할 것”이라고 했다.

객실 소음 대비 안내방송 음량을 조절하는 기준을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안내방송 음량이 객차 내 소음을 조금 웃도는 수준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홍 연구원은 인공지능(AI) 기술 도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동차 내 소음을 자동으로 측정할 수 있는 스마트 기술을 도입해 측정값에 따라 안내방송 음량을 실시간으로 바꾸는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수연 더나은미래 기자 ye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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