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리더를 찾아서 ⑪… 한비야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
UN 중앙긴급대응기금서 구호 자금 배분 점검하고
평화와 인권 배우는 세계시민교육 캠프 운영
후원하겠다는 사람 많지만 그만큼 취소도 많이 해
돕는 게 왜 당연한 건지 알아야 제대로 나누는 것
“한국도 좋은 원조방식 논의해야 할 시기…
다른 나라와 정보교류 활발히 이뤄졌으면”
“나일강은 절대 낭만적인 곳이 아닙니다. 보트를 타고 가다 보면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악어한테 잡아먹힌 짐승이 썩는 냄새예요. 하마 떼도 무서워요. 하마는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사람을 두 동강 내요. 가장 무서운 건 반군이죠. 밤이면 나일강 주변에서 우리가 타는 스피드 보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요. 지금 우기(雨期)인데, 번개라도 치면 금속 보트에 탄 우리는 인간 바비큐가 될 각오를 해야 합니다.”
‘바람의 딸’ 한비야(54)씨는 발랄한 목소리로 남수단 현장 이야기를 전했다. 그녀는 지금 월드비전 인터내셔널 소속 남수단 긴급구호 총책임자다. ‘울지마 톤즈’의 고(故) 이태석 신부로 인해 국내에도 잘 알려진 남수단은 40년 동안 내전을 치른 후 작년에 독립한 ‘한 살짜리 나라’다. 1000명 중 175명의 아이가 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죽고, 북수단과의 국경지대에 묻힌 석유 때문에 여전히 무력충돌 위험도 있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현장은 ‘여전히 위험하지만 가슴 뛰는 곳’이다. 특히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CERF·Central Emergency Response Fund) 자문위원이자 이화여대 초빙교수를 겸직하고 있는 한씨에게, 이번 직책은 현장-정책-이론의 세 가지를 한꺼번에 경험하는 특별함이 있다.
“유엔 중앙긴급대응기금은 600억원의 자금을 긴급한 곳에 배분하는 기관이에요. 자문위원은 배분이 정확하게, 신속하게 되고 있는지를 점검하죠. CNN에 보도되는 현장에 돈이 몰리는 CNN 효과가 있거든요. ‘언디펀디드 윈도(Underfunded Window)’를 통해, 꼭 필요한데도 모금이 잘 되지 않는 곳에 3분의 1을 배분하도록 하더군요. 고위급 외교관이 맡아왔던 자리인데, NGO 출신 여성이 자문위원이 된 경우는 흔치 않아요. 1년에 두 차례 회의를 하는데, 회의에 앞서 고시 공부하듯이 준비를 해요. 예전에는 현장 NGO의 차원을 벗어나기 어려웠는데, 이제 이 현장이 학계의 연구보고서나 정책 입안을 위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훨씬 큰 그림이 보입니다.”
◇”세계의 1등이 글로벌 리더? 약자를 배려해야 진정한 세계 지도자”
지난 6일, 한씨는 2박 3일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다. ‘수능을 앞둔 고3’처럼 바쁜 남수단 현장을 잠깐 뒤로하고, 20시간 넘는 비행 끝에 방한한 이유는 바로 ‘세계시민학교’ 때문이다. 이날 오후 이뤄진 교육과학기술부와 월드비전의 ‘교육기부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식에 참석한 한씨는 “오늘은 잔칫날”이라며 울컥했다.
“남수단 동료들에게 ‘내 결혼식보다 중요하다’고 말했어요. 세계시민학교 교장으로서, 제 꿈이 이뤄졌어요.각 시대에는 시대정신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자주독립, 50~60년대에는 산업화, 70~80년대 민주화였다면, 21세기에는 시계시민교육이 바로 시대정신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국민 5000만명이 제 학생이 된 겁니다(웃음).”
한씨가 세계시민교육을 이토록 강조하는 건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한씨는 초등학생으로부터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저는 꼭 글로벌 리더가 되고 싶어요. 반장 선거에 나가려는데요. 반장 하면 나중에 UN 사무총장 되는 데 유리한 거 맞죠?”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아이는 왜 UN 사무총장이 되고 싶은 걸까? 굶주리는 아이가 없는 세상,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싶은 걸까?’ 무섭도록 걱정스러운 세태였다.
“글로벌 리더를 강조하는 각종 교육 내용을 보면, 세계를 이해해 나를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자 등 어떻게 각종 경쟁에서 이겨 우위를 차지할지, 세계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물론 이런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글로벌 리더가 되려면 세계 문제를 같이 해결하려는 노력과 국제사회의 약자를 배려하는 소프트파워도 갖춰야 합니다. 세계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세계 시민이 되어야 해요.”
한씨의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의 모금 현실을 보면서, 더욱 확실해졌다고 한다. ‘돕는 것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TV방송에 아프리카의 어려운 상황이 나오면 그날엔 ‘후원하겠다’는 전화가 막 와요. 너무 많아서 우선 전화번호만 받아놓았다가 다음 날 전화하면 마음이 변해 있어요. 그냥 자극에 반응한 것뿐이죠. ‘왜 도와줘야 하는지’ ‘돕는 게 왜 기쁘고 당연한지’ 알면, 하루 만에 마음 바뀔 일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씨는 자신이 출연한 CF 광고료 1억원을 종잣돈으로 기부, 2007년 여름부터 세계시민학교 청소년캠프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인권과 빈곤, 기후변화, 국제개발협력, 평화 등 세계 시민으로 자랄 수 있는 기본 소양을 배운다. 지금까지 45만여명의 학생들이 세계시민교육에 참여했고, 현직교사 99명이 교원연수를 받기도 했다. 교과부와의 협약으로 이 프로그램이 전국의 초·중·고교에서도 한층 활발하게 이뤄지게 됐다.
◇”원한다면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저한테 좋은 기회가 올 때면 때론 불안해요. ‘내가 이걸 잘할 수 있을까’ 하고. 저한테는 선배가 없잖아요. 사회적으로는 ‘고아’로 사는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제가 늘 여전사처럼, 무소처럼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매일 떨리게 무릎 꿇고 기도해요.”
국제홍보회사 직원에서 오지여행가로, NGO의 긴급구호팀장으로, 유엔 자문위원이자 세계시민학교 초대 교장,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변화의 순간마다 한씨도 “떨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변화를 통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왔다. 정작 자신은 “시대와 궁합이 잘 맞았다”고 겸손해했다. 지난 10년 사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국제개발협력 NGO들의 저력과 미래에 대해서도 밝게 평가했다.
“앞으로 10년 후엔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국제구호개발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거예요. 그러려면 잘 주는 나라, 좋은 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해요. 한국NGO가 무척 잘하는 지역으로 이름난 곳도 있어요. 앞으로는 지역만을 벗어나 원조받는 나라의 정책방향, 유엔과 인터내셔널 차원의 국제정책과도 맞물리는 원조정책이 필요해요. 배를 타고가는데, 우리만 역류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국제 NGO들이 참여하는 NGO포럼 등에도 적극 참여해, 자기 목소리를 내고 다른 커뮤니티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 정보 교류도 활발히 했으면 좋겠어요.”
100만권을 돌파한 한씨의 책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수많은 ‘한비야 키즈’를 만들어냈다. 국제무대나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하려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한씨는 꿈꾸는 청춘들에게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라고 충고했다.
“중학교 때부터 이 분야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청년들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큰언니·큰누나로서 책임감도 느껴요. 이 일을 꿈꾸는 친구들에게 ‘그 마음 변치 말라’고 하고 싶어요. 그게 벽이 아니라 문이라면, 계속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는 열립니다. 두드릴 때의 뜨겁게 몰두하는 순간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P.S 기자가 한비야씨를 만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첫 번째는 ‘오지여행가’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돼 유명세를 타기 전이었고, 두 번째는 ‘국제 구호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때였다. 이번에는 ‘안티 한비야’에 의한 거센 검증과 논란을 겪은 후였다. 직함도 바뀌고 역할도 늘어났지만, 빈곤국 아이들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