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대우하는 나라가
진짜 민주주의, 복 받은 나라
서울에서 차로 1시간을 달렸을 뿐인데, 시야가 탁 트였다. 고층빌딩이 없고, 자동차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도심에선 짜증을 불러오던 뜨거운 여름 볕이 이상하리만치 싫지 않은 곳,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우리마을’이다. 이곳은 지적장애인 50여명의 직업재활시설이다. 김성수(82)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는 성공회대 총장을 그만두고 2009년부터 부인 후리다(80) 여사와 함께 여기서 산다. 직함은 ‘우리마을 촌장’.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모두 기증해 ‘우리마을’을 지은 김 주교는, 말 그대로 ‘버리고 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물려받은 땅 2000여평을 기증해, 2000년 ‘우리마을’을 짓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지적장애인 학교인 ‘성베드로학교’ 졸업식에 갔는데, 졸업생을 불러도 애들이 안 나와요. 졸업을 해도 막상 일할 곳이 없어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됐죠. 건립자금을 마련하려고 처음에는 성공회 성당 마당에서 커피 장사를 했는데 주변 상인들이 반대가 너무 심했어요. 아버지가 준 땅을 내놓기로 했어요. 당시 손학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근로시설을 지어서 얘들 먹고살게 만들어줍시다’ 했는데, 배포 크게 도움을 줬어요. 처음에는 3년만 가르치면 자립해서 이곳을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 나가는 거예요.”(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지적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도, 이들을 받아줄 기업은 거의 없었다. ‘우리마을’의 장애인들은 콩나물 재배와 전기부품 조립 등을 통해 적게는 10만원부터 많게는 80만원대까지 월급을 받는다.)
―콩나물 공장을 통해 수익사업을 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장애인 작업현장은 정말 열악해요. 우리는 꽉 짜인 틀에 맞추기보다 자유롭고 정서적인 면을 고려한 1차산업을 하기로 했죠. 농작물이 자라는 과정을 보는 게 지적장애인들에게 정서적으로 좋으니까요. 이곳이 지하수가 좋아서 처음에는 상추를 수경재배했어요. 근데 수경재배 상추는 너무 연해서 상품이 안 됐어요. 고민하다가 콩나물 공장으로 바꿨어요. 2001년부터 생산을 조그맣게 해오다가, 2년 전쯤 풀무원에 콩나물을 납품하게 되면서 새 공장도 지었어요. 두부공장도 하려고 했는데, 알아보니 우리 능력으로는 도저히 안 돼요. 돈도 많이 들고 경쟁자가 많더라고요. 당시 체념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무리하게 했다면, 어찌 됐을지….”(이곳에서 생산된 친환경 콩나물은 풀무원과 생협에 각각 납품된다. 하지만 연간 20억원이 드는 이곳의 운영비를 대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에는 지적장애인들을 고용한 사회적 기업도 제법 생겨났지만, 2000년대 초반에 이런 시설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을 듯합니다.
“장애인고용공단에서 우리 시설을 검사하러 오는 경우가 있어요. 형식적인 틀에 맞춰 일반인처럼 꼭 생산적인 걸 해야 근로자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고 산책을 하거나 멍하니 있으면 여기에 못 있을 아이니까 내보내라고 해요. ‘우리마을’은 사람 중심이라서 대안 없이 내보낼 수는 없죠. 공무원들이 일주일이든 열흘이든 합숙해서 현장을 봤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일하는 책상에 5년이든, 10년이든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공무원이 1~2년이면 다 바뀌어요. 부처 이기주의도 좀 없어졌으면 해요. 저희가 장애인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업체험학습을 하는 ‘브릿지스쿨’을 하고 있는데, 여기가 복지부 소관이라서 교육부가 같이 일을 안 한다거나, 지역이 인천이기 때문에 서울은 안 한다거나 하는 게 너무 많아요. 여기 직원 28명 중 밥해주는 분 빼고 모두 사회복지사들이에요. 특수교육을 전공한 전문가 선생님도 한 명 없어요. 보조간호사나 언어치료사, 물리치료사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부처마다 소관이 있겠지만, 종횡으로 서로 도움을 줘야 장애인들이 가슴을 펴고 살지요.”
장애인 자립 도우려 물려받은 땅 2천평에
장애인 직업학교 지어
많은 대선 주자들이 ‘복지 우선’ 앞세우는데
현장 모르는 정책 답답
―올 연말 대선을 앞두고, 많은 대선주자가 ‘복지’를 우선으로 앞세우고 있습니다. 가장 밑바닥 복지현장에 계시면서, 안타까운 사례를 많이 접하시나 봅니다.
“크게 고치지 않고, 작은 것부터 고쳐나갔으면 해요. 얼마 전 영국에 다녀온 지인이 그러는데, 영국에선 집에서 병원까지 가는 동안 휠체어가 무려 6개래요. 집에서 타는 휠체어, 자동차 안에서 타는 휠체어, 병원용 휠체어 등이 다르대요. 그건 사실 낭비에 가깝죠. 하지만 장애인을 대우하는 나라가 민주주의이고, 복 받은 나라예요. ‘저 ××들’ 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에요. 법 하나 제대로 만드는 데 5년 걸리니, 새로운 대통령이 뽑혀도 내 다음 대통령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으면 싶어요.”(김 주교는 “그래도 예전에는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자장면집에 가면 주인들이 ‘다음에는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바람에 주변 식당에도 한 번 못 갔는데, 5~6년 전부터 가기 시작했다”며 “세상은 나 혼자 살 수 없듯이, 불편해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배려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마을’ 곳곳을 둘러보는 동안, 김 주교를 만난 지적장애인들은 한결같이 환하게 인사했다. “우리는 최고다!”라며 마치 친구처럼 장애인들과 웃고 장난하는 김 주교. 김 주교는 “24시간 동안 이 친구들을 돌보는 선생님들이 너무 고생한다”면서 “복지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불신하는 오랜 관습 때문인지, 때때로 장애인 부모들이 혜택받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우리 아이를 학대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때면 울화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국민들의 행복지수도 매우 낮습니다. 세계 10위권이라는 부자나라가 되었는데, 국민들은 오히려 가난해졌다고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욕심’이죠. 신부 생활도 욕심을 가지면 되는 일이 없어요. 예전에 한센병 환자들이 모인 성당에 미사를 보러 갔을 때였어요. 여름에 파리떼가 많은 곳이었는데, 뭉개진 손으로 달걀을 까서 소금에 찍어 주는 거예요. 배도 깎아주면서 ‘신부님 잡수세요’ 하더라고요. 전염병도 아닌데, 꺼리는 생각이 드는 저 자신이 부끄럽더라고요. ‘아! 하나님이 내 병을 낫게 하더니 이렇게 어려운 사람과 살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학교 때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폐결핵으로 10년을 고생하지 않았으면, 성공회교단에서 지적장애인을 맡아서 교육해달라는 얘기가 없었으면 나도 이상한 사람이 됐을 거예요. 계기에 의해서 인생을 살아나가죠. 자기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고, 나를 소중히 여기세요. 자기를 소중히 알면,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요. 나를 생각하면, 상대를 생각하고, 상대가 뭐를 해달라고 하기 전에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처럼 좋은 게 어딨나요.” 김 주교는 앞으로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만드는 게 마지막 꿈이다. “요즘은 돌아보면 나만큼 평안하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싶어요. 이 친구들 다들 ‘김주교 최고’라고 해요. 50살 먹은 이도 아이 같아요. ‘이제 내가 촌장 좀 해봐야겠으니 물러나라’고 하는 이도 없잖아요.(웃음)”
그는 ‘우리마을’ 인근에 대기업이 짓는 야구장이 곧 들어서면, 직접 통을 들고나가 ‘한푼 줍쇼’ 하겠다고 했다. 행복의 비밀은, 바로 이 욕심 없는 웃음이었다.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