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고 싶어서…변호사 인식부터 바꿨죠”
35년간 공익 변호사 활동… 전문적인 지식·서비스
공익 위해 재능기부하는 프로보노 활성화 위해 1996년 ‘PBI’ 설립
로펌 총 근무시간 3~5%… 프로보노 활동 쓰기 운동
140여개 대형 로펌 및 기업 법무팀 100곳 참여
PBI 회원 된 로펌에는 자가 검진 프로그램 제공
콘퍼런스로 고민도 나눠
에스더 라던트(Esther F.Ladent) 회장은 폴란드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 독일군에 의해 아버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어머니는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강제로 보내졌다. 4년 동안 모진 고문과 죽음의 문턱에서 절반이 넘는 가족을 잃었다. 갈 곳도, 머물 곳도 없이 떠돌던 이들은 오스트리아 난민 캠프로 향했다. 음식과 약품을 찾는 피란민들 틈에서 에스더 회장은 태어났다. ‘사회적 약자들이 외면당하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던’ 그녀는 35년간 공익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미국변호사협회(ABA) 의장에 올랐다. 그러나 성공이 보장되는 자리를 마다하고, 1996년 동료 한 명과 함께 워싱턴에 ‘프로보노 인스티튜트(Pro Bono Institute, 이하 PBI)’를 설립했다. PBI는 대형 로펌 변호사들의 프로보노(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서비스를 공익을 위해 재능 기부하는 것)를 활성화하고, 모니터링하는 NGO다. 에스더 회장은 로펌 변호사들이 총 근무시간의 3~5%를 프로보노 활동에 쓰기로 서약하는 운동(로펌 프로보노 챌린지 프로젝트)을 벌여, 미국 내 140여개 대형 로펌과 기업 법무팀 100곳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변호사 개인의 자율에 맡겨졌던 프로보노 활동을 로펌의 사회적 책임이자 의무로 인식 전환을 일으킨 것. 이를 통해 미국 로펌의 프로보노 활동은 지난 15년간 300% 이상 증가, 2010년 역대 최고인 445만 시간을 기록했다. 지난 12월 14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2012 로펌 프로보노 현황과 전망 심포지엄’ 발제자로 나선 에스더 회장을 만나 PBI의 발자취와 노하우를 전해들었다.
―PBI의 서명 운동(로펌 프로보노 챌린지 프로젝트)이 성공을 거둔 비결은 무엇인가.
“매년 대법원 판사와 대형 로펌 대표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다. 미국 취약 계층의 80%가 법률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수치를 제시했다. 이들을 외면해온 대형 로펌들이 프로보노 활동에 앞장서야 한다고 설명했다. 취지에 공감한 연방대법원 판사들은 모든 로펌에 편지를 보내 PBI의 서명 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고, 검찰총장은 프로보노 활동을 서약한 로펌에 감사 편지를 보냈다. 매년 세미나를 개최한 결과, PBI의 연례회의는 세계 최고의 로펌과 기업 법무팀 대표들만 참석할 수 있는 정기 모임으로 발전했다. 로펌의 랭킹을 매기는 ‘미국 변호사 매거진(American Lawyer)’과도 협력해, 랭킹 심사 기준에 프로보노 활동 여부와 시간을 포함했다. 프로보노를 하지 않는 로펌은 순위가 내려가면서, 수익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미국 법조계에서 프로보노가 최대 화두로 떠오르면서, 변호사 1인당 연간 60~100시간을 프로보노 활동에 쏟을 정도로 나눔 문화가 확산됐다.”
―’로펌 프로보노 챌린지’의 서명 기준을 변호사의 총 근무시간의 3~5%로 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프로보노 정의부터 최저 활동 시간까지 모두 로펌 대표들과 함께 논의해 결정했다. 총 근무시간 3%를 환산하면, 변호사에게 요구되는 연간 프로보노 활동이 50시간으로 계산된다. 일주일에 1시간, 한 달에 4시간 정도면 로펌 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변호사들이 충분히 공익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조사됐다. 미국 변호사의 20% 이상을 배출하는 뉴욕주에서는 최근 50시간 이상 프로보노 활동을 한 사람에게만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규칙을 마련하기도 했다.”
―’로펌 프로보노 챌린지’에 서명하고, PBI 회원이 된 로펌들엔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모든 회원에 무료로 프로보노 프로그램 기획, 진행에 관련된 컨설팅을 제공한다. 회원들은 PBI에 프로보노 연간 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대신, 이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를 되받아볼 수 있다. 각자 공익 활동을 평가할 수 있는 ‘자가 검진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프로보노 관련 전문 교육과 PBI가 출판한 자료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매년 콘퍼런스를 열어 로펌들끼리 서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여성·환경·아동·인권 등 미국의 다양한 NPO와 네트워킹할 수 있는 미팅도 주선한다. 연례 만찬 때는 로펌 및 기업 법무팀 대표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프로보노 활동에 헌신한 법조인, 로펌, 공익단체에 공로상을 수여하고 있다.”
―가장 의미 있는 공로상 수상자는 누구였나.
“2006년, 미성년 이민자들 1만명이 미국 정부의 잘못된 법 제도 때문에, 강제 추방당할 위험에 빠졌다. 이들을 위해 마이크로소프트 법무팀과 6개 로펌, 그리고 이민자 인권 옹호 NPO(비영리단체)가 협력하기 시작했다. 변호사들은 미성년 이민자 1만명의 대리인이 되어 무료 변론을 시작했고, NPO는 이민법을 전공하지 않은 변호사들에게 이민자의 권리와 실상을 교육했다. 수차례 청문회 끝에 청년들은 미국에 남을 수 있게 됐고, 잘못된 이민법 조항은 수정됐다. 2006년 ‘파트너상’은 이들에게 돌아갔다.”
―PBI의 조직 구성은 어떠한가. PBI는 NGO(비정부기구)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을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자립하는지 궁금하다.
“변호사 6명, 미디어 홍보 전문가 2명, 펀드레이저(모금 전문가) 1명, 행정 담당자 4명 등 총 13명으로 구성돼 있다. 회비는 운영비의 10%를 차지하는데, 로펌 규모별로 차등 지급받는다. 미국 변호사협회의 지원금이 15%, 콘퍼런스 참가비가 10%, 개인 기부금이 10%를 차지한다. 심층 컨설팅 자문료로 10%를 별도 지급받기도 한다. 나머지 45%는 개별 로펌과 기업의 기부로 운영된다. 각 로펌과 기업들은 질 높은 컨설팅과 프로보노 활성화를 위해 자발적으로 PBI에 기부를 하고 있다.”
―미국에선 변호사 120만명 중에서 공익 전문 변호사가 1만명에 달한다고 들었다. 반면, 한국은 변호사 1만4000명 중에서 공익 전문 변호사가 20명에 불과하다. 한국 로펌과 변호사들의 프로보노 활성화를 위한 조언을 해달라.
“대부분의 로펌이 프로보노 활동이 기존 업무를 방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프로보노는 다양한 사례를 변론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로펌은 장기적으로 실력 있는 변호사를 키울 수 있다. 2005년, PBI가 레이텀앤왓킨스(Latham&Watkins LLP)와 함께 전 세계 71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프로보노 설문 및 연구에서도 프로보노 활동이 로펌과 변호사들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똑똑한 기업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좇기보다 사람에게 투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