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도층, 나눔봉사 앞장서야… 800억 모금 비결은 감동 서비스”
후원자 모으는 힘은 신뢰… 감동·마케팅 결합으로 모금 늘고 자생력 생겨
‘나영이의 부탁’ 캠페인, 성범죄 공소시효 없애
직접 행동으로 옮길 때 사회 변화할 수 있어
서울시 중구 무교동에 위치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하 ‘어린이재단’) 사무실을 찾았을 때, 이제훈 회장은 소파 옆에 ‘무조건 살아 단 한번의 삶이니까’라는 책을 엎어놓고 있었다. 지난해 한 케이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준우승한 ‘한국의 폴포츠’ 최성봉(23)씨의 자서전이었다. 최씨는 5세 때 보육시설을 나온 후 거리생활을 하다 우연히 성악을 접하고 대전예술고 성악과에 진학, 2009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린이재단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생활하던 아이였다. 이를 계기로 최근엔 어린이재단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이 회장은 “우리가 도와준 친구들이 이렇게 성공한 모습을 볼 때마다 뿌듯하고 참 고맙다”고 했다.
―어린이재단은 1948년 시작돼, 후원금 규모가 800억원, 직원이 1100명(계약직 포함), 자원봉사자 3만명에 달하는 국내 대표격인 복지재단입니다. 하지만 최근 ‘더나은미래’에서 일반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국내 비영리단체 인지도를 조사해보니, 1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어린이재단에서 한국복지재단으로, 2008년에 어린이재단으로, 2010년부터 ‘초록우산’을 어린이재단 앞에 붙였어요. 이름을 몇 번 바꾸다 보니 그런 것 같고요. 또 어린이재단이 지금까지는 정부가 직접 하지 못하는 복지관련 위탁사업을 많이 하다 보니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별로 없었어요. 해외사업을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해, 유명배우들을 홍보대사로 두고 있는 다른 비영리단체에 비해 홍보가 덜 됐죠. 저희는 전국에 70개 사업기관이 있고, 후원 아동도 국내 3만~4만명, 해외 2만명 정도로 상당히 많아요. 앞으로 아동학대, 학교폭력 예방, 어린이들의 성장환경을 개선하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하려고 하는데, 인지도를 높이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나은미래’에서 향후 10년 동안 우리 사회가 업그레이드되기 위한 12가지 핵심과제를 뽑아 심층보도를 해오고 있는데, 아동 분야에서는 ‘아동 애드보커시(Advocacy·권리옹호) 그룹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사회 약자층 중에서 아동만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보니, 예산이나 정책 우선과제에서도 밀리더라고요.
“아동문제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걱정만큼 사회가 뒷받침을 못하는 것 같아요. 노인문제만 해도 투표권이 있으니까 정책적으로 배려하는데, 어린이문제는 아동단체협의회가 있긴 하지만 지원도 없고 법정단체도 아니고, 복지부와 여성부가 서로 쪼개져 있고…. 작년에 어린이재단이 주도적으로 ‘나영이의 부탁’이라는 캠페인을 벌여서, 아동대상 성범죄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이 국회를 통과했어요. 제가 회장이 된 후에 ‘어린이재단 아동복지연구소’를 만들었는데, 명실공히 우리나라 어린이 문제의 대변기구이자 정책건의기구로서 포럼도 하고, 외부전문가를 자문위원으로 모시는 등 연구소의 영역도 확대할 계획입니다.”
―아동 복지서비스를 담당하는 국내의 많은 NPO들의 활동이 비슷한데요, 어린이재단만의 차별화된 영역은 무엇인가요.
“아동폭력을 예방하는 미국의 ICAP(international child assault prevention) 특허를 어린이재단만 갖고 있어요. 일선학교에서 아동폭력 예방교육을 많이 요청하는데, 교육요원 양성이 수요를 못 따라갈 정도입니다. 둘째는 ‘인재양성 프로그램’입니다. 한국의 폴포츠라는 최성봉군이 도움을 신청했더니 다른 곳에서 퇴짜를 맞았는데, 어린이재단에서 도움을 줬다고 책에다 썼어요. 한 달에 35만~40만원씩 지원했는데, 3년간 5000여만원을 투자해 앞으로 큰 주목을 받을 음악인을 키워냈잖아요. 또 하나는 고아원이나 보육시설 등 극빈 가정 출신으로 구성된 드림오케스트라를 하고 있는데, 규모가 184명이나 돼요. 전남의 드림오케스트라에는 장가행(바이올린)·장신행(첼로) 자매가 있는데, 장가행 아동은 전남예고에 수석 입학했고 장신행 아동은 호남예술제에서 첼로부문 동상을 받았어요. 장한나가 특별 코칭해줄 정도로 재능이 자라고 있어요.”
―이런 다양한 활동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후원자를 확보해 후원기금을 마련하는 것인데요. 최근 기부자를 확보하려는 모금분야도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800억원 모금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어린이재단에서 모금에 대해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자생력을 갖춰야 하니까 몇 년 전부터 모금에 대해 바짝 관심을 갖게 되었죠. 후원자가 생기려면 어린이재단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거든요. 저는 일선현장 직원들에게 ‘감동을 창출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금파트에는 마케팅 능력을 늘릴 것을 주문해요. 감동 서비스와 마케팅 능력이 결합되어야 모금이 늘어납니다. 저희는 전국에 후원회조직이 있어요. 배우 최불암씨가 1981년부터 32년째 후원회 회장입니다. 이홍렬 대사가 25년째 하고 있어요. 전남의 한 후원자는 작년 한 해에 1200명의 후원자를 확장시켰어요. 이들이 어린이재단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하겠어요? 이분들 얘기를 들으면 제가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이제훈 회장은 현재 19만명인 정기후원자를 2년 내에 30만명까지 늘릴 계획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기업에서도 NGO와 파트너를 맺어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확대하거나 직원들의 자원봉사활동을 독려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재단이 경기도 광주에 중증장애인시설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은 1급 장애인시설이에요. 먹여주고 씻겨줘야 해요.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은 직접 자신의 아이들을 데려오거나, 친구들도 데리고 와서 정기적으로 봉사해요. 교회에 기반을 둔 NGO들에 비해, 어린이재단은 상대적으로 기업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일간지의 사장까지 지낸 후 어린이재단 회장으로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고 계신데, 어떠신지 소감이 궁금합니다.
“제가 9년 동안 어린이재단 이사를 하다, 2010년부터 회장이 되었어요. 신문사 사장 퇴임식 자리에서 ‘남은 인생은 사회를 위해서 봉사활동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걸 지키고 있으니 보람을 느끼죠. 특히 자장면 배달원 일을 하면서 생의 마지막까지 어린이재단에 후원해줬던 고(故) 김우수 후원자와 같은 스토리를 접하거나, 지방에서 순수하고 해맑게 일을 하는 복지관 직원들을 보면 참 고마움을 느껴요. 반면 ‘후원자로 가입해달라, 후원프로그램을 함께 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남의 일처럼 느끼는 분들을 만나면 좀 섭섭해요. 가난하고 살기 급급할 때는 변명이 되지만 지금은 사회갈등이 심각한 상태인데 자기만을 위해 살다 보면 유지가 안 되거든요. 케네디 대통령이 ‘가난한 다수를 돕지 못한다면 부유한 소수마저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잖아요. 사회 약자층에 대한 배려, 따뜻한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관심을 얘기하면 듣기만 하고 한가한 사람 취급할 때 거리감을 느끼죠.”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의 성숙한 나눔문화를 위한 조언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지난 토요일에 음성 꽃동네에 갔다 왔어요. 자원봉사협의회와 사회통합위원회가 같이 하는 캠페인인데, 사회지도층이 봉사를 솔선수범하기 위해 매달 넷째 토요일에 직접 봉사활동을 나가요. 서울역, 용산역 등 노숙자 1000명을 데리고 음성꽃동네에 갔어요. 20~30년간 인생을 낙오자처럼 살다가 어느 순간 결심해서 재기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들려주고, 함께 간 10여분의 의사선생님이 노숙자들의 질병을 진료해주고, 변호사가 파산한 분들 법무상담을 해줬어요. 그전에는 다문화가정 아이들 집이 하도 엉망이어서 집을 고쳐줬죠. 다음 달에는 철원에 가서 참전용사 정신을 기리고 어려운 가정을 돌보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어요. 사회가 진짜 변하려면 행동이 있어야 해요. 계층 갈등,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도 나오지만, 문제점을 고쳐나갈지언정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체제만은 양보할 수 없어요. 결국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선 나눔, 봉사가 필요합니다. 사회 지도층이 함께 우리 사회의 고민을 풀어나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화를 만들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