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인데, 내 마음대로 기부할 수 없나요?”

단체가 보는 K-유산기부의 현실 <4>
법과 가족, 문화까지…유산기부를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

“가족 몰래 할 수는 없나요?” “가족이 반대하는데 괜찮나요?” 기부 상담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질문들이다. 동시에 기부 의사가 멈추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유산을 ‘가족에게 남기는 것’으로 보는 인식이 문화 전반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기부할 재산이 있더라도 우선 가족에게 남겨야 한다는 통념이 강하다. 이러한 인식은 상속인의 몫을 일정 부분 보장하는 법적 구조로도 이어진다. 이로 인해 유산기부가 확산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주요 NGO들은 유산을 가족에게 남기는 문화와 유류분 중심의 상속 구조가 맞물리면서, 한국에서는 유산기부가 자리 잡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Unsplash

◇ “기부하려면 온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다”

한국에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정 상속분을 가족에게 보장하는 ‘유류분’ 제도가 있다. 현행법은 배우자와 자녀에게 법정상속분의 2분의 1, 부모와 형제자매에게는 3분의 1까지 권리를 인정한다. 이 때문에 기부자가 전 재산을 공익에 남기고자 하더라도 실제로는 일부만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

김봉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고액후원팀 매니저는 “유류분이 약 50% 수준이기 때문에 나머지 절반 범위에서 개인 의사를 반영할 수 있다”며 “이 범위 안에서라도 뜻을 실현하려는 기부자들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이 단계에서 기부 계획이 중단되거나 규모가 축소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김호경 밀알복지재단 ESG협력실 특별후원팀장은 “가족과 충분한 합의 없이 상담을 시작했다가 실제 기부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유류분은 민법상 강하게 보호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설계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진아 월드비전 고액후원팀 책임매니저는 “사전에 공증이나 신탁을 설정하더라도 사후에 유류분 반환 청구가 제기되면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상담 단계에서부터 가족 동의의 필요성을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단체는 법적 분쟁 끝에 기부받은 재산을 유가족에게 반환한 사례도 있다.

유산기부는 사후에 집행되는 특성상 상속인인 가족의 역할이 핵심 변수로 작용한다. 유언장이나 사전 약정을 통해 기부 의사를 남기더라도 사망 이후 재산에 대한 접근 권한은 가족에게 우선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가족이 기부 의사를 사전에 알지 못하거나 협조하지 않을 경우 집행이 지연되거나 무산되기도 한다. 현장에서는 ‘가족을 배제한 기부’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인식이 공유된다. 이에 따라 단체들은 기부자와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을 권장하고 있다. 사전 약정이나 관련 행사 등을 통해 기부 의사를 공유하고, 집행 과정까지 함께 이해하도록 돕는 방식이다.

헌법재판소는 2024년 4월 25일 형제자매의 유류분을 위헌으로 판단해 즉시 효력을 상실시켰다. 또한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속인에 대한 유류분 인정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후 민법 개정안이 통과돼 2026년 3월 17일부터 시행되면서, 해당 상속인의 상속권 제한이 가능해졌다. /뉴시스

제도 변화의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24년 형제자매의 유류분을 위헌으로 판단하고,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은 상속인에 대해서는 유류분 인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후 민법 개정을 통해 해당 상속인의 상속권 제한이 가능해졌지만, 배우자와 직계비속의 유류분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지윤진 사랑의열매 전략모금팀장은 “공익법인에 기부한 재산을 유류분 반환 대상에서 일부 제외하거나 비율을 조정하는 등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 유언장 쓰는 나라 vs 안 쓰는 한국…기부 격차의 배경

유류분과 가족 중심 구조 외에도 유산기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유언장 문화의 부재’가 지적된다. 유산기부가 활발한 국가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유언장 작성 문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영국의 경우 2023년 기준 성인의 25%, 55세 이상은 53%가 유언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2025년 기준 등록된 유언장 가운데 38%에 자선기부 조항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최지원 세이브더칠드런 필란트로피팀장은 “유산기부가 활발한 국가에서는 기부를 받는 단체들이 기부자의 유언장 작성을 돕기 위해 변호사 상담과 온라인 작성 지원을 함께 제공한다”며 “반면 한국은 유언장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개념에 가깝다”고 짚었다.

해외 주요 기부 단체들은 유산기부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무료 유언장 작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옥스팜 영국은 온라인 작성, 지역 변호사 상담 연계, 전화 상담, 자택 방문 상담 등 네 가지 선택지를 제공한다. /옥스팜 영국 홈페이지 갈무리

김봉관 유니세프한국위원회 사회공헌본부 고액후원팀 매니저는 “스페인 역시 가족 중심 문화가 강하지만 유산기부 규모는 훨씬 크다”며 “그 배경에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이야기했다. 

한국에서는 유언장 작성 절차도 복잡하다. 자필 작성과 날인 등 법정 요건을 갖춰야 효력이 인정되며, 형식이 맞지 않을 경우 무효가 될 수 있다. 임현빈 굿네이버스 특별후원팀장은 “유언장을 작성하면서도 형식을 제대로 갖췄는지 스스로 확인하기 어렵다”며 “일본처럼 유언서 작성과 보관을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본도 자필 유언의 형식 요건은 존재하지만, 법무국이 수수료를 받고 유언서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유언 방식이 법에 맞는지 일정 부분 확인한다. 이에 따라 분실이나 위조 위험이 낮고, 작성·보관·관리 부담도 상대적으로 적다. 이는 유언장 작성과 보관, 관리까지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한국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 “왜 가족에게 안 남겼나”…보이지 않는 문화의 압력

법적·제도적 요인뿐 아니라 문화적 인식 역시 유산기부의 장벽으로 작용한다. 여전히 유산을 가족에게 남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강하며, 유류분 대상이 아닌 가족에게조차 ‘왜 남기지 않았느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윤예슬 초록우산 자산기금팀장은 “한국에서 유산은 자녀 생계에 보태주는 의미가 크다”며 “자녀로부터 정서적·물리적 돌봄을 받는 구조 속에서 유산이 일종의 ‘볼모’처럼 작용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는 의사가 있어도 자녀와의 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고, 자칫 관계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유산기부를 결심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는 구글 제미나이를 통해 제작된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 /구글 제미나이 

다만 유산기부를 둘러싼 인식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재산뿐 아니라 ‘나눔의 가치’를 함께 남기려는 기부자들이 늘고 있다. 고영주 희망친구기아대책 IMC본부 차장은 “최근에는 자녀에게 유산을 넘기기보다 가치 있는 곳에 쓰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면서도 “가장 안정적인 방식은 가족이 함께 참여해 기부를 공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윤진 사랑의열매 전략모금팀장 또한 “자녀에게 재산뿐 아니라 나눔의 정신을 함께 남기고 싶다는 기부자들이 늘고 있다”며 “이러한 변화가 확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감대와 정부 차원의 캠페인, 그리고 기부자에 대한 제도적 예우도 함께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유산기부를 촉진하기 위한 세제 설계와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상속재산의 10% 이상을 공익법인 등에 기부할 경우 상속세의 10%를 추가로 공제해 주는 ‘한국형 레거시10’ 법안이 발의됐다. 현장에서는 법안의 직접적인 효과를 넘어 유산기부를 둘러싼 논의를 확산시키고 공론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김규리·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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