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포럼서 제안한 EPC, 한국 기후금융 새 전환점 필요해
기재부, 탄소감축이 ‘기업 부담’이 되는 구조에서 ‘기회’가 되는 구조로 전환
“탄소배출권은 과거가 거래 대상이지만, EPC(Environmental Protection Credits)는 미래를 현재로 끌어온다.”
지난해 도쿄포럼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제시한 발상이다. 그는 사회성과인센티브(SPC)를 10년간 실험해온 경험을 환경 분야로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성과에 인센티브를 주듯, 환경보호크레딧(이하 EPC) 은 기업이 향후 줄일 탄소 감축량을 지금 시장에서 인정해 보상하는 구조다. 규제 대응을 넘어 새로운 기회를 열 수 있다는 구상이다.
25일 열린 ‘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 는 이 아이디어를 현실 논의로 끌어온 자리였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이사장 최태원)은 이날 세션에서 EPC 제안을 공식화하며 “기후기술의 미래 성과를 기반으로 민간 자본을 조기에 유치하고 신뢰할 수 있는 거래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5년 파리협약 이후 탄소 배출은 소폭 줄었지만, 2050년까지 60Gt에 달하는 추가 감축이 요구된다. 허승준 사회적가치연구원 팀장은 “목표 달성을 위해 약 9조 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며, 민간 자본의 역할이 크다”며 “잠재력 있는 기후기술을 개발·상용화할 혁신적 금융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선경 켐토피아 상무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탄소 배출이 감축보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유리한 현실을 꼬집었다. 그는 “감축하지 않는 집단에는 비용을 부과하고, 모범적으로 감축하는 집단에는 프리미엄을 줘야 한다”며 “한국의 기후금융은 장기적 미래 가치 평가 능력이 부족해 투자 활성화가 더디다”고 덧붙였다.
◇ 해외는 협력 기반의 감축 실험 확산 중
국제사회에서는 ‘협력’을 중심으로 탄소 감축 성과를 거래·보상하려는 제도가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193개 회원국과 항공업계의 국제 협의체인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2021년부터 시행한 ‘국제항공 탄소상쇄·감축제도(CORSIA)’는 국제항공의 탄소중립을 지원하는 제도다. 2019년 배출량의 85%를 기준으로 삼고, 직접 감축·SAF 사용·외부 크레딧 활용을 결합한 방식을 운영한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이 2023년 출범시킨 ‘트랙션(TRACTION)’ 도 주목된다. 아시아 석탄발전소의 조기 폐지를 통해 방지된 배출량을 ‘전환(Transition) 크레딧’으로 발급·거래하는 구조다. 록펠러 재단은 별도의 ‘석탄에서 재생에너지로(Coal-to-Clean) 전환 크레딧 이니셔티브(CCCI)’를 주도하며, MAS·필리핀 ACEN과 함께 파일럿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김효은 글로벌 인더스트리 허브 대표는 “해외에서는 민간 주도의 기후금융 이니셔티브가 활발하다”며 “WEF의 GAEA처럼 공공·민간·필란트로피가 협력하는 4P(Public-Private-Philanthropic Partnership) 모델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재단들도 기후대응을 핵심 과제로 삼아 인내 자본을 기반으로 신기술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2023년 출범시킨 GAEA(Giving to Amplify Earth Action)는 필란트로피를 ‘촉매 자본’으로 삼아 기후·자연 분야에 민관 투자를 끌어들이는 구조다. WEF는 2024년 다보스에서 대규모 협력 프로젝트를 더 빠르고 크게 키우기 위해 ‘빅 베츠 액셀러레이터(Big Bets Accelerator)’를 출범하고, 기업 기부금 10억 달러(한화 약 1조 3000억원) 모금 챌린지를 발표했다.
◇ 신기후 기술 기업들 “보상 구조 필요”
박형건 캡처식스 부대표는 “MS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자발적 탄소시장에서 CDR(Carbon Dioxide Removal) 크레딧을 적극 구매하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의 배출권거래제는 감축 중심 설계라 직접적 CDR 활동을 반영할 통로가 부족하고, 배출권 가격도 국제 수준보다 낮다”고 지적했다. 그는 “실질적 기여를 하는 신기후 기술과 혁신 프로젝트가 제도적 보상에서 소외돼 있다”며 “EPC가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종섭 서울대 교수는 “EPC를 에너지 산업 전환과 디지털 전환 과정에 적용하면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기업에 다양한 크레딧을 제공할 수 있다”며 “AI·반도체 산업의 탄소 배출에도 EPC를 적용하고, 블록체인·IoT 기반 데이터 인프라를 활용하면 측정·검증 체계와 새로운 시장을 동시에 구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제도화 가능성을 열어뒀다. 진승우 기획재정부 탄소중립전략팀장은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달성은 매우 도전적 과제”라며 “탄소 감축이 기업의 부담이 아니라 기회가 되도록 한국형 탄소크레딧 활성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자발적 탄소시장 인프라 구축과 다양한 수요처 발굴을 통해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EPC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감축 성과’와 ‘신뢰성 확보’를 가장 큰 과제로 꼽았다. 윤세종 변호사(플랜 1.5)는 “EPC는 결국 이전보다 온실가스를 더 줄일 수 있느냐라는 렌즈로 봐야 한다”며 “자발적 시장에서 발생한 감축분을 의무시장 이행에 그대로 가져오면 총량은 변하지 않고, 기업들이 값싼 수단으로만 활용해 효과가 희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남희 대한상의 인증센터 팀장은 “자발적 탄소시장의 핵심은 신뢰성”이라며 “인증기관의 신뢰성 확보와 ESG 공시 연계를 통한 수요 확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석권 사회적가치연구원 대표는 “EPC는 규제 대응에 쫓기던 수비적 전략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시장을 창출하는 공격적 전술”이라며 “민간 자본이나 정책자금이 마중물이 된다면 기후기술이 급성장해 탄소중립 시계를 획기적으로 앞당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경하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