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R 지출 증가 속 단순 기부 한계 드러나
공급망·기후·교육까지 확산…정책 지원과 시장 인프라 구축 과제로 지목
기업의 사회적 가치 추구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경영·생존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 2019년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 보고서는 글로벌 공급망에서 사회·환경 문제를 간과할 경우 최대 9700억 달러(약 1345조 원)의 가치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글로벌 기업들의 사회적 책임(CSR) 지출은 2023년 기준 528억 달러(한화 약 73조원)에 달했으며, 2030년까지 연평균 12.5%의 성장률을 기록해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문제는 이런 막대한 자원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가다. 단순 기부와 투입 중심의 활동으로는 사회문제 해결도, 기업의 지속가능성도 담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성과기반금융(Outcome-Based Finance·이하 OBF)’이 주목받고 있다. 성과기반금융은 사회문제 해결을 단순한 사회공헌이 아닌 기업의 비즈니스 구조 안으로 통합시키는 전략으로, 실제로 일부 기업들에선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올해 1월 SK 사회적가치연구원은 세계경제포럼 산하 슈왑재단과 공동으로 보고서를 발간하고, 성과기반금융을 활용하면 기업이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창출하는 선순환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뒤이어 이를 바탕으로 한 이슈 브리프 보고서 ‘사회적 가치는 어떻게 기업의 전략이 되는가’를 지난 7월 발간했다.
◇ 공급망 대응부터 기후까지, 기업 전략에 녹아드는 OBF
펩시코 멕시코는 2024년 국제금융공사(IFC)와 협력해 공급업체가 탄소배출 감축·인권 보호·아동노동 근절 목표를 달성하면 우대금리를 제공하는 성과기반 대출을 도입했다. 총 7500억 달러(한화 약 1040조원) 규모의 이 사업은 규제 대응, 공급망 투명성 확보, 리스크 분산 효과를 동시에 거두며 공급망 전반에 지속가능성을 확산시켰다.
국내에서는 SK그룹이 사회성과인센티브(SPC) 모델을 통해 사회적 기업이 창출한 가치를 측정하고 현금으로 보상하는 방식을 선도해왔다. SK는 이를 ‘더블바텀라인(DBL)’ 전략으로 발전시켜 매년 계열사 사회성과를 측정·공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올해 6월 SK하이닉스는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사회적가치 측정 결과 8097억원의 환경성과와 8177억원의 사회성과를 냈다고 밝혔다.
ESG 역량은 재무적 이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24년 MSCI ESG 리서치에 따르면 ESG 등급이 높은 기업일수록 자본 조달 비용이 낮았다. 프랑스 BNP파리바는 2018년부터 영국 사회주택협회를 대상으로 탄소 감축·기술 교육·일자리 창출 성과에 따라 이자율을 감면하는 지속가능성 연계 대출을 출시했다. 3억2500만 파운드(한화 약 6115억원) 규모의 이 상품은 ESG 금융시장에서 차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성과기반금융은 전통적인 자선의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스위스 금융그룹 UBS는 2022년 영국 외무개발부(FCDO), 스위스 경제사무국(SECO)과 함께 공공-민간 글로벌 이니셔티브를 구성해 기업들이 자선활동을 단순 기부가 아닌 성과 중심의 투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기업에 초기 자금과 성과관리 전문 컨설팅을 제공하고, 자선활동의 효과성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성과 기반의 사회공헌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 순환경제·인재 양성에도 ‘촉매’ 역할
OBF는 순환경제와 인재 양성 분야에서도 활용된다. 글로벌 생활용품 기업 유니레버는 2035년까지 플라스틱 포장의 100%를 재활용·재사용·퇴비화 가능한 방식으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임팩트 채권’을 활용했다. 2023년 유니레버 나이지리아는 지역 재활용 사회적기업 위사이클러스(Wecyclers)에 200만 달러(한화 약 28억원) 규모의 임팩트 채권을 발행해 플라스틱 수거량·고용 창출·임금 향상 등 사회성과가 입증될 경우 투자자에게 수익을 지급했다.
유니레버의 접근은 추가 투자 유치로 이어졌다. 상업성이 낮아 확장이 어려웠던 순환경제 모델을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전환하면서, 사업을 나이지리아 전역으로 넓힐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저소득층 고용 확대와 지속 가능한 임금체계 구축이라는 사회적 가치도 함께 달성됐다. OBF가 사회문제 해결형 상품과 서비스를 수익 모델로 전환하는 위험을 줄이고, 기업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높이는 촉매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성과 중심 접근은 인재 양성에서도 효과를 입증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투자지주사 옐로우우즈 홀딩스(Yellowwoods Holdings)는 정부·시민사회와 함께 교육-고용 연계 임팩트 채권 ‘본드포잡스(Bond4Jobs)’를 설계했다. 성과가 입증될 때만 투자자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2년간 1800여 명 청년을 정규직으로 연결했고 연 최대 11%의 투자 수익률을 기록했다. 기업 맞춤형 교육 콘텐츠를 통해 청년의 고용 가능성을 높이고, 기업은 즉시 활용 가능한 인력을 확보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것이다.
이 성공 사례는 남아공 정부가 2023년 3억 랜드(한화 약 238억원) 규모 청년고용펀드(Jobs Boost Fund)를 출범하데 영향을 끼쳤다. 기존 옐로우우즈 프로젝트(430만 달러·한화 약 60억원)의 네 배 가까이 큰 규모다. 자동화·디지털화로 노동시장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런 성과 중심 교육투자 모델은 인재 확보 측면에서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 보편적 확산 위한 과제는
이처럼 성과기반금융이 사회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연결하며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아직은 일부 기업에 한정된 접근이라는 한계가 있다.
이무원 연세대 교수는 성과기반금융을 “현재 사업을 효율적으로 활용(Exploitation)하면서 동시에 미래 신사업을 탐색(Exploration)하는 ‘양손잡이 전략(Ambidextrous Strategy)’의 대표 사례”라고 평가했다. 그는 “성과기반금융이 기업 전 구성원의 내재적 가치로 자리잡으려면 장기성과에 대한 보상체계와 조직문화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니엘 노박 슈왑재단 사회혁신국장도 “시장 인프라가 아직 미성숙해 기업들이 단순하고 안전한 방식으로 성과 지급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짚었다. 다만 그는 “한국의 사회성과인센티브(SPC) 프로그램이 400개 이상 사회적기업에 총 5200만 달러(한화 약 721억원)의 인센티브를 지급한 사례처럼, 변화를 뒷받침할 기반은 이미 마련돼 있다”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의 정책 지원을 필수 과제로 꼽는다. 성과기반 보상을 공공조달, 세제 혜택, 지속가능성 보고 프레임워크와 연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이 도입한 CSRD·CSDDD 같은 지속가능성 지침도 기업 공시를 실제 임팩트와 연결하는 핵심 진입점이 되고 있다.
민간도 새로운 모델을 실험 중이다. 케냐의 임팩트 거래 플랫폼 CGM은 빈곤 완화 프로그램을 통해 210만 달러(한화 약 29억원) 규모의 사회적 가치 거래를 이끌었고, 참여 가구의 소비·저축을 늘리며 기업 지속가능 전략의 실제 가능성을 보여줬다.
사회적가치연구원은 사회적 가치가 시장에서 직접 거래되는 미래를 그린다. 임가영 선임연구원은 “사회적 가치가 화폐화되면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언젠가는 GDP에도 반영돼 경제 전체가 커질 수 있다”며 “ODA 영역에서처럼 국제 공공기구 차원의 OBF 확산이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