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미국의 기부 생태계 <2>
불경기 속 혼합기부 증가…사명 뚜렷한 단체에 기부 몰린다
팬데믹과 경기 침체, 정부의 예산 삭감이 겹치며 미국 비영리단체들은 혹독한 시험대에 올랐다. 그러나 후원자들의 선택은 달랐다. 규모나 오래된 전통보다, 위기 속에서도 방향을 분명히 지키는 단체를 찾아 기부했다.
미국 비영리 전문 매체 ‘크로니클 오브 필란트로피(Chronicle of Philanthropy)’가 2021~2023년 개인·재단·기업의 기부 데이터를 바탕으로 발표한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자선단체(America’s Favorite Charities)’ 100대 순위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매체는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사명에 충실하고, 후원자에게 우리가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는지 설득하는 황금률이 강조된다”고 분석했다.
◇ “사명에 충실한 단체가 살아남는다”
기빙USA에 따르면 같은 기간 미국 개인 기부는 23% 늘었지만, 상위 기관들의 증가율은 이에 미치지 못했다. 상위 100곳 중 절반 이하인 46곳만이 23%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고, 18곳은 오히려 감소했다. 전문가들은 “조직의 연혁이 아니라, 사명의 일관성이 생존을 좌우했다”고 분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플랜드페어런트후드(Planned Parenthood·29위)다. 트럼프 행정부 2기에서 낙태 관련 법이 강화되고 공공의료보험 환급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 정치적 압박이 이어졌지만, “여성의 생식권과 건강권은 타협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유지했다. 정부 보조금 지급이 중단됐음에도 같은 시기 개인 후원은 오히려 급증했다. 레오라 한서 모금 최고책임자는 “이런 시기에 침묵은 통하지 않는다”며 “사명을 회피하는 단체는 결국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말했다.
세인트주드 어린이연구병원(St. Jude Children’s Research Hospital·2위)도 마찬가지다. ‘모든 아동에게 무상치료를 제공한다’는 단일 사명 아래, 치료 과정과 가족 이야기를 전하는 콘텐츠에 집중했다. SNS를 통해 병원 현장을 실시간 공개하며 후원자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을 택했다. 팬데믹 이후 3년간 기부금은 39% 증가했다. 사명을 중심으로 한 일관된 소통이 곧 후원의 지속성으로 이어진 셈이다.
◇ 새로운 재원 모델의 등장 : 혼합 기부와 탄소배출권
기술은 후원자와의 접점을 넓히는 동시에 신뢰의 시험대가 되고 있다. 국제 구호단체 이슬라믹 릴리프 USA(Islamic Relief USA·85위)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후원이 부족한 사업으로 자금을 유도한다. 교육 지원 단체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66위)는 모금 행사에서 문자 메시지를 통한 실시간 기부를 도입해 현장 참여를 높였다.
반면, 세인트주드는 생성형 AI 대신 예측 모델링 수준의 기술만 도입했다. 환자와 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고수하는 이유는 “기술이 브랜드 정체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 때문이다. 기술 효율보다 신뢰의 무게를 택한 셈이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길어지면서 단체들은 기부 방식을 다변화하고 있다. 오바마재단(Obama Foundation·61위)은 현금과 유산을 결합한 ‘혼합기부(Blended Gifts)’ 모델을 적극 도입해 후원자 자금의 유연성을 높였다. 식품 구호 단체 ‘피딩 아메리카(Feeding America·24위)’는 식품 낭비 절감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감축분을 배출권으로 전환해 새로운 재원을 확보했다.
이 같은 변화는 기부자의 행동에도 반영되고 있다. 정기후원뿐 아니라 유산기부와 기부자조언기금(DAF, Donor-Advised Fund)이 빠르게 확산 중이다. 내셔널 필란트로픽 트러스트(NPT)에 따르면, DAF를 통한 기부금 규모는 2018~2022년 사이 119% 증가했다.
전문가들은 ‘대규모 부의 이전(Great Wealth Transfer)’ 시대가 열리며 유산기부가 더 주목받을 것으로 본다. 이는 베이비붐 세대의 막대한 자산이 향후 수십 년간 자녀 세대와 사회로 이동하는 현상으로, 규모는 최대 18조 달러(한화 약 2경59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UNCF(United Negro College Fund·49위)의 마이클 로맥스 CEO는 “평소 기부 여력이 크지 않아도 계획기부를 통해 큰 영향을 남길 수 있다”고 말했다. 피딩 아메리카의 모금책임자 케이시 마시는 “유산기부는 후원자와 의미 있게 관계를 맺고, 그들의 유산을 함께 만드는 일”이라며 “단기 성과보다 관계의 지속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