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하의 우문현답] 기업재단, 돈만 잘 쓰면 되는 곳 아닌가요?

김경하 더나은미래 편집국장

“기업재단은 그냥 돈만 잘 쓰면 되는 곳 아닌가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남의 돈 쓰는 일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기부금을 정해진 기준에 맞춰 집행하고, 공시와 보고만 하면 역할을 다 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장을 조금만 가까이에서 보시면 이 질문을 쉽게 꺼내기 어려우실 겁니다. 어디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원을 흘려보낼지 결정하는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한 번의 선택이 어떤 지역의 복지 체계를 바꾸기도 하고, 반대로 몇 년간 쌓아 온 현장의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돈 쓰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돈을 ‘잘’ 쓰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기업재단이 그런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잘하는 곳도 있고, 여전히 형식적인 집행에 머무는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잘 쓰인 돈이 한 사회의 흐름을 바꾸는 지렛대가 될 수 있고, 잘못 쓰인 돈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더 고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기업재단을 여전히 ‘감시와 감독의 대상’ 정도로만 상정하는 순간,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요즘 제 머릿속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재단이라는 조직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존재일까.” 기부를 ‘얼마나’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자원과 구조를 가지고 ‘어디까지’ 상상해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끝을 한 번쯤 밀어붙여 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상상력이 없다면 위기 앞에서 늘 하던 방식으로만 움직일 수밖에 없고, 그러면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같은 문제를 제자리에서 반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들여다보면 이 질문이 조금 더 구체적인 얼굴을 갖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공공 시스템이 촘촘하지 못한 나라입니다. 복지·교육·보건의 빈틈을 정부만으로 채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적 재단(private foundation)이 일찍부터 학교와 도서관을 세우고, 인종차별·빈곤·전염병 같은 난제에 뛰어들었습니다. 카네기, 록펠러, 포드재단 등 거대 자산을 가진 기업가들이 세운 재단들은 민간 자본이 공익에 개입하는 가장 대표적인 실험장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선진 필란트로피’의 성공담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쓸 것인가’를 둘러싼 수십 년의 시행착오와 자기 반성이 빼곡합니다. 최근 미국의 10대 기업가 재단을 하나씩 따라가며 짚어보니, 이 재단들은 처음부터 완성된 전략을 들고 나온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스스로 세운 전제를 계속 의심하고 질문을 바꿔 온 조직에 가깝습니다.

최근 몇 년, 팬데믹과 트럼프 행정부 시기도 미국 재단들에게 큰 변곡점이 됐습니다. 공공예산이 줄고, 복지와 국제협력이 후퇴하는 정책 기조가 이어지면서 미국의 공익단체와 재단들 사이에서는 “이대로 버틸 수 있을까”라는 생존의 공포가 퍼졌습니다. 지난 가을 샌프란시스코 출장길에 만난 재단 실무자와 현장 연구자들의 말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위기 속에서 미국 필란트로피 생태계가 요즘 가장 자주 붙잡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인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전제들을 처음부터 다시 돌려보는 순간, 전략도, 언어도, 방향도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금 한국도 ‘복합위기’라는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 기후위기와 인구절벽, 불평등과 사회적 고립, 돌봄과 노동의 균열이 동시에 밀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기업재단을 떠올리면, 많은 분들이 여전히 ‘규제와 감독의 대상’, 때로는 ‘편법 승계의 통로가 아닌지 의심해야 할 존재’로 먼저 떠올리실지 모릅니다. 투명성과 책임을 요구하는 시선은 필수입니다. 다만 그 시선에만 머무르면 재단은 영원히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조직’으로만 남고,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조직’으로는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질문을 한 번 바꿔 보고 싶습니다. ‘감시해야 할 대상’이라는 프레임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기업재단과 공익재단을, 복합위기 시대의 ‘제3의 상상력’을 실험해 볼 수 있는 실험장으로 볼 수 없을까요. 정부와 시장이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일, 개인과 시민사회만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장기 과제를 누군가는 떠안아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실패를 감수하면서 구조를 고치는 실험을 하려면, 안정된 자본과 독립된 거버넌스를 가진 조직이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 조건을 동시에 갖춘 주체가 무엇인지 떠올려 보면, 역설적으로 재단이 가장 먼저 떠오르기도 합니다.

우문현답 코너를 시작할 때, 저는 “어리석은 질문에도 현장에 답이 있기를 바란다”는 문장을 적어 두었습니다. “기업재단은 그냥 돈만 잘 쓰면 되는 곳 아닌가요?”라는 물음도 어쩌면 그런 우문 가운데 하나일지 모릅니다. 미국 재단의 역사와 지금 한국의 복합위기 현실을 함께 들여다보면,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뀝니다. “한국의 기업재단은 지금 어떤 질문을 중심에 두고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가 가진 자산과 네트워크로, 공공이 미처 닿지 못하는 빈틈을 메우기 위해 어디까지 상상해볼 수 있는가”, “기부금 집행과 공시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바꾸는 일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을 의지가 있는가.” 지금 이 세 가지 질문은 한국 재단들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 가늠하게 해주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상상력은 충분한 재료와 냉정한 성찰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미국의 기업가 재단들이 변곡점마다 붙잡았던 물음들은 한국 재단들에게도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인가요”, “이 위기 속에서 우리만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려 할 때, 우리의 상상력이 선언을 넘어 새로운 현실의 설계도로 이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김경하 더나은미래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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