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유니버스] 기후 용어가 기후 인식을 바꾼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관료나 전문가들만의 주제가 아니다. 이제는 밥상머리에서, 날씨를 묻는 일상 인사에서, 거실의 TV 앞에서 누구나 언급하는 공통의 화두가 됐다. 2022년 구글코리아가 발표한 ‘올해의 검색어’ 1위가 ‘기후변화’였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렇게 모두가 이야기하는 주제일수록 그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미국 언어학자 벤자민 리 워프는 “언어는 사고의 본질과 내용을 규정한다”고 했다. ‘기후위기’와 관련된 단어 하나에도 생각의 방향과 세계관이 담긴다. 그 단어를 어떻게 선택하고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관점이 읽힌다. 예를 들어보자. 흔히 ‘신재생에너지’와 ‘재생에너지’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재생에너지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용어다. 신재생에너지는 3종류(수소에너지, 연료전지, 석탄 액화∙가스화 에너지)의 신에너지와 태양광, 풍력을 비롯한 9종류의 재생에너지로 구분한다. ‘신재생에너지’는 ‘재생에너지’ 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를 일부 포함하고 있어 친환경으로 보기 어렵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서 ‘재생에너지’를 ‘소비되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재생되는 자연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로 정의한다는 것을 참고하자. ‘무탄소’와 ‘탈탄소’,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맥락은 다르다. 영어로는 각각 ‘Carbon-free’와 ‘Decarbonization’으로 번역된다. 전자는 단순히 탄소 배출이 없다는 ‘상태’를 뜻하고, 후자는 탄소를 줄여나가는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결과 중심이냐 과정 중심이냐의 차이다. 수학으로 치면 스칼라와 벡터의 관계와 비슷하다. ‘무탄소’는 기술중립적 개념이지만, 국내에서는 주로 원자력 발전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니 ‘괜찮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기술낙관론과 결과 중심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은 단지 탄소 배출을

정태은 비랩코리아 선임매니저
[사회혁신발언대] 1만개 기업이 참여하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미래

지난해 만난 한 스타트업이 흥미로운 경험을 들려줬다. 미국의 한 보험사와 협업을 논의하던 중, 예기치 않게 ‘비콥(B Corp) 인증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해당 스타트업은 인증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대 기업은 ‘한국 스타트업과의 첫 거래’라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신뢰 지표로 비콥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비콥이 글로벌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비콥 운동은 처음엔 작고 다소 무모한 시도에서 시작됐다. 비콥 운동의 여정을 보여주는 책 ‘비즈니스 혁명, 비콥’에는 19년 전 비랩(B Lab)의 공동 설립자들이 약속 없이 회사를 무작정 찾아가거나, 콜드 메일을 보내고 음식점에서 답장을 기다리면서 기업 리더들을 설득하던 모습이 담겨있다. 순진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시작이 오늘날의 글로벌 운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기업의 책임있는 변화를 이끌어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이상주의자의 믿음 같았던 비콥 운동은 이제 전 세계 100여 개국, 1만 개의 인증 기업, 100만 명의 기업 구성원이 참여하는 글로벌 운동으로 성장하는 모멘텀을 맞이하고 있다. 비콥은 재무적 이익과 사회환경적 목적을 균형있게 추구하는 기업에게 성과를 검증하고 부여하는 인증이자, 기업 리더 커뮤니티가 참여하는 기업 문화 운동이다. 이번달 비랩 글로벌이 발표한 2024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11곳에 불과했던 상장 비콥 기업은 2024년 말 75곳으로 늘었다. 시장은 이제 ‘목적 중심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소비자와 직접 맞닿아 있는 식품, 화장품, 의류 업계가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비콥의 인지도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6%가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대한민국의 ESG 정책, 지금이 ‘골든타임’

2025년 6월 3일,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은 한국 기업 환경에 중대한 전환점을 예고하고 있다. 새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기업 지배구조 개선, 기후·환경 위기 대응, 청년세대의 가치 변화, AI 등 기술혁신을 아우르는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경제성장과 민생 회복, 사회 질서 구현이라는 거시 목표 아래 기업 생태계도 다시 설계되는 흐름이다. 기업 ESG(환경, 사회, 거버넌스)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새 정부 출범 직후 1년은 국정 운영의 ‘골든타임’으로 불린다. 강한 정책 추진력과 실행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 시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향후 수년간의 방향성이 결정된다. ESG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기업과 정부 모두 이 골든타임을 놓쳐선 안 된다. 첫째, 이해관계자 간 갈등 조정과 사회적 합의를 형성해야 한다. ESG 정책이 본격화될수록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장벽은 이해관계자 간의 첨예한 입장 차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과 함께 파리협정 탈퇴 등 반(反) ESG 흐름이 고개를 들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올해 2월 옴니버스 패키지 제안 이후 기업의 지속가능성 경쟁력과 현실적 규제 수준을 놓고 내홍이 거세다.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정부, 대기업, 중소기업, 시민단체, 주주 등 각 주체가 ESG 정책에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기업은 비교적 여유 있는 대응이 가능하지만, 중소기업은 인력과 자금, 기술 측면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환경단체는 규제 강화를 촉구하고, 산업계는 성장 저해를 우려한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정부는 민관협의체와 공청회 등 공식적인 논의 구조를 통해 실질적 갈등 조정의

[투자자, 연금술사가 되다] 소 한마리와 테슬라, 그리고 혼합금융

예상보다 20분 이상 더 걸렸다. 구글 지도가 안내한 시간은 이미 한참 넘긴 상태. 약속한 미팅 시간에도 늦었고, 차는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초조함을 삼키며 차창 밖을 내다보던 순간, 대로변 한복판에 멈춰선 소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차들은 그 소를 피해 조심스레 움직였고, 같은 시야 안에는 테슬라 전기차와 수십 명이 탄 릭샤도 보였다. 그렇게 필자에게 인도의 첫인상은 ‘예상 밖의 것들이 공존하는 풍경’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 인상은 곧 ‘혼합금융(Blended Finance)’이라는 개념과 겹쳐졌다. 벵갈루루에서 만난 초기 투자사와 비영리 기관들이 수행하는 프로젝트 역시,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었다. ◇ 벵갈루루에서 겪은 ‘혼합금융’의 현장 ‘혼합금융’은 말 그대로 여러 재원을 혼합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글로벌 조직 ‘컨버전스(Convergence)’는 이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민간 투자를 유도하고자 공공이나 자선 재원을 촉매자본으로 활용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 과정에는 민간 투자자, 공공기관, 재단, 수혜 기업 등 적어도 세 주체 이상이 개입한다. 인도 벵갈루루에서 방문한 ‘카본 마스터스(Carbon Masters)’는 음식물 쓰레기를 발효시켜 바이오가스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한국의 과거 LPG처럼 가스를 통에 주입해 현지 식당 30여 곳에 납품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공장까지 둘러보게 된 뒤, 인큐베이터 ‘빌그로(Villgro)’와 대출 지원 기관 ‘유누스 소셜 비즈니스(Yunus Social Business)’ 관계자를 연이어 만났는데, 공통적으로 이 기업을 언급했다. 한 기업의 이름이 이토록 반복해서 언급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8억 명 이상이 거주하는 인도처럼 인구 밀도가 높은 국가에선 폐기물 처리가 중대한 사회문제이기에,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이재명 정부가 ‘리오넬 메시’에게 배워야 할 것

리오넬 메시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이다.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아르헨티나가 배출한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FC 바르셀로나에서만 34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메시의 경기 스타일을 보면 그의 재능, 기술과 함께 정보력이 눈에 띈다. 메시는 공을 받기 전에 이미 수차례 주변을 스캔하며 다음 행동을 준비한다. 남보다 넓게, 자주, 그리고 일찍 보는 능력. 이 스캔 능력이 메시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제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한국의 공공 서비스를 새롭게 혁신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고 있다.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통한 사회 혁신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강조해 왔다. 이 혁신에는 공공 혁신도 포함된다. 그러나 공공 영역에서 인공지능, 혹은 더 넓게는 첨단 기술을 잘 활용하려면, 도구보다 문제를, 해결책보다 원인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메시처럼 경기장을 ‘스캔’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하다. 공공 서비스를 국민 모두가 더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려면, 먼저 행정 시스템 전반을 넓게 들여다보고, 어디에서 고충이 발생하는지를 정확히 감지해야 한다. 어두운 밤길에서 열쇠를 잃어버리고는, 단지 가로등 아래가 밝다고 그곳만 찾아보는 어리석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정부 행정 시스템은 종종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행정 조직은 지나치게 분절돼 있고, 각 부처와 팀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처리한다. 서로 연결되지 않다 보니, 시민의 실제 공공 ‘서비스 경험’은 포착되지 못한다. ◇ 콜센터는

[돌봄의 재발견] 아이만 돌보는 건 아닙니다

‘가족친화적’ 혹은 ‘돌봄 친화적’ 직장을 상상해 보라 하면 많은 이들이 비슷한 장면을 떠올린다. 아이들이 회사에 방문해 마스코트 인형과 사진을 찍고, 놀이공원을 대관해 패밀리데이를 열기도 한다. 알록달록하고 따뜻한 풍경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감당하는 돌봄은 훨씬 다양하고 조용하며 복잡하다. 루트임팩트는 지난 1월 성수동 공유오피스 헤이그라운드에 입주한 임팩트 지향 조직 78개 팀, 총 300명 임직원을 대상으로 자율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29%는 현재 돌봄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 중 절반 이상(59%)은 18세 미만 자녀 외에도 부모, 시부모, 배우자, 형제자매 등 다양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돌봄 책임을 함께 지고 있었다. 병간호나 원격 돌봄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도 주요 유형으로 확인됐다.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다양한 돌봄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 있다. ◇ 모든 사람의 생애주기에 걸쳐 반복·확장되는 ‘돌봄’ 그럼에도 일상에서 공유되고 환대되는 돌봄은 여전히 자녀 양육에 치중돼 있다.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했음에도 말이다.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루트임팩트와의 협력 기고문에서 “우리 사회 다섯 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 고령자이며, 이들의 건강 문제는 장기적인 돌봄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다. 단지 고령 인구가 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돌봄의 필요가 얼마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돌봄이 특정 가족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생애주기에 걸쳐 반복되고 확장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고령 가족을 돌보는 구성원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장기화하는 돌봄 상황에 놓이지만, 이들의 요구는 공식 제도로 잘 수렴되지 않는다.

[임팩트의 좌표] 임팩트 투자 10년, 본질을 다시 묻다

한국 사회에 ‘임팩트투자’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도입된 지 어느덧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2013년 무렵을 기점으로, 임팩트투자는 외형적으로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2021년 기준 국내 임팩트투자 시장 규모는 약 7000억원으로 추산되며, 이는 2017년 540억원, 2018년 2000억원 규모에서 크게 확대된 수치입니다.  하지만 양적 성장의 수치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임팩트’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단순히 자본을 임팩트 기업에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사회문제 해결과 재무적 수익 창출이라는 임팩트 투자의 본질적 목표에 얼마나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임팩트 투자 현장에서 실무와 고민을 병행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임팩트투자의 현주소와 좌표계의 유효성, 앞으로 설계해야 할 경로를 짚어보고자 합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성과를 자축하기보다 냉철한 자기 성찰과 질적 성숙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 ‘임팩트’ 외친 10년…성장했지만 남은 숙제 지난 10년간 한국 임팩트 투자 시장은 정부의 정책자금, 특히 모태펀드의 역할에 힘입어 초기 시장 형성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사회투자(2012년 설립)와 같은 초기 플레이어들이 서울시 사회투자기금 운용 등을 통해 가능성을 타진했고, 디쓰리쥬빌리파트너스(2011년 설립) 등 민간의 노력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임팩트 투자’라는 용어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됐고, 다양한 소셜벤처들이 자금을 지원받을 기회도 늘었습니다. 그러나 양적 확장이 곧 질적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책자금 중심의 시장 확대는 필연적으로 자본의 성격과 투자 방식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진정한 임팩트’ 달성이라는 목표에는 여러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자본이 단순히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MZ 체인지메이커가 말하는 ‘이미 성공한 인생’

우리 사회에서 ‘성공’의 대표적인 기준은 경제적 성취다. 높은 연봉, 창업, 재테크 등을 통해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조기 은퇴를 실현하는 이른바 ‘파이어족’은 많은 MZ세대들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성공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성공이란 경제적 자유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 살고자 선택하는 삶의 방식, 즉 라이프스타일에 가깝다. 조기 은퇴를 하지 않았더라도 스스로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살고 있다면 이미 성공한 것이다. 만약 내가 큰 부를 이루어 은퇴하게 된다면 여생을 어떻게 보낼까? 아마도 처음엔 의식주의 질적 개선을 꿈꿀 것이다. 더 좋은 집,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옷을 원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비싼 코스 요리도 하루에 열 번 먹을 순 없고, 명품 옷도 여러 벌 겹쳐 입을 수 없다. 이처럼 의식주는 무한정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언젠간 무디어지고 만족감이 떨어진다. 결국 사람은 정신적인 충만함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때 나는 아마도, 나의 가치관과 정신적 지향점을 담은 비영리 재단을 만들어 의미 있는 일로 주변과 나누며 따뜻하게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큰 부를 일군 많은 창업자들이 이런 길을 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 빌 게이츠는 주식을 매각해 마련한 자금으로 게이츠 재단을 설립했고, 오늘날까지 25년 넘게 운영해 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런 삶은 커다란 물질적 성공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 돌아보니 찾아온 ‘이미 성공한 인생’ 나 또한 성공적인 라이프스타일은 수십 년 뒤에 찾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창간 15주년 편지] 선의(善意)로는 부족합니다

2012년 5월, 더나은미래에 막내 기자로 입사한 저는 취재 현장마다 신문을 들고 다니며 “공익 분야 전문 기자입니다”라고 스스로를 소개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공익 저널리즘’이라는 용어조차 낯설었던 때였습니다. 개척자로서 사명감 하나로, 동료들과 손품 발품 팔며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100대 기업 CEO 대상 CSR 설문조사, 30대 기업 사회공헌 기획, 100대 공익법인 이사회 대해부…독창적인 기획을 위해 직접 뛰고, 때로는 공익 프로젝트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미디어는 5년만 버티면 안 망한다”는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올해 더나은미래가 창간 15주년을 맞았습니다. 2018년 5월, 편집장 직무대행으로 8주년 특집을 준비했던 시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무거운 책임감 속에서도 ‘더나은미래는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사회가 함께 키운 공공재다’라는 믿음 하나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지금은 편집국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다시 질문합니다. 우리는 어떤 미디어가 되어야 하는가. 사실을 보도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좋은 사례를 소개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면 더 깊고 본질적인 역할을 고민해야 하는가. 지난 1년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선의’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엔 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의가 실질적 행동으로 이어지고,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 낼 때 비로소 ‘선한 영향력’이 됩니다. 하지만 구조가 잘못돼 있으면 선의가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기부도 흐름이 왜곡되면 무력감과 회의로 되돌아옵니다. 기부와 선의의 행동이 진정한 변화를 만들려면, 어디에 자원을 배분할지, 누구에게 먼저 자리를 내줄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선의에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 효과적인 개입을 설계하는 ‘올바른 영향력’을 고민할 때입니다. 최근

[청년이 묻다] 첫 월급이 정치 흥정물인가, 최저임금 개혁을 묻다

16.4% 대 1.7%. 2018년 문재인 정부와 2025년 윤석열 정부의 최저임금 인상률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경제 상황 때문이 아니라, 정치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제도는 더 이상 순수한 정책이 아닌 정치의 산물이 되어버렸다. 정치권의 극한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최저임금의 방향이 또다시 극단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19대 대선 때 여야 주요 후보는 모두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했다. 목표치가 분명하니 선전하기도 쉬웠다. 20대 대선에선 양당 후보가 별도 공약을 내놓지 않았지만,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급격한 인상을 비롯한 소득주도성장을 강하게 비판하며 최저임금 인상폭을 낮출 것을 예고했다. 반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며 사실상 인상 기조를 유지할 것을 암시했다. 조기대선으로 치러지는 21대 대선도 다르지 않다. 경실련(경제정의실천연합) 정당선택도우미 관련 응답결과에 따르면, ‘최저임금 대폭인상’ 질문에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반대를,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는 매우 찬성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각 정당의 기존 입장과 공약 기조 등을 고려하면 대체적인 기조는 읽힌다. 후보들이 자신있게 최저임금 관련 입장을 내걸 수 있는 이유는 최저임금위원회라는 제도의 실질 구조에 있다. ◇ 위원회가 결정하는가, 정부가 정하는가 최저임금은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심의요청을 받은 ‘최저임금위원회(이하 최임위)’가 90일 동안 심의·의결하고, 이를 고용노동부 장관이 고시함으로써 확정된다. 최임위는 노동계·경영계·공익위원 각 9명, 총 27명으로 구성된다. 구조상 사회적 합의를 위한 합의기구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다르다. 근로자위원은 한국노총 5명, 민주노총 4명 등 양대노총이

[청년이 묻다] 서울공화국 시대, 과연 서울만이 ‘기회의 땅’인가

‘서울공화국’이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전체 인구의 50.7%인 약 2600만 명이 국토의 11.8%에 불과한 수도권(서울·경기·인천)에 몰려 있다. 교육·일자리·의료·문화 등 삶의 필수 요소가 이 좁은 공간에 집중되면서 지방 청년들은 ‘서울행’을 사실상 구조적 강제처럼 받아들인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전국 228개 시·군·구 중 57%인 130곳이 ‘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된다. 학교가 사라지고, 병원·상점이 문을 닫는 지방과, 주거비 폭등·교통 혼잡·과밀화로 신음하는 수도권의 양극화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특히 청년 세대는 이러한 구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방에서 성장한 청년은 더 나은 일자리와 교육, 문화시설을 찾아 서울로 이동하고, 서울에서 자란 청년은 지방을 삶의 공간으로조차 상상하지 않는다. 수도권 집중은 단순한 사회 현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이 되어버렸다. ◇ 2025 대선 공약으로 본 ‘지방 살리기’ 다가오는 대선에서 여야는 저마다 지역 균형 발전을 외쳤지만, 실효성에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더불어민주당은 ‘세종 행정수도’의 완성과 ‘5극 3특’ 구상을 통해 국토 균형 발전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구체적으로는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을 5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각각의 거점 도시를 중심으로 전략산업과 교통망, 행정기능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지역 주도 행정체계 개편’을 통해 지방이 주체가 되는 거버넌스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특히, 혁신도시, 경제자유구역, 산업단지 등을 연계하여 지역의 전략산업을 육성하고 위기에 처한 지역산업을 개혁해 지역 경제의 생태계를 회복시키겠다는 전략은 지방 청년들에게 일자리 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청년층이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정책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산업 단지 조성만으로는 양질의 일자리가 자동으로 생기지 않으며, 해당

[지금은 인구테크] 문제 해결을 넘어, 사람 중심의 기술로

2015년경, 국내에 ‘스타트업’과 ‘액셀러레이터’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단어들이 생소했고, 창업 생태계에 대한 인식도 지금만큼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2025년 현재, 스타트업은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등록된 액셀러레이터 숫자만 해도 400개를 넘는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기업을 창업하면 대출이나 신용보증을 통한 자금 마련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2025년 예산(추경 제외)을 보면, 중소기업 융자 관련 예산은 1조5000억 원, 사업화 및 기술개발 지원 예산은 1조7000억 원에 달한다. 이제는 창업 이후 사업이 잘되도록 돕는 예산이 더 많아진 것이다. 제로부터 시작한 창업 생태계는 아직 미진한 부분도 있지만, 양적 성장을 넘어 질적인 발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획일적 사고에 갇힐 수 있기에, 어떤 부분을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하는지, 그 집중의 강도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심이 더욱 필요하다. ◇ ‘문제 해결 기술’의 한계 그동안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는 기술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환경오염에는 친환경 소재 개발로, 지구 온난화에는 탄소 저감·대체에너지·자원 재활용 등 기후테크(Climate Tech)로 대응해왔다. 코로나19 같은 감염병 확산에는 빠른 백신 개발과 치료 기술의 고도화로 맞섰다. 이러한 기술 발전은 대부분 ‘객체 중심적 사고(Object-Centered Thinking)’에 기반해 있었다. 외부의 문제나 현상을 하나의 객체로 설정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술이 활용된 것이다. 이 접근법은 즉각적인 반응과 실질적인 결과를 끌어낼 수 있지만, 그 근본에 ‘사람’은 종종 빠져 있었다. 인간 중심의 고민이 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