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보건 전문가 이훈상이 전하는 커리어의 방향
“세상에 필요한 일을, 시장으로 풀 수 있다”
“북한에서 100만 명이 굶어 죽던 시절, 그들을 돕고 싶어 의대로 편입했습니다. 그런데 국제보건기구(WHO) 마닐라 사무소에서 인턴을 하며 깨달았죠. 북한보다 더 열악한 곳들이 세상엔 많다는 걸요.”

이훈상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RIGHT Foundation·이하 라이트재단) 전략기획이사는 지난 5일 서울 성동구 헤이그라운드에서 열린 유한양행 ‘유일한 아카데미’ 특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그는 2000년대 초 의과대학으로 진로를 틀었고, 이후 WHO 평양 사무소에 직접 인턴십 문의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 경험은 그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었다. 국제보건이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 ‘북한만 바라보던 시선’을 바꿨다고 했다.
이날 특강에서 이 이사는 국제보건을 단순히 ‘좋은 일’로만 보는 인식을 경계했다. “국제보건은 저소득 국가를 돕는 일이긴 하지만, 동시에 매년 수십조 원이 오가는 거대한 글로벌 시장입니다.”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 사업에 매년 40억 달러가 투자되고, 유엔 조달기구는 10억 명분의 10년치 백신을 한꺼번에 사들인다. 단가가 낮은 대신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시장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그는 “매년 어떤 나라가 어떤 국제보건 분야에 투자하는지 데이터를 추적하는데, 작년엔 처음으로 한국이 국제보건 재정지원국 통계에 이름을 올렸다”며 “국가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청년들의 진출 기회도 많아진다”고 강조했다.
이훈상 이사가 몸담고 있는 라이트재단은 2018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글로벌 보건 R&D 민관협력기금이다. 보건복지부와 빌&멜린다 게이츠재단, 국내 생명과학 기업들이 함께 참여해 만들었다. 재단은 백신, 치료제, 진단기기, 디지털 헬스 기술 등을 ‘글로벌 공공재’로 개발하고, 중저소득 국가의 보건 형평성 향상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금까지 총 73개 연구 과제에 약 1360억 원을 투자했다.
이 이사는 “WHO 외에도 다양한 국제보건기구가 있고, 이들과 손잡은 기관과 기업도 많다”며 “하지만 현장에 가보면 여전히 한국인의 모습은 드물다”고 지적했다. 이어 “기생충, 열대병처럼 여전히 고통받는 환자가 많지만, 약이 개발되지 않았거나 조달조차 되지 않는 분야가 남아 있다”며 “이런 미개척 영역을 시장으로 만드는 일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특강이 끝난 뒤, 국제보건 분야 진출을 고민하는 학생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유세은(이화여대 독어독문·융합보건학 4년) 씨가 “학부 졸업 후 바로 국제보건 분야에서 일할 수 있을지, 석사나 인턴 경험이 필요한지” 묻자, 이 이사는 “이 분야는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 뛰어드는 일”이라며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우는 다양한 경험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호인(차의과대 간호학과 2년) 씨는 특강을 듣고 라이트재단에서 일하고 싶어졌다며 간호학 전공자가 국제보건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 이사는 “간호학은 현장에서 백신과 치료제가 어떻게 쓰이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전공”이라며 “지금은 공부와 임상 경험을 잘 쌓되, 이후에는 추가적인 공부와 현장 경험도 함께 갖추는 것이 좋다”고 답했다.
강연을 마치며 이훈상 이사는 “하루아침에 국제보건 전문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더라도, 오늘 이 자리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수많은 진로 중 국제보건이라는 길도 한 번쯤은 진지하게 고민해보면 좋겠다”고 전했다.
한편, ‘유일한 아카데미’는 유한양행이 희망친구 기아대책, 진저티프로젝트, 더나은미래 등 협력기관과 함께 올해 처음 시작한 청년 대상 사회혁신 교육 프로그램이다. 제약·바이오 산업과 사회문제 해결에 관심 있는 전국 대학생 및 취업준비생 30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참가자들은 팀을 이뤄 보건·복지 분야 사회문제를 직접 탐색하고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 방식으로 해결책을 설계한다. 이번 특강은 청년들에게 국제보건을 포함한 다양한 진로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마련됐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