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법제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표 법안인 ‘GENIUS 법’이 지난 18일(현지 시각) 하원을 통과했고, 대통령 서명을 앞두고 있다. 국채와 암호화폐를 연계해 달러 패권을 지키겠다는 의도가 깔렸다. 민간 금융기관들도 이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이다. JP모건, 시티그룹 등 주요 금융사들이 앞다퉈 참여를 선언하며 디지털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처럼 담보가 없는 ‘무담보 코인’이 아니라, 1코인을 1달러에 연동한 ‘담보 코인’이다. 변동성이 크고 가치 보장이 어려운 무담보 코인이 투자자산으로만 소비돼온 데 반해, 스테이블(stable)코인은 담보 기반의 안정성 덕분에 공식 통화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통화 가치를 우선시한 암호화폐를 만든다면, 가장 적절한 형태는 국가가 보증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이하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일 것이다. CBCD는 국가의 공식 화폐를 디지털화한 형태로,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관리한다. 때문에 정부의 통제가 필연적이며, 이 때문에 ‘감시 수단’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
◇ 스테이블코인 띄우는 美… 달러 패권의 새 무기
반면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변동성 높은 무담보 코인과 달리, 달러나 국채 등 실물 자산을 담보로 삼아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런 구조 덕분에 정부 개입 없이도 안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 ‘중앙통제 없는 대안 화폐’로 주목받아 왔다. 이미 미국을 위주로 사용되어 오다가 이번 법안을 통해 본격 궤도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디지털 자산 시장의 선두를 자처한 다양한 암호화폐가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수년간 CBCD는 암호화폐 시장의 안정적 대안으로 거론돼왔다. 하지만 미국은 CBCD가 아닌 스테이블코인을 선택했다. 이는 미국인들이 ‘돈’을 바라보는 정서와 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헌법상 중앙은행이 아니다. 정부나 의회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는 민간 성격의 기관이며, 상업은행들의 연합체다. 국가의 화폐를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방식에 미국인들은 익숙하지 않으며 심지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지출내역과 송금내역을 정부가 들여다보는 것에 그들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러한 특수성은 현재 집권당인 공화당이 스테이블코인을 띄우는데 주요한 배경이 됐다.
그렇다고 CBCD가 국제적으로 외면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대표적인 CBCD 추진국이다. ‘e-CNY(디지털 위안화)’는 베이징 등 20여개 도시에서 수년째 시범 운영 중이다. 거래 수수료가 없고 실시간 송금이 가능하며, 이동 경로를 모두 추적할 수 있다. 이미 누적 거래 규모는 1조 달러(한화 약 1388조원)를 넘어섰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스테이블코인 확산에 실패할 경우, 중국의 CBCD가 글로벌 디지털 화폐의 표준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실제로 중국은 ‘일대일로’와 해외 원조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 위안화 사용처를 꾸준히 늘리고 있다. 문제는 그 확산의 이면이다. 중국 정부의 통화 영향력뿐 아니라, 개인의 거래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감시 체계도 함께 전파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국제사회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 탈중앙 기부모델, 비영리의 존재방식을 흔들다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은 단순한 경제 이슈로만 보아선 안 된다. 강대국 주도로 디지털 화폐가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경우, 한국의 통화 주권이 위협받고 환율 불안 등 경제적 충격이 뒤따를 수 있다는 우려는 익히 제기돼 왔다. 이에 대응해 국내 대기업들도 연합체를 구성해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변화가 비영리 섹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문제는 스테이블코인의 등장이 경제질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신뢰 구조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기부와 자선의 전통적 방식에 의존해온 모금기관, 자선구호단체, 개발 NGO 등은 예외가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금기관, 자선구호단체, 개발NGO 등의 상황을 유통망에 비유해 보면 몇 가지의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일반 상거래에서 유통기관은 소비자와 생산자를 연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품의 품질을 관리하는 일까지를 함께한다. 유통이 불신을 낳을 때, 소비자는 생산자와의 직거래를 택한다. 상품을 파는 시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단체를 믿지 못하는 기부자가 많아질수록 수혜자와의 직접 전달을 모색하는 현상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은 우리가 오랫동안 믿어 왔던 자선 실천방식의 뉴노멀을 앞당기고 있다. 아프리카의 한 소녀에게 생리대를 지원하고, 사용 내역을 실시간으로 확인한 뒤, 잔액은 환불까지 가능한 구조. QR코드 하나로 이 모든 과정이 끝난다. P2P로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굳이 주관기관의 보고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모금기관, 자선구호단체, 개발NGO를 유통기관과 단순히 비교하여 분석하는 일은 무례이거나 무리일 수 있다. 적어도 이들의 헌신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수고스럽다. 다만 전환점을 맞이한 디지털 자산 생태계의 거대한 조류를 이겨 낼 수 있는 경쟁력이 헌신에 있다고 누구도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 “가상자산 받는 법”에 머문 비영리, 존재 이유부터 다시 묻자
비영리조직이 지금 마주한 변화는 단순한 화폐의 전환이 아니다. 스테이블코인의 등장은 비영리섹터의 ‘존재 이유’를 정면으로 묻고 있다. 기부금을 받아 전달만 하는 채널로 머문다면, 기부자들은 더는 조직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답은 ‘임팩트 중심’ 접근에 있다. 단체가 기부금이 실제로 작동하는 현장을 관리하고, 그 효과를 보증할 수 있어야 신뢰가 쌓인다. 연결과 피드백이 생략된 구조에선 생존이 어렵다.
그러나 지금 비영리 현장은 ‘코인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에만 몰두하고 있다. NFT 수납 시스템 도입, 디지털 지갑 운영 방식 등 기술적 대응은 한창이지만, 본질은 기부자와의 관계 설정에 있다. 디지털 자선의 기준을 선도하고, 탈중앙 기부모델과 공공성의 융합을 구상하는 일이 모금 채널을 하나 더 추가하자는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실리콘 밸리의 수많은 벤처가 오늘날의 빅테크가 된 배경에는 중요한 관점이 자리하고 있다. 기술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관점이다. 성공한 기업이라도 기술 자체가 특별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많은 성공 사례가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기술을 얼마나 잘 연결하고 융합했는지에 대한 기획력이 핵심이었다. 비영리조직은 기술 기반의 산업이 아니지만 기술을 외면한 채 존재할 수 없는 영역이다.
기술과 철학의 연결을 상상할 때 많은 사람들이 기술에 대한 준비가 시급하다고 진단하겠지만, 반대로 철학이 빈곤하여 기술을 접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철학의 공동체, 신념의 결사체가 비영리조직이다. 조직의 철학을 어떻게 기부자들과 공유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다시 고민할 시기다.
이재현 NPO스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