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저와 이름이 같은 ‘대학생 김경하’를 만났습니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자를 꿈꾼다는 그 학생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를 언급하며, “피해자들이 정보를 미리 알았더라면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기자라는 업(業)의 본질이 통한다고 믿는 그에게, 저는 한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자가 없어서 그 문제가 드러나지 않은 것 같나요.” 그는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저는 그 ‘멈춤’이 반가웠습니다. 생각은 대개 그 지점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직함과 함께 배달되지 않습니다. 명함을 파는 순간 열리는 비밀 창구 따위는 세상에 없습니다. 불리한 정보는 은폐되고, 불편한 사실은 늘 뒤늦게 당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를 선택하느냐’입니다. 끝까지 질문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익숙한 결론에 안주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 ‘사유의 부재’가 좁히는 공론장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목격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철저한 ‘사유의 부재’에 빠진 평범한 관료였을 뿐입니다. 타인의 관점에서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을 포기한 채 시스템의 관성에 몸을 맡길 때, 공론장은 서서히 질식하며 끔찍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대개 ‘사유의 게으름’은 효율의 탈을 쓰고 나타납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기획하는 것은 몹시 고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자의 직무로 치면 현장에 대한 관심, 비판적 사고, 쉬운 답을 거부하는 끈기가 필요합니다. ‘기존 방식’이라는 관성이 지배하는 순간 공론장은 균질해지고, 현장의 생생한 경험은 밖으로 밀려납니다. 지난 2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