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트라이트는 원래 제일 유명한 사람이 받는 것 아닌가요?”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이,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가장 시대착오적인 우문(愚問)에 가깝다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가수 이찬혁 씨가 선보인 무대는, 이 질문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면에 세우는 대신, 뮤직비디오 속에서 스쳐 지나가던 인물을 무대 앞으로 불러내 스포트라이트를 온전히 내어주었습니다. 노래와 안무, 카메라 동선과 조명이 모두 그 사람을 중심에 맞춰 재배치되는 순간, 이 무대의 ‘주연’은 조용히 바뀌었습니다. 예술적 완성도를 넘어 “누가 이 자리에 서야 하는가”를 다시 묻게 만든 연출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많은 분들이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감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주연과 조연을 나누던 위계 대신, 각자의 서사가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는 인식, 다양성을 배경이 아니라 구성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감각이었습니다. 선언적인 ‘포용’의 구호를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대의 구조 자체를 바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술이 시대의 감각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이 무대는 지금 우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압축해서 보여준 셈입니다.
이른바 ‘임팩트 생태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문제 해결을 내세우는 수많은 프로젝트가 존재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이는 여전히 자금을 대는 주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각종 홍보 기사나 영상 속에서 현장의 당사자는 종종 ‘감동적인 사례’를 위해 소환되는 조연으로 소비됩니다. 누가 기획했고, 누가 지원했고, 어느 기업이 참여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빼곡한 반면, 정작 그 변화로 삶의 궤도가 바뀐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흐릿하게 처리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최근 제가 몸담고 있는 공익 미디어 ‘더나은미래’가 국제구호개발 NGO 희망친구 기아대책과 함께 진행한 이주배경청년 프로젝트는, 이 틀을 조금 비틀어보려는 작은 시도였습니다. 이주배경청년의 커리어 문제를 다루면서, 저희는 당사자인 이주배경청년 인턴과 함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서사를 구성했습니다. 어떤 장면을 드러낼지, 어떤 질문을 던질지, 현장을 어떻게 바라볼지 결정하는 과정에 인턴이 ‘취재 대상’이 아니라 기획자이자 동료로 참여했습니다.
기사 속에서도 이번 프로젝트는 특정 기업이나 단체의 ‘지원 성과’가 아니라, 한국 사회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한 청년의 불안과 선택, 가능성이 어떻게 부딪히고 길을 찾아가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줄곧 비춰오던 조직의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 당사자의 시선을 기준점으로 삼아 판을 다시 짜보려 한 실험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임팩트 생태계 전반이 이런 ‘이찬혁적 사고’를 적용한다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은 서사의 구조일 것입니다. 성과 보고서의 첫 장, 포럼의 첫 세션, 캠페인의 첫 화면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돈을 낸 사람, 전략을 짠 사람만이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통해 일상을 다시 꾸려가는 당사자, 현장에서 버티고 있는 활동가, 지역 커뮤니티가 온전히 ‘주연’으로 등장할 수 있도록 구조를 재배치해야 합니다. 단지 인터뷰 한 줄을 추가하는 수준이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에 이들의 관점을 전면에 세우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재정과 권한을 쥔 쪽이 한 발 물러서 스포트라이트를 내어줄 때, 임팩트 생태계는 비로소 말로 내세우는 가치와 실제 운영 방식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참여형 보조금, 커뮤니티 주도 펀드, 당사자 참여 이사회 같은 장치는 그 자체로 새로운 ‘조명 장치’가 됩니다. 사회문제 해결의 주어를 ‘우리가 돕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로 바꾸는 순간, 같은 사업도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읽힙니다. 이주배경청년 인턴과 함께 기획한 프로젝트가 저희 내부의 관성을 돌아보게 만들었던 것처럼,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한 번 바꾸는 것만으로도 판 전체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결국 관성의 문제입니다. 익숙한 방식, 안전한 조합, 검증된 파트너만 반복하는 리더십으로는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기 어렵습니다. 기존 관성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순간, 임팩트 조직과 리더는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조용히 뒤처질 위험을 안게 됩니다. 변화는 내용만 조금 고치는 것으로 오지 않습니다. ‘누가 중심에 서는가’, ‘어디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를 바꾸는 시선 전환에서 시작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청룡영화상의 짧은 무대는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임팩트 생태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과 조직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쥐고 있는 스포트라이트와 무대를 한 번쯤은 통째로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임팩트 생태계에도 이찬혁적 사고가 필요하다”는 말은, 사실 거창한 찬사가 아닙니다. 판을 새로 짜겠다는 리더의 결심,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지 않겠다는 태도, 관성을 경계하며 시선을 다시 조정하겠다는 최소한의 다짐에 가깝습니다. 이번 이찬혁 씨의 무대는 임팩트 생태계의 다음 10년이 어디를 향해 걸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힌트가 아니었을까요.
김경하 더나은미래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