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2> 록펠러 재단
근본 원인 파고드는 ‘과학적 자선’
식량·보건 넘어 사회 구조 개혁에 투신 “실패도 공유해야 진짜 파트너”
한때 ‘미국 역사상 가장 미움받은 기업가’였던 사람이 오늘날 미국 자선의 기둥을 세운 주인공으로 평가받는다. 석유왕 존 D. 록펠러다. 그가 남긴 재산은 한때 미국 정유산업의 90%를 장악하며 독점과 로비의 상징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돈은 이후 110년간 미국 공익제도의 뼈대를 만드는 자본으로 쓰였다. 1913년 문을 연 록펠러 재단은 지금까지 260억 달러(한화 약 35조원)를 교육·보건·농업혁신에 투입하며 현대 자선의 방향을 바꿔왔다. 독점 자본의 그림자를 남겼던 인물이, 정작 미국 공공 시스템의 초석을 놓는 데 결정적 흔적을 남긴 셈이다.

19세기 말, 록펠러가 세운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정유산업의 90%를 지배한 독점 기업이었다. 철도회사와의 비밀계약, 경쟁사 압박, 정치 로비까지 ‘무자비한 자본가’의 상징이었다. 그런 록펠러가 기부를 선언했을 때 여론은 싸늘했다. “오염된 돈으로 악행을 세탁하려는 것 아니냐.” 재단 인가안이 의회에 제출된 1910년, 거센 반대 속에 승인까지 3년이 걸렸다. 결국 1913년 3500만 달러(한화 약 514억원)를 출연하며 재단이 공식 출범했고, 이후 1929년까지 록펠러 가문이 기부한 금액은 40억 달러(한화 약 5조 8800억원)에 달한다.
현재 록펠러 재단은 약 60억 달러(8조 8000억원)의 자산을 운용한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며, 연방·주 정부의 보조금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2024년 한 해 지원한 보조금 규모만 28억 달러(한화 약 4조 1200억원)를 넘는다.
◇ 과학이 이끄는 자선, ‘문제의 근본’부터 고쳐라
록펠러 재단은 설립 초기부터 조력자 프레더릭 게이츠가 정립한 ‘과학적 자선(Scientific Philanthropy)’ 원칙에 따라 운영됐다. 사회문제의 원인을 찾아 근원에서 해결하는 방식이 재단 운영의 기본 철학이었다. 이를 위해 단순한 기부 대신, 사회문제의 원인을 데이터로 규명하고 지속 가능한 해결책을 설계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재단은 지식과 공공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이 원칙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이 20세기 초 국제보건국(International Health Division)이다. 당시 후크웜·황열병·말라리아 같은 감염병은 개발도상국뿐 아니라 미국 남부 지역에서도 심각한 부담이었다. 재단은 각국 정부와 협력해 방역체계를 구축하고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 이때 개발된 감염병 대응체계는 훗날 세계보건기구(WHO) 설계의 토대가 됐다.
교육 분야에서도 록펠러의 자본은 미국 고등교육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시카고대는 재단의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적 연구대학으로 도약했고, 이후 10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미국 최초의 공중보건대학(존스홉킨스대)을 세운 것도 록펠러 재단이다. 중국의 의학교육 현대화에 결정적 영향을 준 ‘차이나메디컬보드’ 또한 재단이 만든 기관이다. 1923년 출범한 사회과학연구위원회(SSRC)는 대공황 이후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기반 연구를 이끌었고, 1927년 현대미술관(MoMA) 설립 지원은 미국 문화예술 생태계를 바꾼 출발점이었다.

록펠러 재단은 과학과 데이터 기반 자선을 가장 먼저 실험한 조직이기도 하다. 1943년 멕시코 정부와 시작한 ‘녹색혁명’은 그 전형이다. 토지개혁 이후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멕시코에서 재단은 품종개량·관개·토양 개선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800종 이상의 옥수수를 테스트한 끝에 멕시코는 자급체제를 갖췄다. 이 모델은 인도·아시아·아프리카로 확산됐고, 재단은 이를 “과학이 설계한 자선의 첫 성공”이라 회고한다.
◇ 위기의 시대, ‘기후’와 ‘공정’을 묶다
설립 110년을 맞은 지금, 록펠러 재단은 ‘기후 전환’을 새로운 미션으로 설정했다. 2023년 9월, 라지브 샤 대표는 유엔총회 기간 중 향후 5년간 10억 달러(한화 약 1조 4700억원)이상을 기후 대응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핵심은 에너지·식량·건강·금융 등 4대 분야에 걸친 기후 문제를 통합하겠다는 것이다.
식량 시스템을 다루는 ‘Food is Medicine(음식이 약이다)’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 식이질환 의료비가 연간 1조 달러에 이르고, 식품 생산·운송·가공 과정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의 3분의 1을 차지한다는 현실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병원과 지역 커뮤니티가 함께 영양식 처방을 건강보험 체계에 포함시키는 방식은 식량·건강·기후 문제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재설계하려는 시도였다.

재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네소타와 아프리카에서 재생농업 전환을 실험하며 탄소를 줄이면서도 생산성을 지키는 모델을 모색했다. 매드 캐피탈(Mad Capital)은 화학비료 사용을 줄인 뒤 겪는 수확 감소와 전환 비용 부담을 완충하기 위해 장기·유연 대출을 제공했고, 이 모델을 통해 4100에이커가 유기농으로 전환됐으며 1만8000에이커가 전환 과정에 있다. 록펠러 재단은 식량·농업·보건을 따로 보지 않았다. 모두 ‘기후전환’이라는 하나의 시스템 문제였다.
기후위기를 핵심 미션으로 삼은 재단의 전략은 ‘지구와 사람을 위한 글로벌 에너지 연합(GEAPP)’에서 정점을 찍는다. 2021년 록펠러 재단은 이케아재단·베조스어스펀드와 손잡고 이 연합체를 출범시켰다. 목표는 분명했다. 에너지 전환의 비용 부담 때문에 재생에너지 도입을 망설이던 저소득·저중소득국 등 취약국가의 첫 단추를 대신 끼워주는 것. 록펠러 재단은 ‘촉매자본’을 앞세워 초기 위험을 먼저 떠안았고, 그 뒤를 세계은행·다자개발은행·민간 자본이 잇따라 채우며 태양광·배전망 등 전력 프로젝트가 실제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24년 기준 약 15억 달러의 프로젝트가 가동됐고, 170만 명이 보다 안정적인 전력 접근성을 확보했으며, 탄소 배출은 32만6000t이 줄었다. 아이티에서는 GEAPP의 투자를 받은 현지 기업 알리나 에네이지(Alina Enèjii)가 여러 가구가 전기를 서로 공유하는 ‘메쉬 그리드(mesh grid)’를 설치했다. 기존 방식보다 비용이 40% 저렴하고 주민들이 직접 설치할 수 있어, 외딴 지역 3000가구가 생애 처음으로 전기를 쓰기 시작했다. 전기가 들어오자 작은 가게가 생기고, 해가 진 뒤에도 마을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등 일상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GEAPP는 기후·빈곤·인프라를 동시에 건드리는 록펠러식 자본 설계의 대표작이다.

글로벌 청정에너지 전환을 뒷받침한 재단은 동시에 미국 내부의 ‘전환 불평등’에도 눈을 돌렸다. 연방 차원의 기후 예산이 커져도 지역마다 이를 활용할 역량이 달라 청정에너지 전환의 속도가 크게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단은 이를 기후 대응의 또 다른 취약 지점으로 보고 2023년 휴렛·맥아더 재단과 함께 ‘인베스트 인 아워 퓨처(Invest in Our Future·이하 IOF)’를 출범시켰다. 지역 커뮤니티가 청정에너지 보조금과 세제 혜택에 접근할 수 있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IOF는 지금까지 42개 주 70개 단체를 지원했고, 이들이 2024년 한 해에만 274억 달러(한화 약 40조 3000억원) 규모의 청정에너지 자금을 확보하도록 도왔다. 기후 전환의 혜택이 지역 단위에서도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전환의 최종 관문’을 열어준 셈이다.
◇ 110년을 지탱한 힘, 성과의 핵심은 ‘협력’
록펠러 재단의 힘은 단지 ‘큰 돈’이 아니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넣어야 사회의 규칙이 바뀌는지 설계하고, 그 과정에 필요한 주체들을 한 테이블로 모으는 능력이다. 2024년 ‘글로벌 경제 회복(GER)’ 이니셔티브는 세계은행과 다자개발은행(MDB)의 대출 규칙 개편을 이끌어 1700억 달러(한화 약 250조원)의 추가 대출 여력을 확보하게 했다.

재단의 프로젝트는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민간 재단, 정부 기관, 국제기구, 지역 사회 조직 등 다양한 주체가 협력하며 ‘신뢰 기반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구조다.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역할을 인정할 때 지속 가능한 해법이 가능하다는 것이 록펠러식 자선의 철학이다.
2017년 취임한 라지브 샤(Rajiv J. Shah) 회장은 협력을 “불가능해 보이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한다. 또한 재단은 ‘강한 파트너십의 조건’을 명확히 정의한다. 성공뿐 아니라 실패를 함께 공유할 때 진짜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의견 충돌은 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신뢰를 쌓는 과정으로 본다. 특히 지역사회와의 협력에서는 ‘권한 이양’이 핵심이다. 현지의 리더십을 존중하고, 지역이 스스로 해법을 설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록펠러 재단은 이를 세 단어로 요약한다. “먼저 배우고(Learn), 다음에 참여하며(Join), 마지막에 구축하라(Build).” 협력의 순서를 지키는 것, 그것이 110년을 이어온 록펠러식 자선의 비밀이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