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10·끝>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
면세 혜택 대신 ‘유연함’을 택한 LLC 구조가 만든 새로운 자선의 방식
교육·과학·정책을 아우르는 ‘직접 개입형 자선’의 실험
2015년 12월, 억만장자가 쓴 공개서한이 관심을 끌었다. 마크 저커버그와 프리실라 챈 부부는 딸 맥스의 탄생을 축하하며, 자신들이 보유한 페이스북(현 메타) 지분의 99%를 생전에 사회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당시 가치로 약 450억달러(약 66조원).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선언과 함께,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를 약속한 것이다.
이들이 선택한 방식은 더 큰 주목을 받았다. 세제 혜택이 보장되는 전통적 재단을 세우는 대신, 유한책임회사(이하 LLC) 형태의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이하 CZI)’를 출범시켰다. 이름은 자선 이니셔티브지만, 법적 구조는 영리 회사와 같아 사기업에 투자하고 수익도 창출할 수 있는 형태다.

◇ LLC, 혜택을 포기하고 자유를 얻다
미국의 비영리 재단은 기부금에 대해 세제 혜택을 받지만, 영리 투자나 정치 활동은 엄격히 제한된다. 매년 국세청에 사업보고서(990)를 제출해 자산 운용 내역·기부자 정보·임원 보수 등 거의 모든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상 대부분의 재단은 ‘보조금(grant) 지급’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저커버그 부부는 이런 전통 재단 구조의 제약을 LLC 형태로 우회했다. 세금 혜택을 포기하고, 대신 정책·시장·여론을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풀옵션’을 선택한 것이다. 저커버그는 CZI 출범 당시 “세제 혜택은 받지 않지만, 사명을 더 효과적으로 실행할 자유를 얻었다”며 “투자로 발생하는 순수익 또한 이러한 사명을 달성하는 데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LLC 모델은 CZI에 세 가지 수단을 쥐여줬다. 첫째, 특정 법안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주민발의·캠페인·로비 활동. 둘째, 공익적 목적과 별개로 벤처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재무성과와 사회성과를 함께 추구하는 것. 셋째, 엔지니어를 직접 고용해 소프트웨어·데이터 인프라 등 ‘제품’을 만드는 조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CZI는 이 구조를 활용해 형사사법 개혁, 주택 문제 해결 등 굵직한 사회 의제에 직접 개입해왔다. 2017년까지 약 4500만달러(약 658억원)를 정책 옹호 활동에 집행했고, 오클라호마·캘리포니아에서 비폭력 범죄자 형량 완화 주민발의, 청소년 성인기소 금지 법안, 뉴욕 라이커스 아일랜드 교도소 폐쇄 결정 등을 밀어붙였다. 캘리포니아에서는 15개 주택 법안 패키지가 통과되는 과정에서 주민발의·로비 활동을 후원했다. 이후에는 형사기록 자동 말소를 추진한 ‘클린 슬레이트(Clean Slate) 이니셔티브’와 주택 공급 규제 완화를 위한 주민투표(Proposition 5) 등으로 영향력을 넓혀갔다.

투자도 적극적이다. 아프리카 개발자 교육 스타트업 ‘안델라(Andela)’, 교사 주택 구매를 돕는 ‘랜디드(Landed)’, 청년 취업 플랫폼 ‘핸드셰이크(Handshake)’, 유아교육 앱 ‘브라이트휠(Brightwheel)’ 등이 대표적이다. CZI는 개별 수익률을 공개하지 않지만, 2025년 발표한 리포트에서 지난 10년간 투자한 교육·생명과학 분야 30여개 기업의 서비스 이용자가 학생 1억5000만명, 가구 1억800만곳 이상에 달했고 9개 기업이 연 매출 1억달러(약 1460억원)를 돌파했다고 밝혔다.

◇ 실리콘밸리식 해법, 교육 개혁 실패에서 교훈을 얻다
저커버그 부부의 엔지니어링 접근은 교육 분야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CZI는 설립 초기 개인 맞춤형 학습(Personalized Learning)을 핵심 의제로 제시하며, 학습 격차는 데이터와 소프트웨어로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대표 사례가 온라인 기반 자기주도학습 플랫폼 ‘서밋 러닝(Summit Learning)’이다. 서밋 러닝은 학생이 개별 진도에 따라 학습 경로를 설정하고 온라인 콘텐츠를 중심으로 자기주도 학습을 진행하는 구조다. 교사는 강의자 대신 ‘코치’ 역할을 맡고, 학습 과정 상당 부분이 컴퓨터 기반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CZI 지원을 받은 이 모델은 2018년경 미국 공립학교 300곳에 빠르게 확산됐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뉴욕 브루클린 공립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집단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지역에서는 학부모 시위가 이어졌다. “하루 대부분을 화면 앞에서 보낸다”는 학생들의 비판, 학부모들의 데이터 프라이버시 우려가 쏟아졌다. 교육구·교사·학부모의 참여 없이 일방적으로 도입된 방식에도 반발이 컸다.

논란 이후 CZI는 전략을 수정했다. 2023년 교육 총괄 산드라 류 황(Sandra Liu Huang)은 공개서한에서 “기술만으로는 교육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됐다”고 밝히며 플랫폼 중심 접근을 축소했다. 교사·학생·지역 단체가 참여하는 파일럿 중심(bottom-up) 구조로 전환하고, 학업 성취도뿐 아니라 정서·관계·사회성 등 ‘전인적 발달’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틀었다.
CZI가 새로 선보인 도구 ‘어롱(Along)’은 교사와 학생이 짧은 문답·영상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정기적으로 소통하도록 돕는 앱이다. 팬데믹 이후 학생들의 고립감·불안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부 연구에서는 어롱 활용 학교의 학생 수행 능력이 대조군보다 개선됐다는 결과도 나왔다. 그러나 메타가 청소년 정신건강 논쟁의 중심에 있는 만큼, 저커버그 부부가 소유한 조직이 학생의 정서 데이터까지 다루는 것에 대한 불신도 여전하다.

CZI는 최근 교육에서 ‘AI 인프라 제공자’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대표 프로그램 ‘러닝 커먼즈(Learning Commons)’는 각 주의 교육과정과 학업 성취 기준을 기계가 읽을 수 있는 구조로 정리한 ‘지식 그래프’를 오픈소스로 제공한다. 이를 기반으로 AI 학습 도구를 만들 수 있도록 돕고, 생성형 AI가 만든 학습 콘텐츠의 적합성을 자동 점검하는 평가 도구도 개발하고 있다.
◇ 과학과 AI에 과감한 배팅
현재 CZI가 가장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분야는 단연 과학이다. 목표는 야심차다. “이번 세기 안에 인류의 주요 질환을 예방·치료·관리 가능한 상태로 만든다.” 이를 위해 CZI는 개별 연구자에게 보조금을 나누는 대신, 연구자들이 함께 쓰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전략을 택했다. 대표 사례가 ‘챈 저커버그 바이오허브(Biohub)’와 ‘인간 세포 아틀라스(Human Cell Atlas)’다. 샌프란시스코 바이오허브는 감염병·세포생물학 연구를 지원하는 독립 연구소로 출발해, 이후 시카고·뉴욕으로 확장됐다.

감염병 연구에서는 CZI가 개발한 병원체 분석 플랫폼 ‘CZ ID’가 주목받았다. 2019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원인불명 뇌수막염 사례 분석에 쓰이며 기존보다 수주 빨랐고, 이후 코로나19 감시 체계에도 활용됐다. 최근 공개한 AI 모델 ‘GREmLN’은 단일세포 데이터를 학습해 유전자 네트워크 변화를 예측하는 기술로, 기초 연구와 임상의 연결고리를 넓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CZI 전략의 중심에는 오픈사이언스(Open Science)가 있다. 단일세포 분석 플랫폼, 이미지 분석 도구, 감염병 데이터베이스, 교육용 지식 그래프 등 핵심 도구를 오픈 라이선스로 공개하고, 비영리 연구자들에게 고성능 컴퓨팅 자원까지 지원한다. 연구 성과를 공공재로 돌리겠다는 취지다.
◇ LLC가 마주한 신뢰의 장벽과 CZI의 문제풀이법
LLC 모델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지만, 우려도 컸다. 가장 큰 쟁점은 투명성과 민주적 통제다. LLC는 비영리 재단과 달리 공시 의무가 없다. 거대한 자본이 정책·과학·교육 의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도, 그 과정이 대중에게 충분히 공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CZI는 이 비판을 의식해 전통 재단처럼 모든 보조금 지급 내역을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로 공개하고, 지역·연도·프로그램·수혜 기관별 정보와 지원 목적까지 투명하게 제공하고 있다. 데이터베이스에는 정책·옹호(advocacy) 활동을 수행하는 단체에 대한 지원 내역도 포함된다. 형사기록 자동 말소를 추진한 ‘클린 슬레이트’ 등 입법 성과를 낸 캠페인들도 추적할 수 있다.

한편 CZI는 최근 포트폴리오의 무게중심을 과학·AI로 옮기며 형사사법·이민·주택 등 논쟁적 의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있다. 내부 DEI 조직과 인종 정의 보조금을 줄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치적 부담이 큰 영역에서 한발 물러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그럼에도 CZI는 기술·정책·투자·과학을 결합해 정부와 비영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떠안고 문제 해결 속도를 높이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 에머슨 컬렉티브 등이 LLC 모델의 선배 격이라면, CZI는 그 규모와 영향력으로 이 모델을 미국 필란트로피의 새로운 흐름으로 끌어올린 조직으로 평가된다.
세제 혜택을 포기하고 활용 가능한 수단을 극대화하는 LLC 구조는 미국의 자선 생태계에서 점차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거대 자본이 민주적 통제 바깥에서 움직이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빌더 필란트로피’를 표방한 CZI의 실험이 앞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그리고 그 결과가 “모든 세대를 위한 더 평등한 미래”라는 초기 약속과 어떻게 만날지, 그 다음 페이지가 주목되는 이유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