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필란트로피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정부와 시장이 쉽게 나서지 못하는 지점을 겨냥할 수 있는 필란트로피의 가능성은 앞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필란트로피의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그 임팩트까지 자동으로 커질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에 가깝다. 수많은 난제가 사회 전반을 가로막고 있는 지금, 중요한 것은 필란트로피를 통해 흘러 들어가는 재원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필자는 연구를 통해 필란트로피의 임팩트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해 왔다. 실제로 미국의 필란트로피는 지난 세기부터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험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각양각색의 재단들이 축적해 온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시행착오의 경험은, 앞으로 한국 필란트로피의 방향을 가늠할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가 미국의 새로운 필란트로피 흐름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믿다 – 신뢰를 설계하다
‘신뢰’는 최근 미국 필란트로피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미국의 다수 재단은 비영리 조직을 비롯한 파트너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회문제 해결을 도모해 왔다. 전통적으로 재단은 파트너가 제출한 계획을 심사하고, 계획대로 자금이 집행되는지를 관리·감독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임팩트의 현장에 발을 딛고 있는 파트너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장 잘 아는 반면, 이를 지원하는 재단은 그 정보를 온전히 공유받기 어렵다. 이 같은 정보 비대칭은 재단으로 하여금 각종 서류와 절차를 요구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력·시간의 낭비, 즉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은 한정된 필란트로피 자원의 소모로 이어진다. 이는 곧 임팩트의 축소를 의미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미국 필란트로피의 새로운 접근은 직관적이다. 바로 파트너를 신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장에서 임팩트를 극대화할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주체는 파트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을 대표하는 사례가 뮬라고(Mulago) 재단이 주창해 온 ‘신뢰 기반 필란트로피(trust-based philanthropy)’다.
뮬라고 재단은 공개 공모나 형식적인 계획서 심사를 거치지 않는다. 대신 자체 조사와 기존 파트너의 추천을 통해 새로운 파트너를 발굴하고, 자금 지원 결정 전까지 긴밀한 논의를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논의의 초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임팩트를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 임팩트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에 맞춰진다. 일단 임팩트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면, 세부 실행은 파트너에게 맡긴다. 이러한 신뢰 기반 접근은 재단과 파트너 사이의 거래비용을 낮추고, 필란트로피 자원이 보다 큰 임팩트를 향하도록 만든다.
◇ 나누다 – 전문성을 분화하다
필란트로피 재단은 안정성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는 ‘양손잡이 조직(organizational ambidexterity)’이어야 한다. 설립자의 원칙을 지키며 자산을 보전하는 안정성과, 더 큰 임팩트를 위해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혁신성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함께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의 필란트로피는 그동안 안정성에 무게를 둔 운영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돈 쓰는 것이 뭐가 어렵나”라는 세간의 인식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안정성을 넘어 혁신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재단들은 조직원들의 전문성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임팩트는 현장에서 일하는 파트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재단 내부의 조직원 역시 어떤 선택이 더 큰 임팩트로 이어질지를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나아가 이러한 전문성은 제도적으로 분화되어 관리될 필요가 있다.
엑스프라이즈(XPRIZE) 재단은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엑스프라이즈는 조직 내 전문가를 ‘수직적(vertical) 전문가’와 ‘수평적(horizontal) 전문가’로 구분한다. 수직적 전문가는 기후변화, 보건, 교육 등 임팩트 분야별 전문가로, 각 영역에서 무엇이 가장 시급한 문제인지를 식별한다. 반면 수평적 전문가는 이렇게 도출된 문제를 어떻게 측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지원할지를 설계한다.
예컨대 기후변화 분야에서 탄소 배출 감축이 핵심 과제로 설정됐다면, 이를 ‘탄소 1000톤 포집 기술 확보’와 같은 구체적 지표로 전환하는 역할이 수평적 전문가에게 맡겨진다. 전문성을 성격에 따라 나누어 관리하는 이러한 시스템은 혁신적 시도를 포착하는 속도를 높이고, 임팩트의 지속가능성을 강화한다. 이는 그동안 ‘가슴 따뜻한 인재상’ 위주로 뭉뚱그려 조직을 운영해 온 한국 필란트로피에 분명한 시사점을 던진다.
◇ 함께 하다 – 생태계를 키우다
조직 생태계 이론(ecosystem theory)은 임팩트 창출을 위해 조직 간 상호보완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회문제 해결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단일 조직이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조직들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사회 변화가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계 내 조직의 다양성이 전제돼야 한다. 규모와 역할이 다른 조직들이 공존할수록, 각 조직이 만들어내는 재화와 서비스는 상호보완적으로 결합될 가능성이 커진다.
최근 미국 필란트로피에서 나타나는 오버헤드 비용(overhead cost)에 대한 관대함은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조직 운영을 위한 간접비는 흔히 임팩트와 직접 관련이 없는 비용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재단의 오버헤드 지원은,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할 역량은 부족하더라도 임팩트 생태계에 꼭 필요한 소규모 조직들이 생존하도록 돕는다. 실제로 휴렛 재단은 프로젝트별 지원과 별도로, 파트너 조직의 일반 운영을 지원하는 자금을 병행하고 있다. 미국 재단들이 오버헤드 지원에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임팩트는 개별 프로젝트가 아니라, 다양한 조직이 함께 움직이는 생태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전제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란트로피를 논할 때 흔히 던져지는 질문은 “임팩트가 얼마나 되느냐”다. 물론 측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측정 자체에 과도하게 매달릴 때, 더 중요한 질문을 놓치기 쉽다. 특히 임팩트 측정이 개별 프로젝트 단위에 머무를 경우 그렇다. 임팩트는 단순한 결과물(outcome)을 넘어, 궁극적으로 사회 문제가 얼마나 완화됐는지를 묻는 개념이어야 한다. 미국의 새로운 필란트로피 흐름은 더 이상 ‘얼마나’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이 임팩트를 어떻게 하면 더 키울 수 있는가.”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가 이러한 담대한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여정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최정호 University of Pennsylvania 박사과정(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기획취재 펠로우)
필자 소개
현재 University of Pennsylvania 사회정책대학원 박사과정에서 필란트로피와 공공·민간 지원금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기부금과 보조금이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쓰일 때 더 큰 사회적 효과를 내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로 국제 비영리학회 ARNOVA에서 ‘Lester M. Salamon Memorial Award for Promising PhD Proposal’을 수상했으며, 2025년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기획취재 펠로우로 참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