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자에서 주체로, 기업재단 전환의 문 앞에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

변화의 시대, 한국 기업재단의 가능성과 역할을 모색하다 <1>
확장되는 민간 영역, 새 규제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공익재단은 더 이상 정부 복지정책을 보조하는 집행 기관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가 되는 일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이종성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16일 서울 명동 온드림소사이어티에서 열린 ‘Reimagine Philanthropy: 변화의 시대, 새롭게 그리는 기업재단’ 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부 예산만으로는 급증하는 복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전환기에 접어들었다”며 “정치·재정 압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공익재단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12월 16일 서울 명동 온드림소사이어티에서 현대차정몽구재단과 더나은미래가 주최한 ‘Reimagine Philanthropy: 변화의 시대, 새롭게 그리는 기업재단’ 포럼에서는 한국 기업재단의 역할 변화와 과제가 논의됐다. /현대차정몽구재단

이번 포럼은 복지 사각지대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공익재단, 그중에서도 기업이 출연한 공익재단인 기업재단의 역할을 재점검하기 위해 마련됐다. 현대차정몽구재단과 더나은미래가 공동 주최한 이날 행사에서는 기업재단이 왜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로 요구받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가로막는 제도적 한계는 무엇인지가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이 포럼은 양측이 공동으로 추진 중인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열렸다.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는 복합 위기 시대에 한국의 기업재단과 기업가 재단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기 위해 시작된 연구·보도 프로젝트다. 글로벌 주요 재단들의 운영 방식과 전략 변화를 분석하고, 이를 한국의 제도적·사회적 맥락에 비춰 점검하는 것이 목표다. 그간 글로벌 기업재단과 기업가 재단 사례를 중심으로 연구와 심층 보도를 이어왔으며, 이번 포럼은 그 논의를 공개적인 공론장으로 확장하기 위해 마련됐다.

◇ 정부 복지의 한계, 다시 떠오른 공익재단의 역할

이종성 교수는 한국의 정부 주도 사회복지 모델이 구조적 한계에 다다랐다고 진단했다. 그는 “전체 국가 예산 가운데 보건복지부 예산 비중이 18.9%로 가장 크지만, 상당 부분이 개인에게 직접 지급되는 경직된 지출”이라며 “구조 개편이나 제도 혁신에 투자할 여지가 부족해 예산이 늘어도 복지 공백은 쉽게 줄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구 감소에 따른 세수 축소도 주요 변수로 지목됐다. 그는 “인구 감소는 사회정책 전반의 지속 가능성을 흔들 뿐 아니라 지방 소멸을 가속해 민간 사회서비스 영역까지 위협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정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을 민간이 보완해야 하며, 그 중심에 공익재단이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특히 기업이 출연한 공익재단, 즉 기업재단의 역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1인 가구 증가, 고독사처럼 새롭게 부상한 사회문제는 정형화된 제도보다 유연하고 실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민간 필란트로피가 다시 한 번 사회 변화의 전면에 나설 시점”이라며 “사회 혁신을 향한 선의를 제도 안에서 받아낼 수 있는 틀이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안으로는 미국의 기부 인센티브 제도가 제시됐다. 기부자가 재산을 출연한 뒤 세제 혜택을 받고, 자문을 통해 기부금 사용 방향을 정하는 ‘기부자 조언기금(DAF)’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DAF를 활용하면 재단이 단기 집행에 매이지 않고 장기적이고 유연한 자산 운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공익 목적 투자의 필요성도 함께 언급됐다. 사회적 목적을 위해 낮은 수익을 감수하는 프로그램 연계 투자(PRI), 재단의 미션과 맞는 분야에 투자하면서 수익도 추구하는 미션 연계 투자(MRI) 등이 그 예다. 이 교수는 “혜택만 늘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라며 “어떤 안전장치와 투명성 규칙을 전제로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 기업재단의 확장, 제도가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포럼에서는 현행 제도 아래에서 기업재단의 역할 확대가 쉽지 않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장보은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 공익재단, 특히 기업재단을 둘러싼 법제는 공익 활동을 지원하기보다 규제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고 말했다.

기업재단은 공익법인법의 적용을 받는데, 민법상 비영리법인보다 더 촘촘한 규제를 받는다. 설립자가 공익법인을 사적으로 이용하거나 탈법에 활용할 수 있다는 불신이 제도 전반에 깔려 있다는 설명이다.

12월 16일 서울 명동 온드림소사이어티에서 열린 포럼 토론 현장. (왼쪽부터) 좌장을 맡은 신현상 한양대 교수, 이종성 서울대 교수, 서현선 SSIR코리아 편집장, 장보은 한국외대 교수, 최승호 한양대 교수 /현대차정몽구재단

설립 단계부터 제약도 적지 않다. 주무관청 지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주무관청마다 기본재산 출연과 보유 기준도 제각각이다. 재산 운용이나 사업 추진 과정에서도 허가 절차가 반복된다. 목적사업은 기본재산 운용 수익과 기부금으로만 가능해 기존 재산 활용에 제약이 따르고, 이를 바꾸려면 정관 변경이 필요하다. 자산 운용 확대를 위한 부동산 임대나 기부금의 예금·투자 역시 주무관청 허가 대상이다.

반면 재단이 누릴 수 있는 인센티브는 제한적이다. 공익법인법에 따른 추가 세제 혜택은 거의 없고, 규제와 혜택이 연결되지 않아 제도적 유인이 약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 교수는 “사익 편취나 형식적 사회공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분명 존재하지만, 이를 이유로 모든 기업재단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방식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계열사 지배나 세금 회피와 같은 위법 행위에 대해서는 규제와 처벌을 강화하되, 사회적 기대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는 기업재단에는 자율성을 넓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재산 운용이나 사업 활동마다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기보다, 지켜야 할 원칙을 명확히 정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며 “공익성이 인정되는 공익재단에는 세제 혜택에서도 차이를 둬야 한다”고 말했다. 주무관청별 기준을 공개·통일하고, 감독을 맡는 부서의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도 과제로 제시됐다.

그동안 기업재단은 규제의 대상이거나 정부 복지를 보조하는 역할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사회문제가 복잡해질수록, 기업재단을 포함한 공익재단이 감당해야 할 역할의 범위는 넓어지고 있다. 이날 포럼은 그 변화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공익재단이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 어떤 제도적 조건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섰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의 주요 내용은 시리즈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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