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되는 기업재단의 역할, 변화와 협력의 방식을 묻다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

변화의 시대, 한국 기업재단의 가능성과 역할을 모색하다 <2>
게이츠·포드 등 글로벌 재단에서 찾은 전환의 단서

“우리 재단은 어떤 변화를 왜, 그리고 어떻게 만들고자 하는가. 그 변화 속에서 우리의 역할과 한계는 무엇인가.”

이는 한국 기업재단이 이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자, 사회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글로벌 재단들이 공통으로 공유하는 사고방식이다. 재단은 자신들이 만들고자 하는 변화와 그 경로를 설명할 수 있는 ‘변화이론(Theory of Change)’을 갖춰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12일 서울 명동 온드림소사이어티에서 열린 ‘Reimagine Philanthropy: 변화의 시대, 새롭게 그리는 기업재단’ 포럼에선 기업재단의 변화이론과 협력 방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

이 같은 논의는 지난 16일 서울 명동 온드림소사이어티에서 열린 ‘Reimagine Philanthropy: 변화의 시대, 새롭게 그리는 기업재단’ 포럼에서 공유됐다. 현대차 정몽구재단과 더나은미래가 공동 주최한 이번 포럼은 기업재단이 단순한 기부를 넘어, 전략적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나서기 위한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현장에서는 기업재단이 어떤 변화를 목표로 삼고 있으며, 이를 위해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협력할 것인지 분명히 해야 한다는 전환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변화의 출발점은 ‘협력 방식’

서현선 SSIR 코리아 편집장은 글로벌 필란트로피의 흐름 속에서 재단의 역할이 자금 제공자를 넘어 문제를 정의하고 관계를 설계하는 주체로 확장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단기 성과를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을 벌어주고 비전과 자원의 흐름, 학습 구조를 조율하는 ‘시스템 오케스트레이터’로 진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개념으로 제시된 것이 변화이론이다. 서 편집장은 “변화이론은 곧 협력이론”이라며 “재단이 어떤 변화를 상정하느냐에 따라 협력의 깊이와 방식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개별 사업의 성과를 넘어 구조적 변화를 목표로 할수록, 느슨한 연대가 아닌 장기적이고 구조화된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글로벌 재단들의 사례는 변화이론과 협력 방식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보여준다. 게이츠재단은 과학과 확산을 통해 시스템 수준의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가설 아래, 정부와 국제기구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핵심 수단으로 삼아 왔다. 반면 포드재단은 불평등을 권력의 불균형 문제로 정의하며, 재단의 자금 조건과 의사결정 구조 자체를 변화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와 커뮤니티와의 신뢰 기반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 전략이 됐다.

서현선 SSIR 코리아 편집장은 16일 열린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에서 기업재단이 단순한 자금 제공자를 넘어 어떤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지, 그리고 이를 위해 어떤 협력 방식을 설정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

스콜재단은 자신들을 직접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조율하는 재단으로 규정한다. 다양한 사회혁신 주체들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연결하고, 실패와 학습을 공유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집중해 왔다. 서 편집장은 코로나19 이후 이러한 ‘조율자’ 역할이 더욱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과를 확산시키면 시스템이 바뀔 것이라는 기존 접근에서 벗어나, 신뢰와 관계를 바탕으로 자금을 유연하게 쓰고 그 과정에서 생태계의 회복력과 적응력이 살아나는지를 보는 변화이론이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누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 전략은 재해석되고, 실패는 학습이 된다

이지영 현대차 정몽구재단 파트장은 글로벌 재단 사례를 통해 한국 기업재단 전환의 단서를 짚었다. 그는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를 통해 글로벌 재단을 연구했고, 지난 10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해 현지 재단 관계자들을 직접 만났다. 거대한 자본을 보유한 글로벌 재단들이 단순한 지원을 넘어, 사회의 구조적 변화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본 과정이다.

그가 가장 주목한 점은 글로벌 재단들이 설립자의 철학을 그대로 반복하기보다, 핵심 가치는 유지하되 시대 변화에 맞게 재해석하는 역량을 갖췄다는 점이다. 카네기 재단은 초창기 도서관과 대학 설립을 통해 지식 확산에 기여했지만, 현재는 국제 평화와 안보 정책 연구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 파트장은 “설립 초기부터 시대 변화에 따라 이사회가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영역을 지원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구조가 이러한 진화를 가능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이지영 현대차 정몽구재단 파트장은 16일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에서 글로벌 재단 사례를 바탕으로 기업재단이 사회 변화의 역동성에 발맞춰서 유연하게 변화해야 한다고 짚었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

글로벌 재단들은 현장 단체를 단순한 지원 대상이 아니라, 전략과 의사결정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핵심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됐다. CEP(Center for Effective Philanthropy)는 수혜 기관의 피드백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재단에 전달하고, 포드재단과 휴렛재단 등은 이를 바탕으로 전략을 점검하고 운영을 고도화해 왔다.

실패 역시 중요한 학습 자산으로 다뤄진다.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대규모 투자 경험조차 숨기지 않고 공유하며, 이를 통해 전략을 수정해 온 것이 글로벌 재단의 특징이라는 설명이다. 2000년대 초반 게이츠재단의 공교육 개혁 시도,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의 온라인 교육 개혁 사례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실패를 숨기지 않고 학습의 자원으로 축적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임팩트는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인식도 확산하고 있다. 뮬라고재단은 간접비 제한 없는 자금을 지원하고, 복잡한 제안서 대신 장기간의 관계 형성과 현장 검증을 통해 파트너를 선정한다. 휴렛재단 역시 간접비 지원을 제도화했다. 조직과 인력 자체를 성과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자산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파트장은 ‘전통주의자는 전통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현상을 유지한다’는 미국의 대표적인 필란트로피 옹호 활동가 앨런 파이퍼(Alan Pifer)의 말을 인용하며 사회 변화의 역동성에 발맞춰서 재단도 유연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재단 실무자로서 제도적 규제와 제약이 크다는 현실에 공감한다”면서도 “다만 이제는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를 넘어,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의 자선 생태계는 역사와 제도, 구조가 다르다. 미국의 선도적 모델을 그대로 옮겨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다만 글로벌 재단들의 경험은 한국 기업재단이 스스로를 점검할 기준을 제공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변화를 목표로 삼을 것인지, 그리고 그 변화를 위해 누구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를 분명히 설명하는 일이다. 기업재단을 둘러싼 논의는 ‘얼마나 썼는가’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고 있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의 주요 내용은 시리즈 기사로 이어집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댓글 작성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