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서비스의 다음 10년, 민간재단이 여는 새로운 길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이종성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한국의 사회복지제도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정부 주도로 빠르게 확대돼 왔다. 2026년 기준 전체 예산의 약 18.9%가 보건복지부 예산에 투입될 만큼 규모 자체는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이 예산의 상당 부분은 수혜자 개인에게 직접 이전되는 경직성 경비로, 복지를 실제로 떠받치는 인프라 확충이나 조직 역량 강화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재원이 배분되고 있다. 저출생·고령화와 생산가능인구 감소로 세수 기반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현행 구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등 핵심 제도는 이미 재정 적자와 기금 고갈 우려에 직면해 있다. 거칠게 말하면, 지난 50~60년간 쌓아온 한국의 복지 시스템은 이제 수명의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역 현장에서는 이러한 이상 신호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인구 유출이 심화되면서 교육·의료·돌봄 같은 필수 서비스 기관이 줄어들고, 그 결과 다시 인구가 빠져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정치적 압력에 기대는 일회성 사업이나 단기 제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한정된 재원은 구조 개편이나 제도 혁신보다, 관성적으로 유지돼 온 기존 사업의 방어에 우선 배분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제약 속에서 정치·예산 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민간 재단이 새로운 모델을 실험하고 복지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지고 있다. 사회복지법인을 포함한 공익법인은 바로 ‘정부가 하기 어려운 일’을 먼저 시도해 볼 수 있는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 공익·사회복지법인의 현주소와 ‘보조금 의존’의 비용 구조

최근 5년 사이 전체 공익법인 수는 20%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사회복지법인의 증가율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여전히 1960~70년대에 설립된 기관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적 수요를 반영한 혁신적 설립은 드문 편이다. 사회복지법인은 전체 공익법인 가운데 가장 높은 비중인 약 27%를 차지하지만, 수익·지출·자산 규모는 평균에 크게 못 미친다. 이는 소규모·영세 기관이 많고, 유사한 서비스를 반복 제공하는 기관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수입 구조를 들여다보면 문제는 더 분명해진다. 사회복지법인의 전체 수입 가운데 정부 보조금 비중은 약 40%로, 교육법인이나 종교법인 등 다른 공익법인 유형보다 가장 높다. 반면 민간 기부금 비중은 하위권에 머문다. 공공 재원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단기적 안정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규제에 묶여 새로운 수요에 대응하거나 서비스 모델을 유연하게 전환하는 데에는 큰 제약으로 작용한다. 평균 민간 기부금 비중이 20% 수준이라고 해도, 이는 극소수 대형 기관이 끌어올린 수치에 가깝다. 대다수 기관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구조는 국제적으로 ‘비영리 기아 사이클(nonprofit starvation cycle)’이라 불리는 악순환을 낳는다. 정부 보조금은 간접비 사용을 통상 7% 이내로 엄격히 제한한다. 인력 전문성 강화, 데이터·IT 인프라 구축, 공간·시설 개선 등에 예산을 쓰기 어렵다. 감사 대응 비용조차 예산으로 인정받지 못해, 사소한 복사비 지출이 문제 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 결과 기관은 장기적 역량 강화보다 단기 사업 집행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이는 성과 저하와 자원 유입 축소로 이어져 다시 운영비 부족을 심화시키는 구조를 만든다. 여기에 복잡하고 불투명한 회계 구조가 겹치면 외부 기부자의 신뢰와 참여도 자연스럽게 위축된다.

◇ ‘공익 목적 투자’ 논쟁과 제도 개편의 과제

이러한 한계 속에서 일부 대형 사회복지법인은 기존 서비스 제공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답을 찾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소셜벤처나 혁신 조직에 투자할 수 있도록 이른바 ‘공익 목적 투자’를 허용해 달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국회에는 관련 개정안이 제출돼 있으며, 일부 사회복지법인은 임팩트 펀드 출자나 소셜벤처 투자 사례를 제시하며 “직접 시설을 운영하기보다 혁신 주체에 자본을 공급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겠다”는 방향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 목적 달성을 위해 낮은 수익을 감수하는 미국의 PRI(Program-Related Investment)나, 재단의 미션과 부합하면서도 시장 논리를 활용하는 MRI(Mission-Related Investment)에 가까운 접근이다. 출연금을 ‘보존해야 할 돈’이 아니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굴릴 수 있는 자본’으로 보고, 일정 부분을 전략적 자본으로 활용하자는 제안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의 반응은 여전히 신중하다. 투자가 영리 추구로 변질될 가능성, 원금 손실에 따른 안정성 저하, 기업의 우회 지배에 악용될 위험 등이 주요 이유로 제시된다. 공익 목적을 내세운 투자가 재단의 본래 취지와 무관한 영리 활동으로 흐르거나, 자산 손실로 인해 공익 활동 기반 자체가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세제 완화로 국고 수입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도 큰 걸림돌이다.

이 논쟁은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어떤 안전장치와 투명성 규칙을 전제로 허용할 것인지의 문제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미 자산 규모가 큰 일부 공익법인은 투자형 자본 전략을 통해 더 큰 사회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를 일괄적으로 차단하기보다, 공익성과 투명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 설계를 병행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에 가깝다.

◇ 데이터가 보여주는 공익법인의 세 가지 유형

공익법인의 미래를 논의하려면 현실을 먼저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국세청 공시자료와 한국가이드스타 재무 데이터를 활용해 기부금 수입 상위 100개 공익법인을 머신러닝 기반 군집 분석으로 유형화한 결과, 공익법인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자립형’이다. 사업수익 비중이 높아 자립성이 크지만, 그만큼 부채 비중도 상대적으로 높다. 자체 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만큼 재정 구조는 역동적이나, 외부 충격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중요하다.

둘째는 ‘안정형’이다. 인건비와 고정비 중심의 운영 구조를 갖고 있어 효율성은 낮을 수 있으나, 수익과 지출의 변동성이 크지 않아 재정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집단이다. 단기 존속 가능성은 높지만, 새로운 수요에 대응하거나 사업 구조를 전환하는 데에는 민첩성이 떨어질 수 있다.

셋째는 ‘민간 의존 불안정형’이다. 기부금 의존도가 높고 지출 구조가 불안정해 특정 후원처나 기관에 과도하게 매여 있다. 외부 환경 변화에 매우 취약하며, 서비스 유지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이 유형의 기관은 핵심 기능을 남기고 구조를 재편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분석은 공익법인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는 방식이 현실과 맞지 않음을 보여준다. 유형별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규제와 지원은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족쇄가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허점을 남길 수 있다. 데이터 기반의 유형별 제도 설계와 지원 전략이 필요한 이유다.

◇ 제도는 현실을 얼마나 따라가고 있는가

현행 법·제도는 공익법인의 자율성과 혁신을 제약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상속·증여세법의 이른바 ‘5% 룰’은 기업 지분 기부를 지분율 5%까지만 비과세로 인정하고, 이를 초과하는 주식 기부에는 과세를 부과한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재단 자산을 형성할 수 있는 대규모 주식 기부가 구조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설계다.

기부금품법 역시 다양해진 기부 방식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급증한 리워드형 크라우드펀딩은 규제 대상에서 사실상 벗어나 법적 공백 상태에 놓여 있고, 10년 넘게 유지된 ‘1000만 원 이상 모금 시 등록 의무’ 기준도 소액 다수 참여형 디지털 기부 환경과는 맞지 않는다. 법·제도의 경직성이 공익법인의 성장과 시민 참여를 동시에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다양한 기부 인센티브 제도를 통해 민간 자원을 유연하게 활용하고 있다. 미국의 기부자조언기금(DAF)은 기부자가 공익법인 등에 먼저 목돈을 출연해 세제 혜택을 즉시 받되, 이후 지원 대상과 시기를 자문(advice) 형식으로 계속 지정할 수 있게 한 제도다. 영국은 독립 규제기관인 체리티 커미션(Charity Commission)을 통해 공익법인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제도적으로 관리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공익법인 공시자료 전체 리스트조차 특정 업체를 통해 구매해야 하는 등 데이터 접근성마저 제한돼 있다. 한국 공익법인 역시 DAF와 같은 제도를 도입해 장기적·유연한 자산 운용을 가능하게 하고, 영국처럼 독립 규제기관을 통해 신뢰와 투명성을 함께 높이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국세청 공시자료를 포함한 재무 데이터의 공개 범위를 확대하고 접근 방식을 개선하는 것이, 향후 10년 공익법인 생태계를 설계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공익법인은 더 이상 ‘정부 예산의 보조 집행자’로 머무를 수 없다. 각 기관이 처한 현실과 유형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맞는 자율성과 책임, 인센티브와 규제를 다시 설계할 때 비로소 한국의 공익법인은 다음 10년을 준비할 수 있다.

이종성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자문위원)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댓글 작성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