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레거시 재단으로 본 ‘시스템 체인지 필란트로피’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신현상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 임팩트리서치랩 CKO

미국 레거시 재단의 역사는 거대한 부를 어떻게 사회적 자본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대한 실험의 역사다. 동시에 “어떤 사회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오랫동안 붙들고 고민해 온 조직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특히 록펠러와 포드는 산업 자본의 상징이면서, 그 자본을 활용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레거시 재단 설립자들이다. 이들이 택한 ‘돈 쓰는 방식’은 오늘날 한국의 재단들이 참고할 만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 록펠러 재단: 악명 높은 자본에서 ‘과학적 기부’로

록펠러 재단은 카네기, 포드와 함께 미국의 ‘빅3 레거시 재단’으로 꼽힌다. 석유 재벌 존 D. 록펠러는 독점과 노조 탄압으로 ‘악덕 자본가’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동시에 막대한 부를 사회에 환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1909년 재단 설립을 신청했다가 “악행을 자선으로 덮으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 속에 1913년에야 인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재단이 이후 공공성과 자기 성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보여준다.

록펠러 재단은 출범 초기부터 ‘과학적 필란트로피(Scientific Philanthropy)’를 내세웠다. 감정에 의존한 구호가 아니라, 문제의 근본 원인을 큰 스케일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지식 기반 해법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접근이었다. 시카고대 설립(노벨상 수상자 101명 배출), 록펠러 연구소 설립, 소아마비·광견병·황열병 퇴치 기여, 전후 농업과학 투자와 ‘녹색혁명’ 이니셔티브 등이 대표 사례다. “좋은 지식을 만들고 인재를 기르면 구조적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철학이 일관되게 반영돼 있다.

현재 록펠러 재단은 이러한 철학을 ‘시스템 체인지’라는 언어로 재해석하고 있다. 2024년 임팩트 리포트에 따르면 농업과학, 의학, 미국 내 불평등 완화, 촉매 금융(Catalytic Finance)을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특히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10억 달러·5년 규모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미션 연계 투자(MRI), 프로그램 연계 투자(PRI) 등 금융 도구를 활용해 민간 자본을 함께 움직이려 한다.

재단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민간 자본이 더 유연하게 쓰일 때 혁신과 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경과 섹터를 넘는 파트너십을 통해 임팩트 생태계 차원의 해법을 모색하고, 임팩트 측정과 평가를 통해 무엇이 작동했고 무엇이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학습의 언어로 공유한다. 임팩트 리포트는 성과 과시가 아니라, 책임과 성찰, 파트너십 강화를 위한 도구라는 인식이 뚜렷하다.

◇ 포드 재단: ‘사회 정의’를 중심에 둔 장기·비제약 지원

포드 재단은 스스로의 역사를 ‘사회 정의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창업자 헨리 포드는 생산 시스템 혁신과 중산층 형성에 기여했지만, 1927년 나치당 지원이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이러한 역사적 반성과 성찰이 재단으로 하여금 ‘사회 정의(Social Justice)’를 정체성의 중심에 놓게 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포드 재단의 활동 영역은 경제, 교육, 민주주의, 인권, 평화 등 광범위하지만, 한국 재단에 특히 시사적인 것은 ‘BUILD(Building Institutions and Networks)’ 프로그램이다. 2016년 시작된 이 프로그램에서 재단은 “프로젝트가 아니라 조직과 생태계에 투자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5년 단위 장기·비제약 운영자금과 역량 강화 보조금을 지원했다. 1000개가 넘는 기관에 22억 달러 이상을 지원하며, 재정·인사·전략·네트워크를 함께 강화하는 구조를 설계했다.

이 경험을 통해 포드 재단은 몇 가지 결론을 제시한다. 장기·비제약 지원이 조직 안정의 핵심이라는 점, 네트워크 차원의 지원이 단일 기관 지원보다 파급력이 크다는 점, 조직이 튼튼해야 외부 협력도 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평가 역시 지표 중심이 아니라 ‘학습형 평가’를 지향한다. 실행 과정에서의 작동 요인과 장애 요인을 파트너와 함께 분석하고, 전략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데 초점을 둔다.

◇ 두 재단이 보여주는 임팩트 매커니즘의 공통분모

두 재단의 활동은 분야와 방식은 다르지만, 임팩트 매커니즘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뚜렷하다. 첫째, 문제를 구조적 차원에서 정의한다. 전염병, 기후위기, 불평등, 시민권 문제는 일회성 지원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전제가 분명하다. 그래서 제도·정책·문화·자본을 동시에 건드리는 전략을 취한다.

둘째, 지식과 인재, 조직, 파트너십을 핵심 자산으로 본다. 록펠러 재단은 지식 생산과 인재 양성, 크로스섹터 파트너십과 임팩트 금융을 결합하고, 포드 재단은 조직과 네트워크 역량 강화에 집중한다. 지원 대상이 개별 프로젝트가 아니라, 문제 해결을 떠받치는 임팩트 생태계 전체인 셈이다.

셋째, 장기성과 유연성을 중시한다. 두 재단 모두 5년, 10년 단위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파트너가 현장에 맞게 전략을 조정할 수 있도록 재량을 인정한다. ‘빅벳(Big Bet)’은 단순히 큰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신뢰를 베팅해 시스템 변화를 추구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넷째, 실패와 부작용을 학습의 자산으로 삼는다. 록펠러 재단은 지원이 기존 협력 구조를 교란한 경험까지 솔직히 공개하며 겸손과 정직을 파트너십의 원칙으로 제시한다. 포드 재단 역시 BUILD 평가를 통해 “재단과 파트너 기관 간의 신뢰가 있어야 전략 공유와 공동 학습이 가능하며, 이것이 변화 촉진의 핵심이다”라는 결론을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전략을 수정한다.

마지막으로, 두 재단 모두 임팩트 리포트를 자기 성찰의 도구로 활용한다. 철학과 전략, 실행과 평가를 하나의 서사로 엮고, 성과뿐 아니라 시행착오와 한계까지 드러내며 다음 변화를 약속한다. 이는 파트너십 신뢰를 쌓는 핵심 장치다.

◇ 한국 민간 재단에 던지는 질문

한국 민간 재단의 자원 규모는 이들과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원이 작다고 역할까지 작아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선택과 집중이 중요해진다. 레거시 재단의 경험은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재단의 철학은 얼마나 명확하게 언어화돼 있는가. ‘사회공헌’이나 ‘ESG’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넘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인지, 어떤 사회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고자 하는지 명확한 비전과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둘째, 개별 사업 나열을 넘어 2~3개의 미래 주도형 어젠다를 중심으로 장기 포트폴리오를 설계하고 있는가다. 한국 재단들은 자원이 한정된 만큼 더욱 뾰족한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셋째, 파트너 기관을 단순한 수행 주체가 아니라 문제를 함께 정의하고 해법을 함께 찾아 나가는 ‘공동 설계자’로 대하고 있는가다. 미국 레거시 재단의 장기·비제약 지원, 조직 역량 강화, 네트워크 차원의 지원 등은 모두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향후 한국 재단들도 이러한 관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임팩트 측정과 평가가 성과의 증명이나 과시를 넘어, 재단 내부와 파트너가 함께 학습할 수 있는 지식 창출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다. 실패와 시행착오, 한계를 숨기지 않고 공유할 때, 재단의 신뢰와 전략적 평판이 동시에 쌓일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역사와 제도, 사회적 인식이 다르지만, 록펠러와 포드 재단이 수십 년간 축적해 온 ‘돈을 잘 쓰는 노하우’은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우리는 해당 문제 해결을 위한 지식과 인재, 조직을 어떻게 생태계 내에 축적할 것인가. 이를 위해 우리의 자원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각자의 답을 찾는 과정이 한국 재단들이 걸어갈 여정에서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신현상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 임팩트리서치랩 CKO(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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