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대, 한국 기업재단의 가능성과 역할을 모색하다 <3>
대중 인식으로 본 기업재단의 역할 확대의 조건은
한국 기업재단은 아직 대중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단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응답이 적지 않았고, 역할 역시 사회문제 해결보다는 기업 이미지 개선이나 홍보 전략의 연장선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뚜렷했다. <더나은미래>가 공익 싱크탱크 그룹 ‘더미래솔루션랩’과 함께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프로에 의뢰해 지난 12월 8일부터 10일까지 전국 성인 12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기업재단 인식 조사’ 결과다. 이 조사 결과는 지난 16일 서울 명동 온드림소사이어티에서 현대차 정몽구 재단과 더나은미래가 공동 주최한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에서 공개됐다.
◇ “아는 재단이 없다”…낮은 인지도, 회의적인 이미지
조사 결과, 자산 규모 기준 상위 10개 기업(가)재단(아산사회복지재단·삼성생명공익재단·삼성문화재단·현대차정몽구재단·아산나눔재단·농협재단·삼성복지재단·롯데장학재단·호반문화재단·DB김준기문화재단)의 인지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8%는 “아는 재단이 없다”고 답했다. 단순한 인지도 부족을 넘어, 기업재단이 어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 자체가 낮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재단이 주요 사회문제 해결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100점 만점으로 물은 결과, 평균 점수는 49.5점에 그쳤다.
기업재단의 활동에 대한 인지도 역시 높지 않았다. “한국 주요 기업재단의 활동 가운데 들어본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학생 장학 지원(44.2%) ▲미술관·예술 지원(36.0%) ▲연구·학술 인프라 및 도서관 운영(35.7%) 순으로 응답이 나왔지만, 응답자의 29.1%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기업재단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서는 회의적인 인식이 과반을 차지했다. ‘기업 이미지 개선이나 홍보를 위한 전략의 일부’라는 응답이 30.9%로 가장 많았고, ‘기부·장학·복지 등 공익활동을 지원하는 곳’이라는 응답은 30%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세제 혜택이나 자산 승계를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도 24.1%에 달했다. 반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전문적·전략적 기관’이라는 응답은 15%로 가장 낮았다.
◇ 방어적 태도 vs 엄격한 규제, 한국 기업재단은 왜 멈춰 있나
글로벌 재단들은 보건, 과학기술, 기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 변화를 목표로 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게이츠 재단은 국제기구와 협력해 백신 가격 인하를 추진했고, 엑스프라이즈 재단은 상금 공모 방식을 통해 민간 우주 탐사나 온실가스 포집 등 사회 혁신을 실험하는 장을 만들어왔다. 이러한 사례들은 한국 기업재단과 비교해 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여러 방식의 시도가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글로벌 재단의 활동은 대중에게도 일정 부분 알려져 있었다. 응답자의 35.5%는 게이츠 재단의 백신 관련 활동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카네기 재단의 공공도서관 확산·사회 연구 지원(27.1%), 록펠러 재단의 국제보건·농업 연구 지원(26.4%)도 인지도 상위권에 올랐다.

그렇다면 대중은 한국 기업재단이 글로벌 재단과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가장 많은 응답은 ‘재벌 이미지 세탁 등 사회적 역풍을 우려해서’로 27.9%였다. ‘장기적인 비전과 의지가 부족해서’라는 응답도 24.6%에 달했다. 이는 대중이 한국 기업재단을 적극적인 사회문제 해결 주체라기보다, 비판을 의식해 방어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재단 내부의 인식은 달랐다. 지난 16일 열린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포럼’에서 재단 관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간이 설문조사에서는 기업재단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로 ▲관련 법·제도 규제가 지나치게 엄격해서 ▲전문 인력과 재원 등 역량이 부족해서가 가장 많이 꼽혔다. 태도의 문제라기보다, 제도와 환경의 문제로 보고 있는 셈이다.
◇ ‘내러티브의 공백’, 설명하지 않으면 오해가 쌓인다
이 같은 인식의 간극에 대해 김경하 더나은미래 편집국장은 이를 ‘내러티브의 공백’으로 설명했다. 그는 포럼에서 “기업재단에 대해 대중이 공유할 수 있는 서사가 거의 없다”며 “재단이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으면 외부의 비판적 해석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고 말했다.

김 편집국장은 “대중은 단순한 성과 나열보다 자금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어떤 기준과 논의를 거쳐 의사결정이 이뤄졌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며 “성공 사례뿐 아니라 실패와 그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까지 공유할 때 비로소 진정성이 전달된다”고 짚었다.
설문조사 결과는 이러한 요구를 뒷받침한다. 응답자의 57%는 기업재단이 단순한 기부를 넘어 새로운 사회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답했다. 기업재단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자율성을 확대해도 된다는 응답은 55%였다. 사회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으로 투자할 경우 주식 보유 제한 등 규제 완화에 동의하겠다는 응답은 43.5%로 나타났다. 여기에 ‘보통(보류)’ 응답까지 포함하면 86.2%에 이른다.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기업재단의 역할 확대를 전제로 한 제도 변화에 대해 대중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편집국장은 “대중은 한국의 기업재단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재단 스스로가 보다 유연하고 예방적인 사회문제 해결자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그 과정과 판단을 사회에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자금 흐름과 의사결정 기준, 실패에 대한 공개와 함께 언론을 공익 소통의 협력자로 활용하는 전략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