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5> 엑스프라이즈 재단
정부·대기업이 풀지 못한 난제를 ‘인센티브 경연’으로 공론장에 올리다
경쟁의 문법으로 사회혁신을 끌어내는 엑스프라이즈의 실험
공모전 하나가 민간 우주기업의 등장을 재촉하고 성장의 불씨를 당겼다. 엑스프라이즈(XPRIZE) 재단이 주최한 ‘안사리 XPRIZE’다. 1996년 1000만 달러(한화 약 147억원) 상금을 걸고 시작된 이 대회는 전 세계 팀을 향해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정부 지원 없이 민간 자금만으로’, 그리고 ‘재사용 가능한 유인 우주선으로 두 차례 우주 비행을 수행하라’는 것이었다. 상업적 우주비행 시장의 가능성이 현실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이었다.

◇ 경쟁에 모이는 아이디어가 혁신을 만든다
인류를 위한 혁신을 촉진하는 엑스프라이즈(XPRIZE)의 접근법은 독특하다. 유망한 인재를 선별해 자금을 지원하는 전통적 방식 대신, 인재들이 스스로 몰려와 경쟁할 수 있는 ‘인센티브 공모전’을 설계한다. 안사리 XPRIZE처럼 불가능해 보일 만큼 과감한 목표를 제시하고, 그 위에 거액의 상금을 얹는 구조다. 엑스프라이즈의 논리는 분명하다. 인센티브 경연대회는 전 세계 혁신가에게 독창성을 발휘할 무대를 제공하고, 대담한 아이디어가 지닌 위험을 분산하며, 무엇보다 ‘측정 가능한 결과’를 남길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엑스프라이즈 재단은 1994년 미국에서 공식 출범했다. 창업자는 그리스계 미국인 공학자이자 의사인 피터 디아만디스(Peter H. Diamandis)다. 흥미로운 점은 출범 당시 디아만디스에게는 상금으로 줄 1000만 달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거부(巨富)가 막대한 사재를 출연해 설립하는 일반적인 ‘사적 재단(Private Foundation)’과 달리, 엑스프라이즈는 아이디어 하나로 외부 후원자를 찾아 나서는 ‘공익 자선단체(Public Charity)’의 길을 택했다.
그는 “우주여행을 민간이 주도하던 시대로 돌려놓겠다”는 비전 하나로 대회를 먼저 발표했고, 이후 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5년 넘게 150여 명의 부호를 찾아다녔다. 그가 참고한 모델은 20세기 초 대서양 횡단 경쟁이었다. 1919년 뉴욕의 사업가 레몽 오르테이그는 파리와 뉴욕을 무착륙으로 횡단하는 조종사에게 2만5000달러의 상금을 내걸었다.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지만, 이 상금은 9개 팀의 경쟁을 불렀고 비행기 개발에 상금의 16배가 넘는 약 40만달러의 투자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1927년, 찰스 린드버그가 마침내 대서양을 건넜다.
피터 디아만디스는 이 역사를 현대에 되살려냈다. 그는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직후 18개월 사이, 미국 항공 여객 수는 30배, 항공기 대수는 4배나 급증했다”고 강조한다. 디아만디스가 오르테이그 상(Orteig Prize)에서 영감을 받아 엑스프라이즈를 설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나 대기업의 전통적 R&D 투자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난제를 ‘경쟁’이라는 도구로 공론장에 올리고, 그 과정에서 민간 자본과 기술개발을 끌어들여 관련 산업 전체의 성장을 촉발하겠다는 구상이다.

실제 안사리 XPRIZE의 후속 효과는 뚜렷했다. 2004년 ‘스페이스십원(SpaceShipOne)’을 개발한 우승팀 모하비 에어로스페이스 벤처스는 기술을 버진 갤럭틱(Virgin Galactic)에 이전했고, 버진 갤럭틱은 이를 기반으로 2023년 첫 상업용 준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민간도 우주 비행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증해 보인 셈이다. 파급 효과도 컸다. XPRIZE에 따르면 참가팀들은 경연 준비 과정에서 1억 달러(약 1470억원)가 넘는 연구개발비를 투입했고, 이후 민간 우주 산업은 4960억 달러(약 730조원) 규모로 성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흐름은 스페이스X(SpaceX)와 블루 오리진(Blue Origin) 등 민간 우주 기업들의 실험과 투자에도 불씨를 당겼다.
엑스프라이즈는 첫 경연인 안사리 XPRIZE의 성공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30개의 경연대회를 열었다. 173개국에서 3만5000명 이상의 혁신가가 참여했다. 총 5억1900만달러(약 7640억원)의 상금으로 약 310억달러 규모의 경제·사회적 가치가 측정 가능하게 창출됐다고 재단은 설명한다. 상금 1달러당 60달러의 임팩트가 만들어졌다는 계산이다. 이 과정에서 5800만 시간에 달하는 연구개발(R&D)이 수행됐고, 9745건의 특허와 2만여 개의 일자리가 파생됐다.
◇ 과감한 주제, 과감한 지원
현재 엑스프라이즈는 ▲딥테크·탐험 ▲기후·에너지·자연 ▲음식·물·폐기물 ▲생태계 ▲건강 ▲교육·사회 등 6개 카테고리로 경쟁 분야를 나누고 있다. 대회 주제는 시대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로나19 시기다. 2020~2021년 단 2년 사이에만 세 개의 XPRIZE가 새로 출범했다. 각각 ▲COVID-19 확산 급증을 예측하고 타깃 개입을 권고할 수 있는 AI 시스템 개발 ▲저렴하고 사용하기 쉬운 COVID-19 검사 개발 ▲효과적이면서 착용감 좋은 마스크 재발명 등이었다. 이 가운데 총상금 600만달러 규모로 가장 컸던 코로나 검사 XPRIZE를 통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1000만건이 넘는 저렴한 COVID-19 테스트가 보급됐고, 관련 특허만 1400여 건이 나왔다고 재단은 설명한다.

기후변화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전 지구적 과제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론 머스크와 머스크재단은 총 1억달러를 출연해 ‘탄소 제거 XPRIZE’를 후원했다. 공기나 바다에서 매년 최소 1000톤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직접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을 실증하고 이를 2050년까지 기가톤 규모로 확장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2021년 시작된 이 대회는 올해 4월 최종 수상팀을 발표했다. 1위팀 ‘마티 카본(Mati Carbon)’은 잘게 간 암석가루를 농지에 살포해 CO₂와 화학 반응을 일으켜 장기간 저장하는 ‘암석 풍화(rock weathering)’ 기반 탄소 제거 기술을 제안했다. 이 대회를 통해 2024년 한 해에만 약 80만톤의 CO₂를 제거한 것으로 추산된다.

엑스프라이즈의 핵심이 ‘경쟁’이듯, 주제 선정 역시 경쟁을 통해 이뤄진다. 내부 전문가와 외부 자문단이 함께 기후, 건강,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이디어를 모아 후보군을 만든다. 이후 별도 심사 과정을 거쳐 최종 후보를 추린다. 혁신가 유입 가능성, 대중 이해도, 정책 파급력, 비즈니스 모델의 지속 가능성 등 명확한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것이 원칙이다. 엑스프라이즈는 특히 ‘혁신·기업가정신·자본 촉진’이 만나는 지점을 분명한 목표로 삼는다. 경쟁과 자본의 유입이 기하급수적 변화를 촉발할 수 있는 주제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주제가 정해지면 다음 단계는 기금 제공자(funder)를 확보하는 일이다. 현재 엑스프라이즈가 준비 중인 산호 생태계 재생·회복력 XPRIZE는 총 3000만달러(약 440억원) 모금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난소 상태를 정밀하게 읽어 변화를 예측하고 건강 문제를 조기에 발견하는 기술을 겨냥한 ‘난소 디코더(Ovary Decoders)’ XPRIZE 역시 개발 단계에서 주요 기부자를 찾고 있다. 실제 사례를 보면, 아랍에미리트(UAE) 정부가 주도해 출범한 ‘모하메드 빈 자이드 물 이니셔티브(MBZWI)’는 해수 담수화 시스템 XPRIZE에 1억5000만달러(약 2200억원)를 후원했다. 인류 전체와 자국에 동시에 필요한 문제를 골라 후원한 셈이다. 글로벌 IT기업 IBM도 과거 인공지능(AI) 활용 XPRIZE를 지원한 바 있다.

다만 이런 방식이 언제나 ‘선한 자본’으로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걸프 산유국이나 대형 에너지 기업이 거액의 상금을 후원하면서, 자국의 화석연료 의존 구조는 그대로 둔 채 ‘혁신’ 이미지를 덧입히는 것 아니냐는 그린워싱 우려도 제기된다. 교육·보건 분야에서도 태블릿 보급, AI 솔루션 같은 기술 대회에 자원이 몰리면서, 교사 양성·공공 시스템 개선 등 근본적인 투자 의제가 뒤로 밀린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문제 제기를 의식해 엑스프라이즈는 최근 대회 설계 단계에서 시민사회·현장 전문가 참여를 넓히고, 대회 이후에는 정책·윤리 논의를 병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 실패 또한 의미있는 발자국
엑스프라이즈의 모든 대회가 화려한 결말을 맺는 것은 아니다. 약 15%의 XPRIZE는 끝내 수상자를 내지 못한 채 종료된다. 목표 기준을 극단적으로 높게 설정하다 보니 누구도 미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총상금 3000만달러를 걸고 진행된 ‘구글 루나 XPRIZE’가 대표적이다. 로봇 우주선을 달에 착륙시키고 500m를 이동한 뒤, 고화질 영상을 지구로 전송해야 하는 임무였다. 국가 우주기관 수준의 기술과 자금이 필요했던 과제인 만큼, 민간과 대학 연구팀이 완주하기에는 문턱이 너무 높았다. 결국 수상자 없이 막을 내렸다.
그럼에도 엑스프라이즈는 이런 대회조차 생태계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다고 본다. 구글 루나 XPRIZE 과정에서만 4억2000만달러(한화 약 6200억원)가 넘는 민간 투자가 유입됐고, 경연 이후 팀들은 3억달러가 넘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계약을 따냈다. 새로운 우주 기술을 상업화한 50여개 스핀오프 기업도 탄생했다. 수상자는 없었지만, 대회가 민간 달 탐사의 길을 개척하는 ‘튜닝 포크’ 역할을 한 셈이다. 2024년 인튜이티브 머신즈(Intuitive Machines)의 달 착륙선 ‘오디세우스(Odysseus)’가 미국 최초이자 민간 최초의 달 착륙선이 된 것 역시 이 축적된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엑스프라이즈에게 상금과 우승은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혁신을 촉발하는 과정에 가깝다.

이는 참가팀 입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엑스프라이즈는 우승을 하지 못해도 ‘참여할 이유’가 충분한 게임이다. 무엇보다 혁신적 시장에서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자리 잡을 기회가 열린다는 점이 크다. 안사리 XPRIZE를 계기로 스페이스십원 기술이 버진 갤럭틱으로 이어진 사례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대회 참가만으로도 글로벌 미디어 노출이 뒤따르면서 스타트업과 연구팀에는 강력한 브랜딩 효과와 투자 유치 기회가 생긴다. 심사·멘토링 과정, 국제 컨퍼런스를 통한 네트워킹, 벤처캐피털(VC)·정부·기업과의 기술 검증 및 후속 투자 연결도 큰 자산이다.
엑스프라이즈도 이런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반을 깔고 있다. 대회 기간에는 파트너 기업들과 함께 참가팀이 필요로 하는 기술 지원, 멘토링, 자금 연결 기회를 제공한다. 대회 종료 후에는 ‘알럼나이 네트워크(Alumni Network)’를 통해 투자 유치와 사업 확장을 돕는 교육 프로그램을 열고, 국제 행사에서 발표·교류할 무대를 꾸준히 마련한다. 뉴욕·샌프란시스코 등 글로벌 혁신 거점을 중심으로 후속 미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해 팀들이 실제 시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도 중요한 역할이다.

“문제를 이해하고 무엇을 해결해야 하는지 알게 되면, 그 다음 해법을 찾는 일은 더 쉬워집니다.”
2019년 린드버그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아누셰 안사리(Anousheh Ansari) 엑스프라이즈 대표가 한 말이다. 2018년부터 재단을 이끌고 있는 그는 ‘문제 정의’에 방점을 찍는다. 엑스프라이즈는 바로 이 철학 위에서, 누구나 과감한 도전에 뛰어들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그 도전이 실제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프라이즈를 설계한다. 수상 여부와 상금을 넘어, 더 많은 이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향해 움직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엑스프라이즈가 말하는 도전 정신의 핵심이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