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베이 창업자는 ‘빅테크’를 견제하는 데 자기 돈을 쓸까

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9> 오미디야르 네트워크
비영리·LLC를 동시에 활용한 ‘듀얼 체크북’ 모델의 원조
AI·플랫폼 독점·자본주의 규칙을 다시 설계하는 실험실

“사람은 태어날 때 비슷한 능력을 갖지만, 기회는 평등하지 않다.”

IT로 부(富)를 쌓은 기업가가 다시 디지털 기술의 형평성과 접근성을 위해 돈을 쏟아붓고 있다. 온라인 경매 플랫폼 이베이(eBay)를 창업해 31세에 억만장자가 된 피에르 오미디야르(Pierre Omidyar) 이야기다. 그는 기술이 사람들을 연결하고 신뢰를 만들 수 있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2004년 아내 팸 오미디야르(Pam Omidyar)와 함께 ‘오미디야르 네트워크(Omidyar Network·ON)’를 세웠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하다”는 믿음 아래, 잘 설계된 시장과 디지털 플랫폼이 개인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 실험이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의 목표는 명확하다. 디지털 혁신의 과실이 극소수 빅테크 기업으로 집중되는 구조를 깨고, 기술 발전이 더 많은 시민에게 돌아가도록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가 택한 방식은 자선(Grant)과 투자(Investment)를 병행하는 ‘투 트랙’ 전략이다. 공익단체에는 보조금을 주고,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에는 직접 자본을 넣는다. 전통적 자선과 벤처캐피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 우리는 하이브리드 재단…“단일한 수단이 아니라, 전체 도구 상자를 쥔다”

이베이가 이커머스라는 새 시장을 열었다면,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실리콘밸리 필란트로피의 새 문법을 열었다. 하나의 이름 아래 비영리 재단(Foundation)과 유한책임회사(이하 LLC)를 나란히 둔 ‘하이브리드 재단’ 구조를 도입한 것이다. 이후 마크 저커버그의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CZI)’나 로렌 파월 잡스의 ‘에머슨 컬렉티브(Emerson Collective)’가 잇달아 이 모델을 벤치마킹했다. 

배경에는 전통적 재단 모델에 대한 불만이 있다. 미국 세법상 비영리 재단은 출연금에 대한 세제 혜택을 받는 대신, 영리 기업에 대한 지분 투자나 선거·입법을 겨냥한 정치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다루려면 정책과 시장, 여론을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데, 정작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이 ‘보조금 지급’으로 사실상 한정되는 구조다. 오미디야르는 “한 손이 묶인 채 싸우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비영리 재단과 LLC를 함께 운영하는 ‘듀얼 체크북’ 구조로, 보조금 지원과 투자·정책 캠페인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 홈페이지 갈무리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여기서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다. 세제 혜택을 포기하는 대신, 사회 변화를 위해 쓸 수 있는 도구상자 전체를 쥐기로 한 것이다. 재단과 LLC, 이른바 ‘두 개의 수표책(Dual Checkbook)’을 동시에 들고 다니는 방식이다. 비영리 재단은 학술 연구, 시민단체 활동, 회의·네트워크 구축 등 공익 활동에 보조금을 쏜다. 2023년 한 해에만 약 2930만달러(약 431억원)를 이 주머니에서 집행했다. 기부금에 대해 세액 공제를 받는 대신, 정치 활동에는 엄격한 제한을 감수한다.

반면 LLC는 전혀 다른 규칙으로 움직인다. 이 주머니에서는 세제 혜택을 포기하는 대신 영리 스타트업에 지분 투자도 하고, 필요하면 정책 캠페인과 입법 과정을 지원한다. 미국 세법상 ‘정책·입법 변화를 목표로 활동하는 시민단체(501(c)(4) 유형)’에 자금을 대거나, 로비를 전담하는 조직에 지원금을 집행할 수도 있다. 세금을 낸 뒤 남는 투자 수익은 다시 사회 공헌 활동에 재투자되는 구조다. 누적 수익형 투자액만 7억3900만달러(약 1조870억원)를 넘는다.

이처럼 자선과 투자, 정책 옹호를 한 번에 엮어 쓰는 방식은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가 “혁신적 기업가 정신으로 기부에 접근한다”고 평가한 대목이기도 하다. 성장 잠재력이 큰 테크 스타트업과 공익 단체를 함께 발굴해 ‘벤처 자본식’으로 성과를 내는 전략이 실리콘밸리식 필란트로피의 원형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동시에 법적 공시 의무가 상대적으로 약한 LLC 구조 탓에, 투명성과 민주적 통제 측면에서 긴장을 키운다는 비판도 뒤따른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가 보조금·투자 목록을 자체 웹사이트에 공개하고 외부 평가를 받는 등 자발적 공개를 확대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재단의 선택에 의존하는 수준이라는 한계는 있다.

◇ 디지털 생태계를 통째로 겨냥하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설립 이후 자신들의 비전을 공유하는 이니셔티브에 총 19억4000만달러(약 2조8600억원) 이상을 투입해왔다. 돈이 흘러 들어가는 곳을 따라가 보면, 이들의 관심사도 드러난다. 디지털 생태계를 구성하는 ‘문화·거버넌스·시장’ 세 축을 묶어 움직이는 구조다.

먼 기술 문화를 바꾸는 작업이다. 오미디야르는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어떤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품고 기술을 설계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술을 ‘만능 해법’으로 떠받드는 담론에 균열을 내고, 사회적 약자·소수자의 목소리를 기술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예술가와 스토리텔러, 다양한 배경의 혁신가를 지원한다. 기술을 찬양하는 홍보물이 아니라, 기술의 명암을 동시에 드러내는 전략이다.

디지털 거버넌스 영역에서는 빅테크의 독주를 견제하는 데 집중한다. 대표 파트너 가운데 하나가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어떻게 불평등과 권력 집중을 심화시키는지 연구하는 ‘AI 나우 연구소(AI Now Institute)’다. 이곳은 알고리즘이 채용·신용평가·치안 등에서 어떤 차별을 만들어내는지 추적하고, 이를 규제할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지원해왔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설립 이후 비전을 공유하는 이니셔티브에 19억 4000만달러 이상을 투입해왔다. AI 이미지 무단 활용에 대응해 패션 모델의 권리를 지키는 ‘모델 얼라이언스’도 지원 단체 중 하나다. /모델얼라이언스

디지털 ‘시장’ 영역에서는 규칙을 바꾸는 실험을 지원한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착한 기술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벤처캐피털과 투자자 네트워크를 움직인다. 기술 기업의 입점 확대로 지역 부동산 시장과 노동 환경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역사회와 연대해 주거·노동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테크이쿼티(TechEquity)’나, AI가 생성한 이미지를 무단으로 활용하는 플랫폼에 맞서 패션 모델의 권리를 지키는 ‘모델 얼라이언스(Model Alliance)’도 투자 대상이다. 기술이 노동자를 감시하고 대체하는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하는 장치가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챗GPT의 경쟁자로 떠오른 ‘앤트로픽(Anthropic)’에 직접 주주로 들어갔다. 단순히 성장 기업에 투자해 수익을 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기업의 주주로서 이사회 구성, 안전성 기준, 위험 공개 절차 등 핵심 거버넌스에 목소리를 내기 위함이다. 기술 규제를 ‘밖에서 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본의 논리를 활용해 ‘안에서부터’ 바꾸겠다는 전략이다.

◇ “마이크로파이낸스에서 자본주의 재구상으로”…전략의 진화

오미디야르 네트워크의 전략은 지난 20년 동안 세 차례 큰 전환을 거쳤다. 1기(2000년대 중반)는 마이크로파이낸스와 핀테크를 앞세운 ‘접근성(Access)’의 시기였다. 터프츠대에 1억달러를 기부해 ‘오미디야르–터프츠 마이크로파이낸스 펀드’를 만들고, 인도 SKS 마이크로파이낸스 등 여러 기관에 투자하면서 “자본에 대한 접근을 넓히면 빈곤을 줄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SKS가 상장 이후 과도한 채권 추심과 채무자 자살 사태로 논란을 빚으면서, 상업화된 임팩트 투자가 취약계층을 오히려 압박할 수 있다는 한계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단순히 ‘시장 접근’을 넓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소비자 보호와 규제, 권력 균형까지 함께 설계돼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2기(2010년대 중반까지)는 ‘섹터 구축(Sector building)’과 임팩트 투자 생태계 조성이 중심이 됐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글로벌 임팩트 투자 네트워크(GIIN) 설립을 지원하고, 고성장 사회적 기업가를 키우는 엔데버(Endeavor) 등과 손잡으며 임팩트 투자를 하나의 자산군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이 시기까지의 키워드는 여전히 “시장의 힘을 활용한다(Harness market forces)”에 가까웠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 이후 전략을 개별 프로젝트 단위에서 전환해 시장 규칙 설계와 권력 재분배에 집중하며 자본주의 재구상과 책임 있는 기술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

하지만 2016년 브렉시트·미국 대선·소셜미디어의 민주주의 훼손 논란 이후 전략은 다시 급선회했다. 관심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시장 규칙 자체로 옮겨갔다. 지금의 전략 축인 ‘자본주의 재구상(Reimagining Capitalism)’과 ‘책임 있는 기술(Responsible Technology)’이 이 시기에 등장했다. 노동법·반독점·세제·디지털 권리 등 사회 구조 전반을 다시 설계하는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 규제의 최전선에서 목소리 내는 억만장자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지금 기술 규제의 최전선에서 직접 목소리를 내는 ‘행위자’다. 올해 뉴욕주에서는 AI 기업이 위험 진단과 안전 계획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RAISE 법안’을 지지했고, 법안은 지난 6월 주 의회를 통과했다. 마이크 쿠브잔스키(Mike Kubzansky) 오미디야르 네트워크 CEO는 “안전 계획 없는 AI는 안전벨트 없는 자동차와 같다”고 말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뉴욕 RAISE 법안을 공개 지지하며 AI 기업에 안전 계획 마련을 요구했다. RAISE 법안은 2025년 6월 뉴욕주 의회를 통과했다. /ALIGN

본거지인 캘리포니아에서는 더 직접적이다. 데이터 프라이버시·반독점·노동 기준 등을 묶은 17개 AI 법안을 한꺼번에 지지했고, 이 가운데 9개 법안이 실제 법제화됐다. 시민단체·연구기관과 연합을 꾸려 공청회·캠페인·광고까지 지원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거대 기술 기업의 권력 집중을 견제하고, 공정한 경쟁과 안전한 기술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AI 접근성과 이용자 보호에 집중하고 있다. /오미디야르 네트워크 홈페이지 갈무리

지금 오미디야르 네트워크가 겨냥한 목표는 명확하다. 거대 기술 기업의 권력 집중을 막고, AI·디지털 인프라 접근성을 넓혀 기술이 소수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차단하는 일. 공공 연구·공공 인프라에 투자해 안전한 기술 생태계를 만들고, 편향·차별로부터 이용자를 보호하며, AI가 노동자를 감시·대체하는 흐름에도 제동을 거는 일이다.

유럽이 강력한 규제로 기술 권력을 견제하고 있다면, 오미디야르 네트워크는 기술 권력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제도 변화를 끌어내는 데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기술로 부를 쌓은 억만장자가 이제는 그 기술이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되지 않도록, 새로운 ‘사회적 안전벨트’를 설계하고 있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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