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못 하는 일을 먼저 한다…‘촉매자본’의 원형, 게이츠 재단

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8> 게이츠 재단
고위험 영역에 먼저 들어가 국제기구·정부 자본을 끌어낸 촉매적 필란트로피
질병에서 교육, 기후에서 성평등까지…지구적 난제에 속도를 내다

“부자로 죽지 않겠다.” 

마이크로소프트(MS) 공동 창업자 빌 게이츠가 2025년 5월, 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사실상 ‘유언장’에 가까운 기한을 못 박았다. 앞으로 20년 동안 자신이 가진 재산 약 2000억달러(약 294조원)를 모두 사회에 내놓고, 2045년 게이츠 재단을 문 닫겠다는 선언이다. 설립 25주년을 맞은 세계 최대 민간 자선재단이 ‘영속(永續)’ 대신 ‘유한(有限)’을 택하면서, 공익재단의 존재 이유와 방식 자체를 다시 묻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단의 뿌리는 한 편의 기사에서 시작됐다. 선진국에선 사라진 설사·폐렴 같은 질병으로 저개발국 아이들이 매년 수백만 명씩 죽어간다는 보도였다.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All lives have equal value)”는 문장을 미션으로 박은 부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자신이 보유한 마이크로소프트(MS) 주식을 내놓기 시작했다. 

1999년 마이크로소프트 주식 약 160억달러(약 23조6200억원), 2000년 51억달러(약 7조5300억원)를 잇달아 내놓으면서 ‘윌리엄 H. 게이츠 재단’과 ‘게이츠 도서관 재단’을 통합해 2000년 지금의 게이츠 재단을 출범시켰다. 출범 초기 재단 예산의 절반 가까이는 글로벌 보건에, 나머지는 미국 내 교육 불평등 해소와 정보 접근성 개선에 배분됐다. 처음부터 단기 구호가 아닌 ‘구조를 바꾸는 자선’을 표방했다.

◇ 백신값 70달러에서 3.5달러로…‘촉매적 자선’의 실험장

게이츠 재단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키운 배경에는 실험적 접근과 파트너십이 있다. 대표 사례가 2000년 출범한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이다. 재단은 세계보건기구(WHO), 유니세프(UNICEF), 세계은행 등과 손잡고 개발도상국의 백신 접종률을 끌어올리는 데 7억5000만달러(약 1조1100억원)를 초기 자금으로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도입한 것이 ‘선구매 보장(AMC·Advance Market Commitment)’ 방식이다. 국제기구가 일정 물량을 미리 사주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제약사는 백신 가격을 낮추는 구조다. 이를 통해 한때 1회 접종에 70달러(약 10만 원)에 달하던 백신 가격은 3.5달러(약 5000원) 수준까지 떨어졌다. GAVI를 통해 2020년까지 예방접종 혜택을 받은 아동은 7억 명을 넘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게이츠 재단은 시장성이 낮아 외면된 감염병·백신 분야에 고위험 초기 자본을 투입해 국제기구·정부 투자를 끌어내는 ‘촉매적 필란트로피’ 역할을 하고 있다. /게이츠 재단

감염병 대응 기금인 ‘글로벌펀드(Global Fund)’도 게이츠 재단이 키운 플랫폼이다. 재단은 2002년 글로벌펀드에 1억달러(약 1500억원)를 출연하며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 사업에 발을 들였다. 이후 각국 정부와 민간의 자금이 모여 지금까지 155개국에 450억달러(약 66조4300억원) 이상이 배분됐다. 이 기금으로 3800만 명의 생명이 구해졌다는 집계가 나온다.

소아마비(폴리오) 퇴치 사업은 재단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2007년 게이츠 재단은 국제로타리에 ‘1억달러 매칭 챌린지’를 제안했다. 로타리가 모금한 금액만큼 재단이 추가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WHO·유니세프 등과 함께 한 이 캠페인으로 소아마비 발병 건수는 1988년 대비 99% 이상 줄었다. WHO는 2014년 동남아시아를 ‘소아마비 근절 지역’으로 공식 인증했고, 현재 야생 소아마비 바이러스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일부 지역에만 남아 있다.

2002년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감염병 퇴치 기금인 ‘글로벌 펀드’에 게이츠 재단은 1억 달러를 출연했다. 사진은 2019년 글로벌펀드 제6차 재정공약 정상회의에서 빌 게이츠가 발언하고 있는 모습. /글로벌펀드

이러한 접근을 빌 게이츠는 ‘촉매적 필란트로피(Catalytic Philanthropy)’이라고 부른다. 시장성이 없어 제약사와 정부가 외면한 분야에 재단이 먼저 고위험 자본을 넣어 실험하고, 효과가 입증되면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의 예산으로 확산시키는 방식이다. 정부가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도하기 어려운 실패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를 대신 떠맡는다는 점에서, 재단의 역할을 “정부가 하기 어려운 실험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실패와 논란도…농업·교육 개혁의 ‘비싼 수업료’

게이츠 재단의 실험이 언제나 성공만 거둔 것은 아니다.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영역은 아프리카 농업과 미국 공교육 개혁이다.

2006년 록펠러 재단과 함께 출범시킨 ‘아프리카 녹색혁명 연합(이하 AGRA)’은 고수확 개량 종자와 화학 비료 보급으로 수확량과 농가 소득을 두 배로 늘리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내외부 평가 결과, 2020년까지 기아와 빈곤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증거는 찾기 어려웠다. 일부 연구는 AGRA 개입국에서 오히려 기아 인구가 늘었다고 지적한다. 비판자들은 “소농을 다국적 농업기업의 비싼 종자·비료에 종속시키고, 토양·생태를 망가뜨렸다”고 날을 세운다. 이에 AGRA는 2022년 공식 명칭에서 ‘녹색혁명’ 표현을 뺀 채 전략을 재정비했다.

시민사회는 게이츠 재단의 AGRA의 농업 모델이 기아와 빈곤 감소에 충분한 효과를 내지 못했으며 오히려 소농과 생태계에 부담을 준다고 지적하며 반발했다. /AGRA Watch 페이스북

미국 공교육 분야에서도 대규모 시행착오를 겪었다. 재단은 2000년대 초반 대형 고등학교를 여러 개의 ‘스몰 스쿨’로 쪼개면 학업 성취도가 오른다는 가설 아래 20억달러 이상을 투입했지만,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한 채 사업을 접었다. 이어 ‘효과적인 교사(Effective Teacher)’가 성적을 좌우한다는 전제 아래 교사 평가·성과급 모델을 설계했으나, RAND·AIR 등 연구기관의 최종 평가는 “학업 성취도 향상 효과는 미미하고, 현장 반발과 행정 부담만 키웠다”는 냉정한 결론이었다. 재단은 이후 학교 네트워크가 스스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개선하는 ‘학교 개선 네트워크(NSI)’ 모델로 방향을 틀었다.

인권·거버넌스 영역의 논쟁도 있다. 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에서 게이츠 재단이 지적재산권(IP) 보호에 무게를 두며, 옥스퍼드대 백신 기술을 다국적 제약사와 독점 라이선스로 묶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공공재 성격이 강한 백신을 글로벌 공중보건이 아닌 ‘특허 중심 시장 모델’ 안에 가둬, 저소득국의 접근성을 떨어뜨렸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 멜린다의 퇴진, ‘게이츠 재단’으로…2045년 일몰 택한 이유

거버넌스도 크게 바뀌고 있다. 빌 게이츠와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는 2021년 이혼 이후에도 잠정적으로 공동 이사장 체제를 유지해왔지만, 2024년 멜린다가 공동 이사장과 이사회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멜린다는 앞으로 여성·가족 정책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별도 조직인 ‘피보털 벤처스(Pivotal Ventures)’를 중심으로 125억달러(약 18조원)를 집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재단은 멜린다의 퇴진 이후 두 사람의 이름을 간판에서 떼고 ‘게이츠 재단(Gates Foundation)’으로 명칭을 바꾸기로 했다. 이사회 재편과 함께 빌 게이츠가 단일 이사장으로 남았고, 운영 전반을 맡는 CEO 마크 수즈먼의 역할도 더욱 중요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왼쪽부터) 빌 게이츠,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 워렌 버핏. 이들은 2010년 부호들이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자고 약속하는 ‘기빙 플레지’ 운동을 시작했다. 멜린다 게이츠는 2024년 게이츠 재단을 떠나며 ‘피보털 벤처스’를 통해 여성·가족 정책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기빙플레지(The Giving Pledge)

사실상 워렌 버핏이 2006년부터 15년 넘게 매년 수십억달러어치 버크셔 해서웨이 주식을 기부한 덕분에 재단은 세계 최대 민간 자선기금으로 성장했다. 버핏은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라고 말해온 인물이다. 버핏의 생전 기부 철학이 재단이 ‘설립자 사후 20년 내 해산’이라는 일몰 구조(sunset clause)를 택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 것으로 해석된다.

게이츠 재단은 25주년을 맞은 올해, 2045년 종료 계획을 공식화하면서 향후 20년간 연간 집행 규모를 90억 달러(약 13조원)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미래의 막연한 문제보다 지금 당장의 고통을 줄이는 데 돈을 쓰겠다”는 게이츠의 논리다. 재단은 글로벌 보건·개발·젠더 평등 3개 축을 유지하되, 기후 적응 농업·디지털 공공 인프라·여성 경제권 강화 등에 더 무게를 싣는 방향으로 전략을 다듬고 있다.

게이츠 재단을 향한 시선은 양가적이다. 수천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백신·디지털 금융 같은 분야에서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와 함께, 거대한 사적 자본이 민주적 통제 없이 글로벌 보건·농업 정책의 우선순위를 좌지우지한다는 비판도 공존한다. 기술 해결책에 치우쳐 정치·구조적 불평등을 충분히 건드리지 못했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2045년까지 이어질 ‘유한(有限) 재단’의 마지막 20년은, 자선 자본이 공공 영역에서 어디까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실험하는 거대한 무대가 될 전망이다. 빌 게이츠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가진 시간과 돈은 유한하지만, 그 안에서 세상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거인이 떠난 뒤 남을 최대의 유산이 될지 모른다.

김경하·조유현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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