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주 교수의 미국 필란트로피] 과학적 자선 운동이 바꾼 ‘돈의 쓰임’

김성주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교수

필란트로피는 대개 거액 기부나 거대 재단의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필란트로피의 핵심은 ‘얼마나 냈는가’보다 ‘어떻게 썼는가’에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전개된 ‘과학적 자선 운동(scientific charity movement)’은, 자선이 필란트로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고리였습니다. 자선이 더 이상 선의의 감정에만 의존해서는 빈곤과 실업,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자선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려는 흐름이 사회 전반으로 번졌습니다.

과학적 자선 운동의 사상적 배경은 합리주의적 복지 사상(rational and structured approach to social welfare), 즉 사회 문제에 대해 감정적 구호가 아니라 자료와 원리에 기초해 접근하려는 흐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등 영국 사회개혁가들의 영향이 이 운동의 한 뿌리로 거론됩니다. 미국에서는 1877년 뉴욕주 버펄로에서 설립된 ‘자선조직협회(Charity Organization Societies, COS)’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메리 리치먼드(Mary Richmond) 같은 사회개혁가들이 이를 주도했습니다.

이 운동의 핵심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됩니다. 첫째, 구호 대상에 대한 ‘개별 사례 중심 평가(case-by-case assessment)’입니다. 당시 자선은 종종 무차별적이거나 산발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중복 지원과 비효율이 발생했습니다. 과학적 자선운동은 구호받을 자격이 있는 빈곤층과 그렇지 않은 빈곤층을 구분하고, 자립 가능성이 있는 개인에게 선택과 집중을 하려는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둘째, 자선기관 간의 협력과 조정입니다.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기관들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역할을 나누어야 한다는 논리가 확산되었습니다. “어느 기관이 누구를 돕는지”를 모른 채 각자 움직이는 방식으로는 공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경험적 깨달음이 제도적 실천으로 번져간 것입니다. 이때부터 자선은 ‘도덕적 실천’에 머무르지 않고 ‘관리되고 계획된 사회적 개입’의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선(charity)과 필란트로피(philanthropy)의 경계가 서서히 분명해집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자선은 주로 빈곤·질병·결핍 등 당면한 고통을 완화하기 위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구호에 초점을 둡니다. 반면 필란트로피는 공공선을 지향하며 사적 자원을 활용해 사회 문제를 장기적·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과학적 자선운동은 자선을 필란트로피로 ‘승격’시킨 것이 아니라, 자선이 필란트로피로 ‘진화할 수 있는 운영 원리’를 제공한 것으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즉, 자선이 계속되더라도 그 방식이 데이터와 계획, 조정과 전략을 갖추는 순간 필란트로피적 성격이 강해집니다.

여기에 다트머스 판결과 지라드 유언 판결이 형성한 제도적 의미가 겹쳐집니다. 다트머스 판결은 비영리 조직이 정치 권력이나 설립 주체의 변동과 무관하게 존속할 수 있는 독립성과 연속성을 확립한 사건이었고, 지라드 유언 판결은 기부자가 공익을 위해 남긴 의도(donor intent)가 사후에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법적으로 명확히 했습니다.

이 두 판결은 자선과 비영리 활동이 개인의 선의나 일시적 사회 분위기에 의존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공익 장치로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조건을 마련했습니다. 과학적 자선운동은 바로 이 기반 위에서 “자선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는 실천의 문법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축적된 막대한 사적 자본은 이러한 새로운 문법을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자원으로 기능했습니다.

피바디 교육기금(1867), 카네기 재단(1911), 록펠러 재단(1913) 같은 레거시 재단의 등장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돈을 쓰는 문법’이 바뀐 결과였습니다. 자발성의 전통 위에 법적 독립과 의도 보호가 올라서고, 그 위에 과학적 자선운동이 운영 원리를 제공하면서, 자선은 감정의 구호를 넘어 장기 설계의 공익 개입으로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김성주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교수

필자 소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North Carolina State University) 사회복지학과 및 행정학과 부교수로 재직하며, 비영리조직, 시민사회, 자선·기부, 사회적 형평성을 중심으로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의 학문 및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비영리 경영(Nonprofit management), 비영리 교육과 필란트로피(Philanthropy studies)에 관한 국제 비교 연구와 정책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연구와 교육뿐 아니라, 학문적 지식을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하는 데에도 관심을 두고 있으며, 비영리 조직의 역량 강화, 시민사회 생태계의 발전, 그리고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모색하는 데 지속적으로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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