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싱가포르의 혁신 공간 ‘스케이프(SCAPE)’를 방문했을 때였다. 현지 담당자는 양철 지붕 아래 붉은 벽돌 담이 이어지는 공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장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내가 답을 찾기도 전에 그는 말했다. “성수동이 모티브예요.” 그 짧은 문장이 오래 남았다. 성수가 서울의 한 구역을 넘어, 아시아 도시 기획자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언어이자 이미지가 되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투자자로서 지난 10년간 수많은 스타트업의 흥망을 지켜봤다. 살아남은 기업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유한게임’이 아니라, 게임 자체를 지속시키는 ‘무한게임(Infinite Game)’의 플레이어라는 점이었다. 도시는 더더욱 그렇다. 개발을 끝내고 완공 테이프를 끊는 순간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의 필요와 기술의 변화를 흡수하며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무한게임’을 하는 도시만이 앞으로 살아남는다.
◇ 성수의 미래, ‘임팩트’에서 길을 찾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도시 행정은 여전히 ‘예측(Prediction)’ 중심에 머물러 있다. 예산 편성과 집행이 과거 데이터를 근거로 움직이는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혁신 스타트업은 보유한 자원을 활용해 즉시 시도하고 수정하는 ‘실행(Effectuation)’ 방식으로 불확실성을 기회로 바꾼다. 이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도시는 금세 정체된다.
서울프라퍼티인사이트가 주최하고 성동구가 후원한 ‘2025 시티포럼 성수’에서도 핵심 질문은 동일했다. “어떻게 성수라는 지역이 꺾이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 실마리가 성수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임팩트’다. 엠와이소셜컴퍼니(MYSC)가 번역 출간한 ‘메이크 스페이스’는 “공간은 조직의 몸짓 언어(body language)”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수의 몸짓 언어는 무엇인가. 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는 모델’이라는 창업 생태계의 정체성이 그 해답이라고 본다. 이 지역의 생태계는 지난 10여 년 동안 일관되게 임팩트 기반으로 구축돼 왔고, 이 정체성이 성수가 흔들리지 않을 이유다.
◇ 사회문제가 커뮤니티의 중심이 될 때
최근 MYSC 공간·커뮤니티팀이 도쿄 토라노몬힐즈 등지를 탐방하며 흥미로운 흐름을 발견했다. 일본에서 가장 비싼 지역 한복판에 사회문제를 다루는 전용 공간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토라노몬힐즈의 ‘Glass Rock’은 대기업 신사업팀, NPO, 시민, 공공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함께 모이는 ‘사회적 행동 커뮤니티(social action community)’를 표방한다.
상업과 거래를 넘어, 누구나 영향을 주고받는 사회문제를 커뮤니티의 중심에 놓으면 지역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성수에서 이미 검증된 흐름이다. 우리가 투자한 273개 스타트업 중 28개가 성동구를 본점으로 두고 있으며, 루트임팩트·임팩트스퀘어·크레비스파트너스·소풍벤처스 등 주요 소셜임팩트 플레이어들이 이곳에서 기반을 다졌다. 이들은 성수라는 도시의 언어가 ‘임팩트’임을 누구보다 먼저 증명해 온 셈이다.
그래서 나는 성수동이 대한민국 도시 혁신의 무한게임을 이끌 ‘성수 소셜벤처 클러스터 특구’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를 움직일 구체적 엔진으로는 ‘정책 IPO(Policy Initial Public Offering)’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 성수에서 시작하는 ‘정책의 IPO’
정책 IPO는 기업공개(IPO)의 원리를 정책에 적용한 개념이다. 민간 기업이 시장에서 가치를 입증한 뒤 공공 시장에 ‘상장’하는 과정처럼, 정책 IPO는 민간이 먼저 도시 문제 해결 실험을 수행하고, 효과가 검증된 모델만 공공이 ‘채택(매입)’해 정책으로 전환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 필요한 이유는 명확하다. 지금의 정책 개발 체계는 과거 데이터와 예측 모델에 과도하게 의존한다. 하지만 도시 문제는 이미 행정의 속도를 압도하고 있다. 행정이 실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시는 답을 찾기 전 기회를 잃는다.
정책 IPO의 구조는 단순하다. 민간이 자본(기부)을 대고 리스크를 감당한다. 스타트업과 비영리 단체 등이 빠르게 개념증명(Proof of Concept)을 수행한다. 실험이 성공적으로 검증되면, 그때 행정이 정책으로 채택하고 예산을 편성한다. 행정은 실패 비용을 줄이고 민간은 자신들의 실험이 ‘도시의 표준’으로 자리잡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 나는 성수를 사랑하는 유니콘 기업, 자산가, 시민이 참여하는 ‘성수 폴리시 펀드(Seongsu Policy Fund)’를 제안한다. 쓰레기 문제, 보행 안전, 젠트리피케이션 등 도시 의제를 민첩하게 다루는 혁신 엔진이 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이미 이런 흐름이 확산 중이다. 스타트업 ‘폴리폴리(PoliPoli)’는 설립 1년 반 만에 약 15억 원 규모 기부금을 확보하며 전국 곳곳에서 Policy Fund를 운영하고 있다. 규제 강도가 더 높은 한국에서는 이 모델이 더욱 절실하다.
여기에 성수 내 일부 지역을 규제 샌드박스 기반의 ‘소셜벤처 클러스터 특구’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S&P500 기업 가치의 90%가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intangible assets)’에서 나오듯, 도시의 경쟁력 또한 건물 높이가 아니라 실험의 밀도와 네트워크, 커뮤니티라는 무형자산에서 나온다. 성수의 골목이 거대한 실험실이 될 때, 새로운 시장과 공공 가치를 동시에 창출할 수 있다. 일본 군마현·도야마현처럼 민간 펀드와 협력해 규제를 열어 지역 전체를 실증 필드로 제공하는 방식은 충분히 가능하다. 성동구는 ‘필드’를 열고 민간은 ‘자본과 실행력’을 대는 새로운 민관협력의 표준을 만들 수 있다.
이제는 개발(Development)의 시대를 넘어, 민간이 먼저 투자하고 증명하며 공공과 함께 도시를 ‘경영(Management)’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도시를 경영한다는 것은 행정과 민간 중 누가 주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가진 자원을 ‘더 큰 공익’을 위해 결합한다는 뜻이다.
성수동은 이미 준비돼 있다. 정부와 지자체가 이 무한게임의 파트너로서 ‘성수 특구’라는 운동장을 열어주기를 기대한다. 성수에서 시작된 작은 파동이 대한민국 도시 행정의 변화로 이어지는 강력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