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 여름, 뉴욕 유엔 본부. 전통적으로 국가 정상들만 오르던 단상 위에 이날은 IBM, BP, 노키아 등 다국적 기업 CEO들이 섰다. 1년 전 다보스포럼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던졌던 화두, “사람의 얼굴을 한 세계화(Human Face of Globalization)”에 기업들이 직접 응답한 자리였다.
당시는 세계화가 거센 속도로 확장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환경 파괴, 인권 침해, 부패 문제가 계속 불거졌다. 유엔은 더 이상 정부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장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은 금융과 투자자였고, 유엔은 책임 있는 시장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기업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그렇게 탄생한 유엔글로벌콤팩트(UNGC)는 지난 25년 동안 ‘ESG’라는 키워드를 앞세워 ‘지속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시장’이라는 새로운 표준을 세계에 확산시켜 왔다. 기업의 책임은 시장의 규범이 됐고, 지속가능성은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

지금, ESG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기후 대응 강화와 함께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등장한 것이다. ESG는 이제 환경과 인권을 넘어 ‘기술과 정의’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원칙에서 실천으로, 선언에서 시스템으로. ESG는 다시 한번, 시대의 화두를 묻고 함께 답을 찾아가야 할 때다.
◇ ESG, 국제기구와 기업이 함께 만든 새로운 시장 질서
UNGC가 출범한 2000년 당시만 해도 “기업이 인권·환경·반부패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제안은 실험적이었다. UNGC는 10대 원칙을 제시하고 기업을 국제 규범의 파트너로 초대했다. 기업들은 매년 ‘이행 보고서(Communication on Progress)’를 제출하며 원칙 준수 현황을 공개했다. 이 자발적 보고 체계는 훗날 ESG 공시 제도의 토대가 됐다.
이러한 흐름은 2004년, ESG라는 이름으로 구체화한다. UNGC와 유엔환경계획 금융이니셔티브(UNEP FI)가 발표한 보고서 ‘Who Cares Wins’는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통합한 새로운 경영 프레임을 제시했다. 당위의 언어였던 지속가능성이 경영의 언어로 전환된 순간이었다.
ESG가 제도적 힘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금융의 변화였다. 2006년 UNGC와 UNEP FI가 주도해 출범한 책임투자원칙(PRI)은 ESG가 자본시장에 편입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투자기관들은 재무성과뿐 아니라 환경·사회·지배구조 요인을 고려하겠다고 선언했다. 2006년 약 6조 달러였던 PRI 서명기관의 운용자산은 2025년 현재 120조 달러를 넘어섰다. ESG는 윤리적 개념을 넘어 리스크 관리와 장기 수익성의 언어가 됐다. 자본이 윤리적 원칙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지속가능성은 비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경제 질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자본시장의 언어가 된 이후 ESG의 다음 과제는 ‘책임의 측정’이었다. 선언만으로는 투자자의 신뢰를 얻기 어려웠다. 2010년대 후반 이후 J.P.모건 등 글로벌 대형 운용사들이 ESG 요소를 투자 의사결정에 본격 반영하자,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기준과 데이터가 요구됐다. 이렇게 등장한 것이 서스테이널리틱스(Sustainalytics), MSCI, 에코바디스(EcoVadis) 등 글로벌 ESG 평가 기관이다.
이들은 UNGC 10대 원칙과 SDGs를 참조해 기업의 인권·노동·환경·지배구조 리스크를 수치화했다. 블랙록 역시 2020년 이후 투자 대상 기업의 UNGC 원칙 준수 여부를 투자 프로세스 전반에 통합하기 시작했다. ESG는 신뢰 가능한 정보 인프라로 발전했고, 데이터의 표준화는 기업의 ‘자발적 책임’을 ‘제도적 검증’의 대상으로 바꿔 놓았다.
2015년 파리협정 이후 흐름은 더 빨라졌다. 같은 해 UNGC는 국제기구들과 협력해 과학 기반 감축목표 이니셔티브(SBTi)를 출범시켰다. 이는 ESG의 ‘E’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글로벌 기준이 됐다. 기업들은 임의의 목표가 아니라 1.5℃ 경로에 부합하는 감축 목표를 세우고 검증받아야 했다. SBTi의 등장은 ESG가 정성적 서사에서 정량적 증거로 넘어간 결정적 장면이었다.
◇ AI가 던진 과제, 다음 25년을 향한 새로운 도전
UNGC의 가장 큰 성과는 ‘국제 제도’와 ‘시장’의 협력 구조를 만든 것이다. 과거 국제기구가 국가에 규범을 제시했다면, 지금은 기업을 파트너로 포섭하는 다자 거버넌스로 진화했다. 전 세계 70여 개국의 로컬 네트워크를 통해 160여 개국 2만5000여 개 기업·기관과 협력하며 규범을 현지화하고 있다.
2023년 출범한 ‘포워드 패스터(Forward Faster)’ 이니셔티브는 이를 잘 보여준다. 기후행동, 수자원 회복탄력성, 생활임금, 지속가능금융 등 핵심 분야에서 기업의 SDGs 이행을 가속하는 프로젝트다. 선언을 실행으로 바꾸는 힘이 이제 정부보다 기업 네트워크에서 더 빠르게 작동한다는 의미다.
ESG의 미래는 전 지구적 생존 전략이다. 지난 25년이 ‘원칙의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25년은 ‘실행과 신뢰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달성률은 여전히 20% 미만에 머물러 있고, 기후위기와 사회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제 ESG는 ‘공시’와 ‘보고’를 넘어, 실질적 영향(impact)을 입증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겹쳐졌다. AI는 기업의 생산성과 의사결정을 혁신하는 동시에, 노동의 미래·데이터 윤리·기술 편향 등 새로운 리스크를 낳고 있다. ESG는 환경(E)과 인권(S)을 넘어 기술 책임(Tech Responsibility)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AI 거버넌스, 알고리즘 투명성, 데이터 공정성은 지속가능성의 새로운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논의는 글로벌 담론의 장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UNGC 한국협회는 지난 11월 20일 ‘코리아 리더스 서밋(Korea Leaders Summit 2025)’을 개최해 기술·정의·지속가능성의 새로운 방향을 논의했다. 600여 명의 국제기구·정부·기업·학계·시민사회 인사가 참석해 AI 거버넌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 등을 다뤘다.
이번 서밋은 “AI 시대의 지속가능성은 윤리와 책임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공통된 메시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튜링상 수상자로 AI 4대 석학이라 일컬어지는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 유엔글로벌콤팩트 글로벌 이사를 맡고 있는 최수연 네이버 대표 등 참석자들은 한목소리로 기술 발전이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가치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AI와 기후라는 두 개의 전환이 동시에 맞물리는 상황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일자리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데 참석자들은 크게 공감했다. 이은경 UNGC 실장은 한국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양극화 문제를 함께 짚으며 기후 및 AI 전환 과정에서 그 충격이 가장 먼저 닿는 취약계층을 고려해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 발전(Leave no one behind)’을 위한, 광범위한 사회적 논의와 준비가 시급함을 강조했다.
ESG는 다시 전환점에 서 있다. 기술과 정의라는 새로운 축이 등장한 지금, ESG는 실질적 책임과 영향력을 입증해야 하는 시대를 맞고 있다. 다음 25년은 원칙에서 실행으로, 선언에서 시스템 구축으로 나아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공동의 해답을 지금부터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유엔글로벌콤팩트한국협회
| 유엔글로벌콤팩트한국협회의 <ESG월드뷰> “Who cares wins(배려하는 자가 승리한다).” 20여년 전 유엔글로벌콤팩트(UNGC)는 이 보고서를 통해 ESG라는 개념을 세상에 처음 선보였습니다. 요즘은 어디서나 지속가능성과 ESG를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ESG의 본질이 흐려진 느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시작을 들여다보면 ESG의 의미는 오히려 선명합니다. ‘환경’을 배려하고, ‘사람’을 배려하며, ‘조직’을 배려하는 기업이 결국 더 오래 살아남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기업들은 묻습니다. “ESG를 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뭘 해야 하지?” UNGC의 <ESG월드뷰> 시리즈는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국제사회에서 오가는 ESG 논의와 최신 흐름을 소개하고, 그것이 한국 기업에 어떤 의미와 기회를 주는지 이야기하려 합니다. “왜 지금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풀어내고자 합니다. ESG가 진짜 ‘우리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창이 되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