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재무제표에는 ‘보이지 않는 숫자’가 존재한다. 머지않아 확실히 지출할 비용이지만 지금 당장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숨어 있는 숫자다. 이것은 바로 ‘환경 리스크(risk)’다.
이제 숫자의 반격이 시작됐다. 기후변화에 대응해 세계 곳곳의 정부는 환경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비즈니스는 위기를 맞았고, 기회는 친환경 산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유럽의회는 2009년부터 재생에너지 사용을 권장하는 등 환경 규제를 단계적으로 강화했다.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가 강화되면서 유럽의 알루미늄 생산 비용은 2002년부터 10년간 약 8% 증가했다. 알루미늄은 섭씨 960℃의 고열에서 제련해야 하기 때문에 전기료가 총 생산비용의 30%를 차지한다. 2007년 이후 유럽연합(EU) 내 24개 알루미늄 제련소 중 세계 1·2위를 다투던 EU 최대의 알루미늄 제련소를 포함해 11곳이 폐업했다. 2017년 전 세계 환경보호 기술 규제는 322건으로 역대 둘째를 기록했고, 특히 중국의 기술 규제가 57건으로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었다.
환경 무임승차의 시대는 끝났다. 한국 기업은 어떻게 비즈니스를 해야 할까. 더나은미래는 ‘기후금융’이라는 솔루션으로 기후변화 문제를 풀어나가는 전문가 3명을 한자리에 모았다. 지난 16일 서울 서소문동에 위치한 ‘월드컬쳐오픈 코리아’의 오렌지컨테이너에서 만난 김성우(48) 고려대 지구환경과학과 겸임교수, 김주진(37) ㈔기후솔루션 대표, 박형건(38) 녹색기후기금(GCF) 금융기관 선임스페셜리스트는 “기업들도 환경 리스크에 따른 비용의 부담을 체감하고 있다”면서 “이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고 입을 모았다.
김성우 교수는 포스코 환경에너지실, KPMG에서 환경 및 에너지 전략을 총괄했으며, 김주진 대표는 대형 로펌에서 환경·에너지 전문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 경제학자, 금융전문가 등 에너지·환경 분야 실무 경력자들이 관련 정책을 연구 및 제시하는 비영리단체 ㈔기후솔루션의 대표다. 박형건 선임은 산은경제연구소 전임연구원을 거쳐 2015년엔 기후 관련 기금 최대 국제기구인 GCF에 한국인 최초 국제직원으로 입사해 개도국의 신재생에너지, 에너지 효율화 사업 등에 금융 지원과 기후금융 관련 정책 가이드라인, 규제 도입 등 기후금융 활성화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3명은 각각 컨설턴트, 변호사, 은행원이었던 10년 전, 기후변화 스터디 모임에서부터 인연을 이어왔다고 했다. ☞전문가 3인의 이력이 궁금하다면?
◇기후변화에 ‘금융’을 더하다
―기후금융이란 무엇인가.
박형건=“기후금융은 온실가스 감축 사업, 자연재해를 대비하는 기후변화 적응 사업에 금융을 지원하는 것을 말한다. 탄소 배출 감축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탄소 배출권 거래제’와 태양광 에너지 같은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는 것도 기후금융이다. 기후금융의 주체는 다양하다. 개인은 친환경에너지 사업에 직접 투자하거나 금융사가 출시한 기후 관련 펀드 등 상품에 가입할 수 있고, 기업은 신재생에너지 사업에 투자하거나 그린본드(채권)를 발행할 수도 있다. 금융기관의 경우 해당 사업에 여신, 보증 등을 줄 수도 있다.”
김성우=“말레이시아에 쌍둥이 빌딩(페트로나스 트윈타워)이 있다. 동일한 냉방 시스템이 설치됐는데, 한 빌딩에서만 에너지 사용량이 3배나 더 나왔다. 조사해보니 그 건물의 냉방 시스템에 미세한 결함이 있었다. 간단한 진단으로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건물 냉난방 효율을 높이는 시스템 개발에 투자하는 것처럼 기후금융은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는 친환경 인프라에 투자하는 것이다.”
김주진=“금융기관은 기본적으로 엑셀표에 따라 움직인다. 해외에서 태양광 산업에 투자가 잘되는 이유는 애초부터 석탄화력발전의 외부 효과를 비용으로 산정해, 친환경 에너지 수익률이 좋게 시스템이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금융기관이 친환경 산업 투자를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단적인 예가 국내 전력 시장 시스템이다. 한국전력거래소가 제공하는 전기 도매가격 산출 수식은 석탄화력 발전소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어디를 선택하겠나. 한국이 아직 기후금융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후금융은 성장세다. 지난해 말 KDB산은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기후금융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2013년 1990억달러(약 212조8305억원), 2014년 2410억달러(약 257조7495억원)에서 2015년 2990억달러(약 319조7805억원)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기후 선진국에서는 그린뱅크(기후변화 및 청정에너지 분야 금융을 전담하는 공공 또는 준공공 금융기관)를 통해 기후금융이 확산되고 있다. 호주의 클린 에너지 파이낸스 코퍼레이션(Clean Energy Finance Corp), 영국 그린 인베스트먼트 뱅크(Green Investment Bank·이하 GIB), 미국 뉴욕 그린뱅크가 대표적인 예다. 각국의 그린뱅크는 청정에너지 프로젝트와 관련해 공공과 민간을 중개하며, 보증, 여신, 공동 투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민간 투자를 유인하고 투자 위험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태양광 설비 리스, 대규모 해상풍력 프로젝트 펀드 설립 등 각국 친환경 사업 특성에 맞춘 다양한 금융 서비스도 제공한다. 몽골은 올해 초 은행연합회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기후금융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시스템을 도입했다.
―세 분 다 기후금융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기업은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하고, 정부는 엄격한 환경규제 정책을 펴면 되지 않나. 왜 기후금융이 필요한가.
김성우=“기후변화는 이미 몇 십 년 전 시작됐다.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져 나라가 사라지고, 기습적인 대형 태풍, 홍수 등 기상이변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기후변화는 잠재된 위협이 아닌 실존하는 공포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앞으로 2100년까지 지구 온도는 3.5도 더 상승하는데, 이때 인류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기후변화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하는 이유다. 기후금융은 기후변화에 효율적이며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이다. 기후변화는 정부의 규제만으론 한계가 있고, 시장도 자본의 논리대로 흘러가기 쉽다. 기후금융은 이 둘을 상호 보완한다. 기업에 투자를 통해 친환경 사업을 독려하고 자발적 탄소배출 감축을 유도할 수 있다.”
김주진=“그렇다. 기후금융이 기후변화 비즈니스에 서포터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1억원을 가지고 태양광 에너지 설비를 1개 설치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이 사람이 기후금융 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같은 돈으로 5개의 설비를 구입해 태양광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임팩트가 달라진다.”
박형건=“2015년 파리협정 이후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친환경 비즈니스를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리고 곧 협력업체를 향한 압력으로 이어졌다. 애플과 구글은 신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애플은 협력업체들에 재생 가능에너지 사용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 환경 경영, 잘 하는 방법은?
김성우=“BMW도 마찬가지다. 2016년 BMW는 자동차 생산에 신재생에너지를 100% 사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차량용 배터리를 납품하는 삼성SDI에 친환경 경영을 할 것으로 요구했다. 글로벌 기업에 부품 등을 납품하는 한국 기업을 포함한 협력업체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위의 조건을 따를 수밖에 없다.”
모든 산업군은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 리스크를 가진다. 2011년 3개월에 걸쳐 기록적인 물난리를 일으킨 태국 홍수 사태로 도요타 태국 공장이 물에 잠겨 도요타는 4억 달러(약 4278억원)가 넘는 피해를 입었다. 의류 회사도 기후변화로 타격이 컸는데 가뭄과 홍수 등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생길 때마다 면화 가격이 급격히 치솟으면서 수익성이 악화됐다. 실제 2011년 최대 면화 산지인 미국 텍사스주의 가뭄으로 면화 재배를 포기하는 농부들이 급증하기도 했다. 반면, 몇몇 해외 기업은 친환경에너지 사업에 투자해 수익도 낸다. GE는 2002년 풍력발전기 회사인 엔론윈드를 3억달러(약 3197억4000만원)에 인수해, 8년 후 순이익(약 8억달러)으로만 2배가량 벌었다.
☞환경 무임승차 시대 끝.. 지구 기후변화 대응 ‘금융’ 솔루션 더할 때②편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