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기업가 재단이 바꾼 세상의 지도 <3> 포드재단
시민권운동·민주주의 위기·팬데믹 걸쳐 ‘사회정의 재단’으로 진화한 90년
장기·무제한 지원, 사회적 채권 발행까지…필란트로피의 새 역할을 실험하다
1936년 자동차 산업의 거대 자본에서 출발한 포드재단(Ford Foundation)은 오늘날 전 세계 불평등 구조를 해부하고 바꾸는 ‘사회정의 재단’으로 불린다. 단순한 기부를 넘어 교육·민주주의·경제 시스템까지 문제의 뿌리를 겨냥해온 이 재단의 궤적은, 필란트로피가 시대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어떻게 재정의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포드재단은 포드자동차(Ford Motor Company) 창립자 헨리 포드(Henry Ford)의 아들이자 기업 후계자인 에드셀 포드(Edsel Ford)가 “모두의 공공 복지를 위하여”라는 취지로 2만 5000달러(한화 약 3700만원)를 출연하며 출범했다. 이후 포드가(家)의 유산이 대거 유입되면서 재단은 단기간에 세계 최대 규모로 커졌다. 설립 초기에는 과학·교육·자선을 중심으로 공공복지를 넓히는, 당시 대형 재단들이 공유하던 전통적 공익 모델을 따랐다.

전환점은 헨리 포드 2세 시기였다. 헨리 포드와 에드셀 포드의 사망으로 거액의 유산이 재단으로 흘러들어오자 “막대한 자원을 어떻게 책임 있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내부에서 제기됐다. 당시 자산은 4억7000만달러(한화 약 6900억원)로 이미 록펠러·카네기 재단을 뛰넘어서는 규모였다. 재단은 변호사이자 투자은행가였던 H. 로언 게이더에게 역할 재정립을 맡겼고, 1950년 공개된 ‘게이더 보고서(Gaither Report)’는 단순한 구호금으로는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문제의 뿌리는 제도·교육·경제 구조에 얽혀 있으며, 재단은 이 구조 자체를 바꾸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 사회정의가 재단의 정체성이 되기까지
재단이 ‘사회정의’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1960년대 말이다. 인종차별 철폐 요구가 전국으로 번지고,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과 흑인 폭동, 베트남전 반전 시위가 이어지며 미국 사회 전체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포드재단은 이 변화에 응답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전환이 창립자 헨리 포드가 남긴 ‘시민적 오점’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분석도 내놓는다. 헨리 포드는 독일 현지 공장을 설립해 나치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1938년에는 나치가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을 받았다. 이 역설적 역사 때문에 재단이 이후 사회 정의에 더 집중하는 철학적 전환을 택했다는 해석이다.
재단은 6대 회장 맥조지 번디 체제에서 시민권 단체 지원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전체 보조금에서 시민권 단체 비중은 1960년 2.5%에서 1968년 36.5%까지 뛰어올랐다. PBS(공영방송) 설립 지원, 도시 재개발, 여성단체 후원, 소수자 펠로십, 소액금융 출범 등 지원 분야는 급속히 넓어졌다. 교육 부문에서는 ‘포드재단 펠로우십’을 통해 유색인종 교수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지금까지 4100명 이상이 이 장학금을 기반으로 교수로 진출했다.
1973년에는 미국 최초의 커뮤니티 개발은행 ‘쇼어뱅크(ShoreBank)’ 설립을 지원하며 금융·지역개발 영역에도 혁신을 도입했다. 쇼어뱅크는 저소득 지역 주민과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대출과 투자를 제공하며 지역재생 금융의 모델이 됐다.
오늘날 포드 재단은 스스로의 연혁을 ‘사회정의의 역사(History of Social Justice)’로 소개할 정도로, 사회 정의를 재단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 세계 곳곳으로 확장된 사회정의 전략
포드재단의 활동은 일찍부터 국경을 넘어섰다. 1952년 인도에 첫 해외사무소를 연 뒤 인도네시아·케냐 등 11개 지역으로 확장했고, 현재는 11개 지역에서 50여개국의 불평등 해소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역별 전략은 사회·정치적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달라졌다. 남미 안데스 지역은 초창기에는 교육과 생산성을 중점적으로 지원했지만, 1970~80년대 군부독재 시기에는 인권옹호와 기록 사업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민주화 이후에는 진실위원회, 과거사 규명 등 ‘기억과 정의’ 프로젝트를 후원했다. 최근에는 여성 권리·금융 포용·재생산 건강·정부 투명성 강화 등으로 지원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대표 국제 프로그램 ‘국제 펠로우십(IFP)’은 2001~2013년 운영된 대형 장학 프로젝트다. 개발도상국·여성·장애인 등 고등교육 기회가 적은 인재를 대학원·박사과정에 진학시키고, 지역사회 리더로 육성했다. 졸업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NGO 설립, 공공·국제기구 진출 등 각 지역의 사회변화를 이끌고 있다.

인도네시아 출신 줄리아 노브리타(Julia Nobrita)는 IFP 지원으로 미국 메사추세츠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뒤 내전의 상흔이 남은 말루쿠 지역에서 비영리 조직 ‘Inspiring Development’를 설립해 학생 리더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케냐의 라파엘 오보뇨(Raphael Obonyo) 역시 듀크대 공공정책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청년의회 네트워크와 케냐 최초 커뮤니티 라디오 ‘Koch FM’을 이끌며 지역사회 참여와 청년정치를 확산시키고 있다. 동시에 세계은행·유네스코 등 국제무대에서도 활동하며, IFP가 지향한 ‘글로벌·로컬 리더십’의 성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 21세기 포드재단, 구조적 불평등을 조명하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불평등과 싸웁니다.”
록펠러 재단 부회장과 포드 재단의 교육·창의·표현의 자유 부문 부사장을 거쳐 2013년 제10대 회장으로 취임한 대런 워커는 2015년에 재단의 미션을 “모든 형태의 불평등과 싸우는 재단”으로 재정립했다. 인권·빈곤·문화·개발을 분야별로 나누어 다루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인종·젠더·장애·경제 권력 등 여러 요인이 얽혀 만들어내는 ‘구조적 불평등’을 통합적으로 분석·대응하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을 구현한 핵심 도구가 2016년 시작한 ‘BUILD 프로그램’이다. 프로젝트 단위의 단기 지원 대신, 5년 장기·용도 제한 없는 자금을 제공해 조직 자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재단은 거버넌스·재정구조·커뮤니케이션·리더십 등 조직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고, 전 세계 350여 곳이 BUILD 지원을 받았다. 이 모델은 팬데믹 이후 게이츠, 맥아더, 오픈 소사이어티 등 다른 재단에도 확산됐다.

포드재단은 임팩트 투자와 혁신 금융 분야에서 선도적인 기관으로 꼽힌다. 2017년에는 미국 대형 재단 가운데 최초로 10억 달러 규모의 미션 연계 투자(Mission Related Investment, 이하 MRI)를 도입했다. 이는 고유자산을 시장 수익과 사회적 임팩트라는 두 목표에 동시에 맞추는 모델이다. 주거·금융 포용·기술 기반 사회문제 해결·소수자 자산운용사 육성 등이 주요 투자 대상이다. 일례로 재단은 저소득층 임대주택 개발에 투자하는 부동산 펀드 ‘터너 임팩트 캐피털’과, 소수자 중심 자산운용사의 성장을 지원하는 ‘일루멘 캐피털’ 등에 자금을 투입했다.
팬데믹 시기였던 2020년에는 미국 민간재단 최초로 10억 달러(한화 약 1조 4700억) 규모의 사회적 채권(social bond)을 발행했다. 기업채 시장에서 공익 목적을 명시해 채권을 발행한 첫 사례로, 확보된 자금은 팬데믹으로 타격을 받은 시민사회·문화·사회정의 조직의 운영비와 다년 지원에 투입됐다. 재단 자산 자체를 ‘사회정의 전략’에 맞춰 재배치한 조치였다.

포드재단은 지금 또 다른 전환기를 맞고 있다. 사명을 재정립하고 보조금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워커 회장이 올해 사임하고, 지난달 11대 회장으로 헤더 거컨(Heather Gerken)이 취임했다. 그는 예일대 로스쿨 학장으로 저소득층 학생 전액 장학금 제도 도입, 참전용사 학생 비중 확대 등 형평성 강화를 이끌어온 인물이다. 형평성 논쟁이 미국 사회에서 다시 거세지는 시점이어서, 그의 리더십이 포드재단의 다음 10년을 어떻게 그릴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