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문화 pH 6.5] 요즘 애들의 역사는 반복된다

최근 한 시민대학에서 MZ세대에 대한 강의를 했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린 뒤 퇴근한 X세대 중간관리자들과 자녀를 이해하고 싶은 4050 어머니들이 주 대상이었다. 보통 ‘Z세대’가 가진 특징이 어떤 성장 환경에서 비롯되었는지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공감의 눈빛이 돌아오곤 했는데, 그날은 달랐다. 여기저기서 “우리도 힘들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표에게 바로 찾아가 컴플레인을 하는 바람에 곤란해진 부장, 업무를 요청하면 “이걸요? 제가요? 왜요?”가 돌아오니 결국 본인이 남아 야근을 한다는 팀장, ‘블라인드 앱’에 이상한 글이 올라오진 않는지 회사 평판 관리에 신경 쓰라는 사장 사이에서 눈치만 본다는 관리자까지. ‘MZ스럽다’도 옛말이고, 이제는 40대를 희화화하는 ‘영포티’라는 밈까지 등장했다. 세상살이도 퍽퍽한데 세대 간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한 지점에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처럼, 세대 차이는 왜 이토록 좁혀지지 않는 걸까. ◇ 세대 차이의 이유 우리가 말하는 세대 차이는 결국 ‘시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세대는 같은 시대를 살지만,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는 않다.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이를 ‘동시대의 비동시성(the non-simultaneity of the simultaneous)’이라 불렀다. 그는 “모든 사람은 완전한 동시대적 가능성 속에서 나이가 같은 사람들과,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각 개인에게 동일한 시간은 다른 시간이며,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자기 자신만의 시대다”라고 말했다. 단적인 예로 세월호와 같은 시대적 사건을 모두가 함께 목격했더라도, 청소년과 어른의 시선과 해석은 같을 수 없다. 청소년은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따르면 안

[세상은 여전히 따뜻한 法] 법의 문턱 밖에 선 아이들

법무법인(유) 로고스는 보다 책임 있는 이웃사랑 실천과 체계적인 사회공헌을 위해 2011년 11월 17일 사단법인 ‘희망과동행’을 설립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다문화, 한부모 가정, 청각장애 청소년 등 취약계층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멘토링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해왔다. 그리고 2024년 8월, 주무관청이 법무부로 이관된 이후에는 법률 지원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단계의 공익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우리는 오랜 파트너십을 맺어온 지방자치단체 및 산하 기관과 함께 법률구조지원 활동을 재개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가 처음 만나게 된 한 청소년이 있었다. 외국인 어머니의 품에 안겨 갓난아기 때 한국에 들어온 아이였다. 한국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국적도 한국, 모국어도 한국어였다. 어린이집부터 중학교까지 공교육을 받았고, 친구들도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 누구도 이 아이를 ‘외국인’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저 대한민국에서 자라온 ‘한국 아이’였다. 그러나 부모의 이혼과 함께 상황은 급변했다. 어머니가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가 제기한 친생부인 청구가 법원에서 인용되면서, 아이의 기본증명서와 가족관계증명서 등 신분 기록이 모두 폐쇄됐다. 우리나라 국적법은 원칙적으로 혈통주의를 따르며, 친생부인 인용 판결에는 소급효가 인정된다. 판례는 없지만, 이 경우 아이는 ‘처음부터 한국인 아버지와 혈연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법적으로 간주되면서 국적 취득의 효력까지 사라진다. 하루아침에 ‘한국인 청소년’이 ‘불법 체류 외국인’으로 변한 것이다. 이름은 남아 있었지만, 사회가 인정하는 신분은 사라졌다. 다니던 학교는 교과서를 반납한 뒤 떠나야 했고, 살던 공공임대주택 역시 더는 거주할 수 없게 됐다. 국적법, 다문화가족지원법, 공공주택특별법 어디에서도 이 상황을

[Who Cares Wins] UNGC 25년, ‘사람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를 향하여

“세계의 기업인들과 유엔이 함께, 공유된 가치와 원칙에 기반한 ‘글로벌 콤팩트(Global Compact)’를 시작합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장경제에 인간적인 얼굴(human face)을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코피 아난, 1999년 다보스포럼 연설 중에서 25년 전, 이 한 문장은 세계 기업사(史)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제안한 UNGC(UN Global Compact)는 인권·노동·환경·반부패 등 네 영역에서 기업이 책임 있는 행동을 약속하자는 선언이었다. 시장경제에 ‘인간의 얼굴’을 회복시키자는 시대적 제안이었다. 출범 당시 44개 기업으로 시작한 UNGC는 현재 160여 개국, 2만5000여 개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의 지속가능성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UNGC는 2004년 ESG 개념을 고안해 금융·자본시장의 언어를 바꿔놓았다. 주요 금융기관과 함께 ‘책임투자원칙(PRI)’을 만들고, 투자와 경영의 패러다임을 지속가능성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UNGC의 10대 원칙은 ESG 경영의 뿌리가 되었으며, 각국 정부의 지속가능성 정책과 공시제도, 책임투자 체계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후 UNGC는 ‘자발적 선언’을 넘어 ‘실행 중심의 글로벌 표준’으로 진화했다. 공공과 민간의 경계를 넘어 협력의 플랫폼을 구축했고, 기업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지속가능한 시장 생태계를 만들어왔다. 기업과 사회가 대립이 아닌 상생의 구조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모델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지난 20여 년간 UNGC Network Korea를 중심으로 380여 개 기업이 참여해 왔다. 정부·국회·시민사회·언론 등과 협력하며 ESG 생태계를 조성했고, 기업들이 지속가능경영을 내재화하도록 실질적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한 기업의 여정은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ESG 규제와 시장이 자리 잡았고, 이제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여성이사, 기업에 정말 도움 될까

ESG 경영이 기업의 장기적 가치 창출과 리스크 관리의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사회 다양성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가 됐다. 글로벌 주요 기관투자자들은 다양성을 주주가치 창출의 핵심 동력으로 보고, 다양성이 부족한 기업에는 과감히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기업의 논의는 여전히 ‘법적 의무 충족’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성 이사 수를 늘리면 ESG 성과가 개선될 것이라는 단순한 기대는 ‘평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이사회 다양성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최적의 균형점’을 찾는 데 있다. ◇ 숫자보다 중요한 건 ‘균형’…커피 블렌드의 법칙 최고의 ESG 성과는 단순히 여성 이사 수를 늘린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균형’이다. 이사회의 성별 구성을 이해하려면, 이를 마치 ‘커피 블렌드’에 비유해볼 수 있다. 좋은 커피 한 잔은 콜롬비아·브라질·에티오피아 등 서로 다른 원두의 개성과 향미가 정교하게 어우러질 때 완성된다. 콜롬비아 원두만 100% 사용하거나, 혹은 단순히 모든 원두를 1:1 비율로 섞는다고 해서 반드시 최고의 맛(최고 ESG 성과)이 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핵심은 각기 다른 특성이 만들어내는 조화, 즉 ‘황금 비율’을 찾는 데 있다. 유럽 25개국 1878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게데스(Geddes)와 그뤼블러(Gruebler)의 2025년 연구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여성 이사 비율이 높을수록 ESG 성과가 꾸준히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을 지나면 오히려 효과가 떨어지는 ‘역(逆) U자형 관계’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이사회의 남녀 성별 구성이 어느 정도일 때 가장

[임팩트의 좌표] 사회서비스 혁신 스타트업은 누가 돌볼 것인가

추석 연휴에 오랜만에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늘 건너던 다리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난간 위로 높게 세워진 철제 구조물은 장식이 아니라 자살 방지용 안전 펜스였습니다. OECD 자살률 1위를 20년째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 그렇게 일상 속 풍경으로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초, 그 문제를 기술로 풀어보려던 한 스타트업이 조용히 문을 닫았습니다. AI와 심리치료 이론을 결합한 디지털 멘탈 테라피 플랫폼을 개발하던 팀이었습니다. 데이터 기반으로 우울과 불안을 조기에 감지하고 회복을 돕는 시스템이었지만, 마지막 시리즈 투자 유치에 실패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서비스’는 오랫동안 ‘돌봄’의 다른 이름으로 사용돼 왔습니다. 그러나 법적 정의는 훨씬 넓습니다. 사회서비스는 복지·보건의료·교육·고용·주거·문화·환경 등 전 영역에서 상담, 재활, 정보제공, 역량개발 등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는 제도입니다. 즉, 복지의 세부사업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사회 인프라입니다. 정신건강, 장애인 재활, 청년의 사회복귀, 주거 취약계층의 자립, 시니어의 일자리와 디지털 접근성, 교육격차 해소까지, 이 모든 영역이 사회서비스의 스펙트럼 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시선은 여전히 ‘대면 돌봄 서비스’에 머물러 있습니다. ◇ “복지부는 돌봄, 창업은 중기부”라는 경계가 만든 사각지대 이 구조적 한계는 부처 간 역할 구분의 경직성에서 비롯됩니다. 보건복지부는 바우처와 복지시설 중심의 사회서비스를 담당하고, 창업 초기 기업 지원은 중소벤처기업부의 영역이라는 암묵적 원칙이 작동합니다. 복지부는 ‘현장 돌봄’ 중심으로, 중기부는 ‘시장성’ 중심으로 지원체계를 설계합니다. 결국 두 부처 사이에서 사회서비스 혁신 스타트업들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입니다. 예를 들어 복지부의 스마트 사회서비스 시범사업은 AI·로봇 등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임팩트 스케일업, 스타트업 문법을 거부하다

‘스케일업(Scale-up)’은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다. ‘스타트업(Start-up)’이 말 그대로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라면, 스케일업은 그 이후의 성장 단계, 즉 제품과 서비스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제공하며 사업의 규모를 키워나가는 과정을 뜻한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제품 판매량이나 사용자 수를 늘려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스케일업의 성공으로 본다. 그렇다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조직에게도 같은 공식이 통할까? 사회혁신 조직의 목적은 단순한 매출 성장이나 이윤 증대가 아니라,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변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회혁신 조직은 제품이나 서비스 보급을 넘어 제도와 정책의 개선 등 구조적 변화를 추구한다. 이런 이유로 사회혁신 조직에게 ‘더 많이 판매하는 것’이 곧 ‘더 큰 임팩트’를 의미한다고 보긴 어렵다. 사회혁신의 관점에서 성장과 성공은 단순한 양적 확장이 아니라,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구조를 이해하고 그것을 바꾸는 방향으로 정의될 수 있다. ◇ 사회혁신 관점에서 다시 정의한 ‘스케일업’ 캐나다의 맥코넬 재단(McConnell Foundation)은 스타트업의 성장 논리와는 다른, 사회혁신의 관점에서 스케일업을 새롭게 정의한다. 사회혁신형 스케일업은 단순히 제품 판매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법·정책·제도의 변화를 통해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 영향을 확산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반면, 성공적인 모델이나 서비스를 다른 지역·조직으로 복제·확산하는 것은 ‘스케일아웃(Scale-out)’으로 구분된다. 또 사람들의 인식·태도·행동이 바뀌며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변화가 뿌리내리는 것을 ‘스케일딥(Scale-deep)’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경력보유여성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사회혁신 조직을 떠올려보자. 이 조직의 목표는 출산이나 육아휴직 이후에도 여성이 경력을 이어가고, 자신의 전문성을 다시 사회

[임팩트비즈니스 인사이트] 임팩트 생태계, 인재 이탈 막는 ‘머무름의 언어’ 찾을 때

올해 유독 임팩트 생태계의 ‘인재’를 조명하는 기사들이 두드러졌다. 새로운 리더십을 조명했던 ‘임팩트 생태계 ‘90년대생 리더십’ 시대 열렸다’가 그러했고, 생태계에 필요한 새로운 청년의 언어를 살펴본 ‘이 언어는 누구의 것인가: 청년이 다시 쓰는 임팩트’가 그러했다. 서울숲임팩트클러스터가 조성된 지도 어느덧 10여 년. 수많은 이들이 이 생태계에 발을 들이고, 또 떠났다. ‘맨 땅에 헤딩’하듯 스타트업을 일구던 시절이 지나, 한때 ‘영원한 주니어’로 불리던 이들이 이제는 팀장, 매니저, 책임 매니저 등 시니어 레벨로 자리 잡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솔루션을 고도화하며 생태계의 중추로 성장했다. 하지만 생태계가 성숙하고 솔루션이 다변화할수록, 인재 유입과 육성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지고 있다. 대학과 연계해 인재를 끌어오던 기존 전략은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위축됐다. 여기에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긴 호흡의 ‘장거리 달리기’ 속에서 회의감을 느끼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저 좋은 마음’만으로는 업을 지속하기 어려운 시대다. 임팩트 비즈니스가 ‘착한 일’이 아닌 ‘지속 가능한 일’로 인식이 바뀌었듯, 이제는 이 장거리 달리기를 계속할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임팩트스퀘어는 지난 13일, 자체 미디어 ‘임팩트 비즈니스 리뷰’를 통해 그룹 인터뷰(FGI) 아티클 ‘인재를 지켜라! 그런데, 어떻게?’를 발행했다. 임팩트 생태계의 서로 다른 조직 형태와 경력, 업무 지속 여부를 지닌 4명의 구성원을 초청해,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생태계 구성원들의 솔직한 속내를 통해,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핵심 아젠다를 찾아보려는 자리였다. ◇ 금전보다 ‘성취’와 ‘성장’의 갈증이 커 FGI를 기획하며 임팩트스퀘어는

[기후 유니버스] ‘실현 가능한 NDC’라는 핑계에 대하여

2035 NDC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NDC란 파리협정에 따라 5년 주기로 각 국이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얼마나 줄일 지 제시하는 목표를 의미한다. 엄밀하게 보면 ‘국가 결정 기여(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로 감축목표 외에 적응, 재원 등 다른 내용도 포함되지만, 이 글에서는 국내 여론과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법제화 과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따라서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의미한다고 해두겠다. 정부가 11월 초까지 2035 NDC를 확정하기로 발표한 가운데 4가지 복수안(48%, 53%, 61%, 65%)을 제시했다. 6차례 정부 주도로 토론회가 진행되었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서 필자가 눈 여겨 본 것은 48%를 주장하는 산업계였다. 산업계의 의견은 2가지로 요약된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해 업황이 어렵고, 국내적으로는 정부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단기 감축 비용 부담이 크다는 것. 필자가 탄녹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4년 전 2030 NDC 수립 당시에도 ‘실현 가능성’을 이유로 산업계는 40% 목표에 반대했는데, 그 때와 똑같은 주장에 기시감을 느꼈다. NDC 목표치에 대해서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실현 가능성’을 논한다면 최소한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산업계는 영업 기밀이라는 이유로 감축수단별 감축량, 배출원단위, 설비 전환 계획 등 필요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지 않다. 정부 지원금이 얼마나 필요한 지만 말한다. 작년 기준 2050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한 국내 기업은 41곳이며, 주요 대기업은 로드맵과 청사진도 발표했다. 개별 기업은 앞다투어 탄소중립을 내세워 홍보하고, 기업 10곳 중 7곳은 탄소중립이 기업 경쟁력에

[임팩트로의 초대] 한·일 협력으로 여는 동아시아 임팩트 투자 리더십

최근 몇 달 동안 홍콩, 싱가포르, 중국, 일본을 차례로 방문하며 아시아 임팩트 투자 생태계의 흐름을 직접 확인했다. 각국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회적 자본을 키우고 있었고, 그 속도와 방향은 뚜렷하게 달랐다. 홍콩에서는 가족 자산을 기반으로 한 ‘패밀리 오피스형’ 임팩트 투자 생태계가 눈에 띄었다. 세대교체와 함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자산가들이 직접 임팩트 펀드를 조성하거나 벤처 투자에 참여하는 사례가 늘고 있었다. 싱가포르는 국부펀드 테마섹(Temasek)을 중심으로 임팩트 투자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테마섹은 단순한 정부 자본이 아니라, 사모펀드처럼 적극적으로 투자하면서도 장기적인 관점으로 ESG·임팩트 투자를 주도한다. 이런 흐름 속에서 민간 투자자와 패밀리 오피스가 잇달아 등장하며, 싱가포르는 아시아 임팩트 자본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중국은 제조업 기반과 기술 집적도를 바탕으로 기후테크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재생에너지, 배터리, 전기차를 중심으로 한 탈탄소 산업 육성이 국가 성장 전략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관련 투자와 기술 개발이 급증하고 있었다. 이처럼 아시아 각국은 서로 다른 모델로 임팩트 투자 생태계를 키워가고 있다. 어떤 곳은 민간 자본의 역동성이, 또 다른 곳은 제도적 자본의 장기성과 안정성이, 또 다른 곳은 산업·기술 혁신의 힘이 생태계의 성장 동력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강점이 맞물릴 때, 아시아는 새로운 자본의 연대와 성장의 축을 만들어낼 수 있다. ◇ 한국과 일본, 같은 사회문제 앞에서 마주한 가능성 특히 한국과 일본의 협력에 주목할 만하다.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산업과 투자 생태계 차원의 교류는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보이지 않는 가난,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복지가 필요한 이유는 특정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2023년, 미국 시빅테크 단체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에서 데이터 과학자로 일하면서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책을 썼다. 이듬해 학계로 돌아와 2026년 1월부터 노스캐롤라이나대 채플힐(UNC-Chapel Hill) 정책학과 교수로 부임한다. 이 책은 미국 대학 교수로서의 연구 실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학술 도서가 아닌 대중서이고,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썼기 때문이다. 더구나 돈을 벌기 위해 쓴 책도 아니다. 오히려 집필 과정에서 ‘급속 노화’를 경험했다. 책 출간으로 필자가 개인적으로 얻은 것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펜을 든 이유는 사회적 의미 때문이다. 이 책은 공익 목적의 데이터 과학을 한국에 처음 소개한 한국어판 저서다. 나아가 복지가 필요한 이유가 ‘사람이 문제여서가 아니라 상황이 문제이기 때문’임을, 그리고 데이터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과 경험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 가난은 ‘보이지 않는 문제’다 가난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필자가 10년 넘게 살아온 샌프란시스코 항만 지역을 찾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란다. 거리에 노숙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시(市) 통계에 따르면 노숙자는 2005년 5404명에서 2015년 7008명으로 늘었고, 지금은 8323명에 이른다. 거리에서 사는 삶은 위험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스레 모여 ‘노숙자촌’을 이룬다. 한국에서 온 방문객들이 이런 지역 근처 호텔에 묵었다가 뜻밖에 노숙자촌을 마주하고 당황하는 경우도 있다. 노숙자의 모습은 미국이라는 강대국, 그러나 불완전한 선진국이 안고 있는 빈곤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인구 약 90만 명의

[지금은 인구테크] 닫힌 지역은 죽고, 열린 도시가 산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 중 하나는 인구 감소와 지역 소멸이다. 이미 120곳이 넘는 지방이 ‘소멸 위기 지역’으로 분류됐고, 전체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절반 이상이 향후 30년 내 인구 소멸 위험군에 속한다. 농촌뿐 아니라 중소도시까지 인구가 급격히 줄며 학교·병원·기업이 사라지고, 지역 경제의 순환 구조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출산 장려, 청년 지원, 정주 여건 개선 등 각종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효과는 제한적이다. 결국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닫힌 공동체로 남아 쇠퇴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의 인재와 기업을 불러들여 새로운 활력을 창출할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열린 인구테크(Open Population-Tech)’ 전략이다. 해외 기업과 인재가 지역으로 들어와 정착하고, 이를 통해 지역이 다시 살아나는 구조적 전환이다. ◇ 한국의 현실, 그리고 기회 일본 후쿠오카시는 2014년, 일본 최초의 글로벌 창업·고용 창출 특구로 지정돼 외국인 창업자들이 몰려드는 생태계를 구축했다. 싱가포르는 월 소득 3만 싱가포르달러(한화 약 3000만원) 이상 고소득자나 예술·과학 분야의 우수 인재를 대상으로 한 장기체류비자(ONE Pass)를 운영한다. 5년간 유효하며 가족 동반 정주도 가능하다. 포르투갈 리스본은 세계 최대 스타트업 행사 ‘웹서밋(Web Summit)’을 통해 도시 브랜드 전략으로 삼았다. 매회 7만 명이 넘는 참관객과 수천 개의 스타트업, 투자자가 모이는 이 행사는 리스본을 글로벌 IT 허브로 끌어올렸다. 이처럼 인재와 기업 유치는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라, 도시와 지역의 생존 전략이 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인프라를 갖췄고, K-컬처의 브랜드 파워와 콘텐츠·바이오·제조 등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임팩트 측정, 숫자에서 맥락으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프로그램은 특정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긍정적 변화를 만들기 위해 설계된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사회적 임팩트를 만드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변화이론(Theory of Change)은 사회적 임팩트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도식화한 개념이다. 보통 투입(Input)–활동(Activity)–산출(Output)–성과(Outcome)–임팩트(Impact) 단계로 설명된다. 영유아 어머니를 대상으로 영양 상담과 보충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보자. 어머니들이 영양 지식을 배우고 행동을 바꿔 영유아의 영양 상태를 개선한다는 설계다. 보충식을 함께 제공해 영양 상태 개선을 돕는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현장에서는 어머니들이 배운 ‘영양 지식’과 실제 ‘영양 실천’ 사이에 큰 간극이 있었다. 방글라데시 농촌에서는 식재료 구매와 식단 결정권이 남편이나 시어머니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어머니들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배운 걸 쓸 수 없다”고 말했다. 보충식도 ‘추가’가 아니라 기존 식사 ‘대체’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 효과가 제한적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럼에도 영유아 영양 지표가 개선됐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프로그램의 힘이 아니라 당시 풍년으로 쌀값이 떨어진 덕분이었다. 쌀값 하락으로 가정이 더 쉽게 쌀을 구입하면서 아이들의 영양 상태가 좋아진 것이다. 이 사례는 시사점이 크다. 초기 변화이론만 근거로 정태적으로 임팩트를 측정하면 실제 맥락의 불일치를 놓치기 쉽다. 프로그램은 수혜자 환경과 상황에 따라 계속 바뀌는데, 고정된 변화이론에 데이터를 억지로 끼워 맞추면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임팩트 측정의 본질, 즉 ‘프로그램 개선을 위한 학습(lessons learned)’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왜곡된 인사이트를 낳을 수 있다. 물론 통제집단을 설정해 효과성을 검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