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정호 가로
더 큰 임팩트를 위하여 : 믿고, 나누고, 함께하라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

한국의 필란트로피는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정부와 시장이 쉽게 나서지 못하는 지점을 겨냥할 수 있는 필란트로피의 가능성은 앞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필란트로피의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그 임팩트까지 자동으로 커질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에 가깝다. 수많은 난제가 사회 전반을 가로막고 있는 지금, 중요한 것은 필란트로피를 통해 흘러 들어가는 재원이 ‘얼마나’ 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필자는 연구를 통해 필란트로피의 임팩트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해 왔다. 실제로 미국의 필란트로피는 지난 세기부터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험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각양각색의 재단들이 축적해 온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시행착오의 경험은, 앞으로 한국 필란트로피의 방향을 가늠할 중요한 참고점이 될 수 있다. K-필란트로피 이니셔티브가 미국의 새로운 필란트로피 흐름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믿다 – 신뢰를 설계하다 ‘신뢰’는 최근 미국 필란트로피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미국의 다수 재단은 비영리 조직을 비롯한 파트너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회문제 해결을 도모해 왔다. 전통적으로 재단은 파트너가 제출한 계획을 심사하고, 계획대로 자금이 집행되는지를 관리·감독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임팩트의 현장에 발을 딛고 있는 파트너는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가장 잘 아는 반면, 이를 지원하는 재단은 그 정보를 온전히 공유받기 어렵다. 이 같은 정보 비대칭은 재단으로 하여금 각종 서류와 절차를 요구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력·시간의 낭비, 즉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은 한정된 필란트로피

[사회혁신발언대] 부의 품격, 유산기부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린아이 생명을 구해주세요(When you leave this world, Save the Children).”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13년 유산기부 캠페인을 하면서, 기부자와 대중에게 유산기부 가치와 철학, 세이브더칠드런의 미션을 대중에게 각인시켜 줄 메시지를 개발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직원과 외부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머리를 맞대고 나온 메시지다. 간결하면서도 임팩트가 있다. 유산기부에 대한 가치와 철학, 삶과 죽음, 생명의 소중함과 돌봄,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 의식 등이 이 한 문장에 담겨 있다. 106년의 역사를 지닌 세이브더칠드런의 핵심가치와 이념이 이 한 문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유산기부, 액수와 방법 제한 없어 최근 1인 가구 비율이 36.1%, 804만 가구가 넘는다는 기사가 보도된 바 있다. 이 가운데 70세 이상이 20%를 차지한다. 저출산으로 비혼, 무자녀 부부도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비혼·무자녀 부부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며, 재산을 물려줄 직계 자녀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인구 구조적 변화와 시민의식 향상으로 유산기부자들이 하나둘씩 나오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유산기부 문화 측면에서 후진국이다. 전체 기부금은 2023년 기준 개인·법인 기부금 총액이 16조 원이며 이 중에서 유산기부 비중은 약 1%이다. 이 비율이 각각 8%와 30%인 미국과 영국은 유산기부 문화 선진국으로 꼽힌다. 미국과 영국이 유산기부 선진국이 된 배경에는 부자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다. 2010년 6월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등 미국의 억만장자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사회혁신발언대] 2025년의 끝에서, ‘인구’보다 ‘관계’의 소멸을 걱정하다

연말이 되면 지난 한 해를 습관적으로 돌아보게 되는데, 올해는 유독 내년 그리고 다음의 10년이 부쩍 궁금해졌다. 인공지능을 통한 생산성과 산업, 그리고 개개인의 삶의 변화가 워낙 강렬해서일까? 한편으로는 풍요와 낙관적인 전망이 들면서도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동시에 생각해 보며, 앞으로의 미래를 설명하는 가장 선명한 문장이 ‘두 도시 이야기’의 한 문장이 아닐까 떠올랐다. ‘최고의 시대이자 동시에 최악의 시대’. 이러한 시대에 앞으로 나와 임팩트 생태계가 더욱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일지에 대한 실마리를 ‘존 칼훈의 랫 시티(Rat City)’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인구소멸에 대한 실험 보고서’라는 섬뜩한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인구 과밀이 사회 구조와 개인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던 연구를 소개한다. 실험 쥐를 대상으로 먹이, 공간, 안전, 온도까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진행된 ‘유토피아’ 실험집단은 시간이 흐르며 급격히 붕괴했다. 최초 걱정했던 인구 과밀이 문제가 아니었다. 풍요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폭력과 고립이 늘어나고 번식이 멈췄다. 실험 쥐가 소멸한 진짜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사회적 역할과 상호작용’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실험 쥐들은 성체가 된 이후에도 구애나 교미를 시도하지 않았고,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자신을 단장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실험은 ‘두 도시’ 모두에 속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문제는 자원의 결핍만이 아니라 구조의 붕괴에서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구감소’가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미래의 구조적 위기라고 이야기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구의 숫자가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왜 정책은 실패하는가

사회과학 가운데에서도 정책학은 비교적 젊은 학문이다. 전미정치학회(APSA·1903), 전미경제학회(AEA·1885), 전미심리학회(APA·1892), 전미사회학회(ASA·1905)는 모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발족했다. 이에 비해 정책학의 발전은 훨씬 더 늦다. 기존 사회과학을 토대로 정책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시기는 20세기 후반이다. UC 버클리와 듀크대는 각각 1969년과 1971년에 정책대학원을 신설했고, 같은 시기 하버드와 미시간대 행정대학원도 명칭을 정책대학원으로 바꾸며 연구와 교육의 초점을 정책으로 옮겼다. 정책학을 대표하는 학회인 정책분석관리학회(APPAM)가 설립된 것은 이보다 더 뒤인 1978년이었다. 정책학은 정책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출발했기 때문에, 특정 학문의 이론적 발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른 사회과학 분야와는 태생부터 달랐다. 정책학의 발전에는 대학뿐 아니라 포드 재단, 슬론 재단 같은 민간 재단, 랜드 연구소와 같은 정책 연구소가 깊숙이 관여했다. 일례로 정책학회의 설립에 큰 영향을 미친 기관 중 하나가 매스매티카(Mathematica Inc.)다. 한국에서는 수학 프로그램 ‘매스매티카’를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서 말하는 매스매티카는 1968년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설립된 정책 연구소다. 오늘날 이곳에는 2000명에 가까운 인력이 근무하며, 미국 전역의 공공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평가한다. 정책분석관리학회가 40세 미만의 유망한 정책학자에게 수여하는 ‘데이비드 커쇼상(David N. Kershaw Award)’은 1979년 37세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떠난 매스매티카 정책연구소 사장의 이름에서 따온 상이다. 1983년 이 상의 첫 수상자인 조셉 뉴하우스는 당시 랜드 연구소 연구원이었고, 이후 하버드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보건경제학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 “왜 정책은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가” 정책학계의 실용적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지난 2025년 11월, 나는

[기후 유니버스] 야 너도 태양광 할 수 있어

아파트, 주차장, 옥상 등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심심치 않게 태양광 패널을 볼 수 있다. 탄소중립 이행의 가장 핵심 역할을 하는 재생에너지, 그 중에서 태양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작년 수립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2030년까지 태양광과 풍력 설비 보급 목표는 72GW이며, 이 중 태양광이 약 75%(53.8GW)를 차지한다. 올해 새정부 출범 후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2030년 재생에너지 보급 목표를 100GW까지 늘리겠다고 했다. 자가 소비를 제외한 태양광 설비는 작년 기준 27.1GW로, 3~4배 이상 늘어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재생에너지가 최소한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럼 재생에너지가 더 많아지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변동성 문제를 보완할 ESS도 필요하고, 석탄과 원전 등 대형 발전원 중심의 전력망 운영 시스템도 바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수반되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혁신과 변화의 과정에는 양면이 있듯이, 재생에너지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측면도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 석탄, LNG 등 화석연료 대신 태양광, 풍력이 많아지면 에너지 수입 비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의 석탄, 석유, 천연가스 수입액은 1600억 달러, 약 234조 원에 달한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줄이면 그만큼 국제 에너지 가격으로 인한 충격도 줄어들고,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재생에너지로 인해 일자리도 새롭게 창출될 수 있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와 국제노동기구(ILO)는 2023년 전세계 재생에너지 일자리 수가 1620만 개로 2022년 보다 18% 증가했다고 밝혔다. 대다수의 일자리가 중국에서 창출되었는데, 이는

[김경하의 우문현답] 기업재단, 돈만 잘 쓰면 되는 곳 아닌가요?

“기업재단은 그냥 돈만 잘 쓰면 되는 곳 아닌가요?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남의 돈 쓰는 일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종종 듣는 질문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기부금을 정해진 기준에 맞춰 집행하고, 공시와 보고만 하면 역할을 다 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장을 조금만 가까이에서 보시면 이 질문을 쉽게 꺼내기 어려우실 겁니다. 어디에,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원을 흘려보낼지 결정하는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한 번의 선택이 어떤 지역의 복지 체계를 바꾸기도 하고, 반대로 몇 년간 쌓아 온 현장의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돈 쓰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돈을 ‘잘’ 쓰는 일은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모든 기업재단이 그런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잘하는 곳도 있고, 여전히 형식적인 집행에 머무는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잘 쓰인 돈이 한 사회의 흐름을 바꾸는 지렛대가 될 수 있고, 잘못 쓰인 돈이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더 고착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기업재단을 여전히 ‘감시와 감독의 대상’ 정도로만 상정하는 순간,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문제 해결의 주체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요즘 제 머릿속 질문은 조금 다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재단이라는 조직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존재일까.” 기부를 ‘얼마나’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자원과 구조를 가지고 ‘어디까지’ 상상해볼 수 있는지, 그 상상의 끝을 한 번쯤 밀어붙여 보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상상력이 없다면 위기 앞에서 늘

[ESG 월드뷰] UNGC 25년, ‘기술과 정의의 시대’를 향한 새로운 도전

2000년 여름, 뉴욕 유엔 본부. 전통적으로 국가 정상들만 오르던 단상 위에 이날은 IBM, BP, 노키아 등 다국적 기업 CEO들이 섰다. 1년 전 다보스포럼에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던졌던 화두, “사람의 얼굴을 한 세계화(Human Face of Globalization)”에 기업들이 직접 응답한 자리였다. 당시는 세계화가 거센 속도로 확장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환경 파괴, 인권 침해, 부패 문제가 계속 불거졌다. 유엔은 더 이상 정부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시장을 움직이는 실질적인 힘은 금융과 투자자였고, 유엔은 책임 있는 시장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기업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그렇게 탄생한 유엔글로벌콤팩트(UNGC)는 지난 25년 동안 ‘ESG’라는 키워드를 앞세워 ‘지속가능하고 회복력 있는 시장’이라는 새로운 표준을 세계에 확산시켜 왔다. 기업의 책임은 시장의 규범이 됐고, 지속가능성은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 지금, ESG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고 있다. 기후 대응 강화와 함께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등장한 것이다. ESG는 이제 환경과 인권을 넘어 ‘기술과 정의’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원칙에서 실천으로, 선언에서 시스템으로. ESG는 다시 한번, 시대의 화두를 묻고 함께 답을 찾아가야 할 때다. ◇ ESG, 국제기구와 기업이 함께 만든 새로운 시장 질서 UNGC가 출범한 2000년 당시만 해도 “기업이 인권·환경·반부패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제안은 실험적이었다. UNGC는 10대 원칙을 제시하고 기업을 국제 규범의 파트너로 초대했다. 기업들은 매년 ‘이행 보고서(Communication on Progress)’를 제출하며 원칙 준수 현황을 공개했다. 이 자발적 보고 체계는 훗날

[임팩트의 좌표] K-푸드 호황에도 지역 기업은 못 뜨는 이유

‘K-푸드’의 세계적 인기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합니다. 미국 대형마트의 선반 한 줄을 한국 식품이 차지하고, 동남아에서는 한국식 양념과 발효식품이 일상 소비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흐름이 실제 농식품 기업, 특히 지역 기업들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농림축산식품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농식품 수출액은 96억 달러로 최근 5년간 연평균 7%대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관세청 통계는 다른 현실을 보여줍니다. 전국 5만여 개 식품 제조업체 중 지속적으로 수출을 이어가는 기업은 2%대에 불과합니다. 즉, 세계의 수요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 수요를 지역 기업이 실제 성장으로 전환하지 못하는 구조적 단절이 존재합니다. ◇ 지역 산업의 강점과 글로벌 연결의 부재 한국의 농식품 기업들은 대부분 지역에서 시작되어 지역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지역성은 제품의 이야기, 원료의 우수성, 전통 기술 등 뚜렷한 강점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의 기준과 연결되는 순간 그 강점이 제약으로 전환되기도 합니다. 전남의 전통 장류 기업은 맛과 기술로 해외 구매자의 관심을 끌지만, FDA·EU 기준에 맞춘 설비와 안전성 체계를 갖추기 어렵습니다. 강원의 간편식 기업들은 지역 농산물 기반의 제품력은 높지만, 생산 확장과 해외 규제 대응이 요구하는 자본과 인력이 부족합니다. 제주의 기능성 식품 기업들은 꾸준한 해외 관심에도 불구하고 섬 지역의 물류비용과 계절성 생산 구조라는 구조적 제약을 넘기 어렵습니다. 지원은 존재하지만 대체로 ‘점’으로 흩어져 있어, 해외 시장까지 이어지는 ‘선’과 ‘면’이 비어 있는 성장 경로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임팩트 현장을 읽다] 성수는 ‘무한게임’ 중, 이제는 ‘정책 IPO’가 필요하다

얼마 전 싱가포르의 혁신 공간 ‘스케이프(SCAPE)’를 방문했을 때였다. 현지 담당자는 양철 지붕 아래 붉은 벽돌 담이 이어지는 공간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장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내가 답을 찾기도 전에 그는 말했다. “성수동이 모티브예요.” 그 짧은 문장이 오래 남았다. 성수가 서울의 한 구역을 넘어, 아시아 도시 기획자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언어이자 이미지가 되었음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투자자로서 지난 10년간 수많은 스타트업의 흥망을 지켜봤다. 살아남은 기업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승패를 가르는 ‘유한게임’이 아니라, 게임 자체를 지속시키는 ‘무한게임(Infinite Game)’의 플레이어라는 점이었다. 도시는 더더욱 그렇다. 개발을 끝내고 완공 테이프를 끊는 순간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민의 필요와 기술의 변화를 흡수하며 끊임없이 진화해야 한다. ‘무한게임’을 하는 도시만이 앞으로 살아남는다. ◇ 성수의 미래, ‘임팩트’에서 길을 찾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도시 행정은 여전히 ‘예측(Prediction)’ 중심에 머물러 있다. 예산 편성과 집행이 과거 데이터를 근거로 움직이는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혁신 스타트업은 보유한 자원을 활용해 즉시 시도하고 수정하는 ‘실행(Effectuation)’ 방식으로 불확실성을 기회로 바꾼다. 이 간극을 좁히지 못하면 도시는 금세 정체된다. 서울프라퍼티인사이트가 주최하고 성동구가 후원한 ‘2025 시티포럼 성수’에서도 핵심 질문은 동일했다. “어떻게 성수라는 지역이 꺾이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 실마리가 성수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임팩트’다. 엠와이소셜컴퍼니(MYSC)가 번역 출간한 ‘메이크 스페이스’는 “공간은 조직의 몸짓 언어(body language)”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성수의 몸짓 언어는 무엇인가. 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며 성장하는 모델’이라는 창업 생태계의 정체성이 그 해답이라고

신현상 교수
[임팩트 현장을 읽다] 아시아 기업사회공헌, 임팩트 중심으로 재편되다

최근 기업의 전략적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기업사회공헌 담당자들의 고민 역시 깊어지고 있으며, 과감하고 혁신적인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우수사례 발굴의 필요성 역시 커지고 있다. 20세기 경영·경제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바탕으로 한 주주이익 극대화”라는 소위 ‘프리드만(Friedman) 독트린’이었다. 1970년 뉴욕타임즈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만이 기고한 글에 따르면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 노력은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에 해당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전문경영자가 주주의 재산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것은 부적절할 뿐 아니라 자칫 배임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이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한다. 특히 2019년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에서 아마존·애플 등 글로벌 대표 기업들이 ‘이해관계자 중시 경영’을 공식 선언한 흐름을 감안하면, 프리드만식 관점은 시대 변화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힘을 얻고 있다. 반면 1984년 버지니아대 프리먼(Freeman) 교수는 기업과 사회를 명확히 나누는 이분법을 비판하며, 기업은 반드시 이해관계자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캐롤의 피라미드(Carrol’s Pyramid)’로 상징되는 전통적 CSR은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을 ‘의무’의 영역으로 본다. 경제적·법적·윤리적·자선적 의무를 다해야 하며, 특히 자선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좋은 기업시민’이 된다는 관점이다. 하지만 이는 자칫 일회성·시혜적 활동에 머물 위험이 있고, 이해관계자 범위가 크게 확장된 오늘날에는 기업이 어떤 기준으로 활동을 결정해야 하는지 모호해진다는 한계가 제기돼 왔다. ◇ 전략적 CSR의 부상…임팩트 지향형 모델로 진화하다 21세기 들어 주목받은 전략적 CSR은 사회공헌 활동이

[김경하의 우문현답] 임팩트 생태계에 ‘이찬혁적 사고’가 필요하다

“스포트라이트는 원래 제일 유명한 사람이 받는 것 아닌가요?” 얼핏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이,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가장 시대착오적인 우문(愚問)에 가깝다고 느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가수 이찬혁 씨가 선보인 무대는, 이 질문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장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면에 세우는 대신, 뮤직비디오 속에서 스쳐 지나가던 인물을 무대 앞으로 불러내 스포트라이트를 온전히 내어주었습니다. 노래와 안무, 카메라 동선과 조명이 모두 그 사람을 중심에 맞춰 재배치되는 순간, 이 무대의 ‘주연’은 조용히 바뀌었습니다. 예술적 완성도를 넘어 “누가 이 자리에 서야 하는가”를 다시 묻게 만든 연출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두고 많은 분들이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감각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주연과 조연을 나누던 위계 대신, 각자의 서사가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는 인식, 다양성을 배경이 아니라 구성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감각이었습니다. 선언적인 ‘포용’의 구호를 외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무대의 구조 자체를 바꿔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예술이 시대의 감각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이 무대는 지금 우리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압축해서 보여준 셈입니다. 이른바 ‘임팩트 생태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문제 해결을 내세우는 수많은 프로젝트가 존재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이는 여전히 자금을 대는 주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각종 홍보 기사나 영상 속에서 현장의 당사자는 종종 ‘감동적인 사례’를 위해 소환되는 조연으로 소비됩니다. 누가 기획했고, 누가 지원했고, 어느 기업이 참여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빼곡한 반면, 정작 그 변화로 삶의 궤도가 바뀐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흐릿하게

[세상은 여전히 따뜻한 法] ‘나누는 법’이 만드는 힘

‘나누는 法’은 우리 사회의 공익적 가치를 다루는 특별한 영역이다. 법률을 나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모두가 법의 권리와 의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돕는 일이다. 더 넓은 시각과 이타적 관점이 요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존중과 배려를 기반으로 한 이러한 나눔은 사회 구성원이 함께 성장하는 기반이 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나누는 法’은 1999년 사내 공익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치한 ‘공익활동위원회’에서 출발했다. 사각지대를 줄이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지속성’과 ‘진정성’을 원칙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2007년에는 공익 실현의 가치를 구성원 전체와 공유하기 위해 ‘공익활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후 2013년 5월에는 공익활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지원하고자 ‘김앤장 사회공헌위원회’를 출범시키며 틀을 갖췄다. 사회공헌위원회는 ‘동행과 나눔’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공익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찾아가는 법률교육, 공익단체 법률 지원, 사회봉사, 법제도 개선 등 활동 분야도 폭넓다. 특히 법률지식을 직접 나누는 사업을 중점에 두고 다문화가족, 소상공인, 탈북민, 해외 청소년 등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법률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확장해 왔다. 플랫폼 기반 접근의 필요성을 반영해 법률 교구와 맞춤형 콘텐츠도 제작하고 있다. 미래세대를 위한 법교육은 핵심 사업으로 꼽힌다. 2022년부터 국내외 청소년과 함께 문제 해결 중심의 프로그램인 ‘리걸마인드로 더 나은 세상 만들기(리더)’를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시와 협약해 성인 청년을 위한 법교육 프로그램도 시작했다. 젊은 세대가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발판을 넓히겠다는 취지다. 최근에는 유산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