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썸네일 가로형
[영리한 비영리] 재난을 이기는 희망, 회복탄력성과 비영리

삽시간이었다. 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군 안평면에서 시작된 산불은 빠르게 한반도를 불태웠다. 성묘객의 실화로 추정되는 산불은 강풍과 건조한 날씨를 만나 안동, 영덕, 청송 등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번졌다. 3월 28일 주불이 진화되기까지 산불은 149시간 동안 지속됐다. 이번 산불로 소실된 산림은 9만9490헥타르(ha). 여의도의 약 343배, 서울시 면적의 1.6배에 이른다. 산림청에 따르면 이 정도 규모의 산림이 생태적 기능을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최소 30년에서 100년까지 걸릴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조림을 넘어 생물다양성과 토양 복원을 포함하는 장기적 과제가 됐다. 인명 피해도 컸다. 사망자는 총 28명으로, 대부분이 60~80대 고령자였으며 진화 작업 중 헬기 추락으로 조종사 1명이 사망하는 등 구조 인력의 피해도 일어났다. 부상자는 71명으로 집계됐고 이 중 다수가 대피 중 불길에 휘말리거나 구조 작업 중 사고를 당했다. 한반도에 불어닥친 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 기후위기, ‘불타는 한반도’로 돌아오다 이런 대규모 산불 발생의 이면에는 기후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건조한 날씨와 강풍, 그리고 인간의 부주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분석된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국내 산불 피해 면적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2022년 삼척 산불은 약 1만 6000 헥타르(ha)의 산림을 태웠고 복구 과정에서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시간이 소요됐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지난 5년간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 피해 면적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호주와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도 이례적인 규모의 산불을 비롯한 다양한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고 있다. 유엔환경계획(UNEP)은

[돌봄의 재발견] 밥은 밥솥이 하지만, 돌봄은 머리가 한다

그날도 머리를 너무 덜 쓴 게 문제였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던 13개월 아이를 두고 출근한 날이었다. 절대 빠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미팅을 마치고 나서야 아이의 열이 높아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급히 동네 소아청소년과로 향했다. 북새통인 대기실에서 울며 보채는 아이를 안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결국 열경기를 일으켰다. 공포에 휩싸인 그 순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겨우 안정시킨 뒤에서야, 병원에 오기 전 해열제를 먹였어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그날의 모든 결정이 안일했다. 미팅이 정말 중요했을까. 조금 멀더라도 더 한산한 병원을 찾아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는데. 돌봄이란 거창한 단일 결정이 아니라, 크고 작은 판단의 연속이다. 그 긴장이 풀리는 순간 후회는 언제든 찾아온다. ‘머리를 덜 썼다’는 자책은 육체적 피로보다 오래 남는다. ◇ 밥보다 힘든 건, 머리로 하는 돌봄 돌봄을 단순한 신체 노동으로만 인식한다면, “밥은 밥솥이 하지 않느냐”는 말도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돌봄 노동자의 머릿속이다. 냉장고에 어떤 식재료가 있는지, 누가 무엇을 먹고 싶어하는지, 언제 장을 볼 수 있을지, 식사 시간을 어떻게 조율할지, 업무 스케줄과 식사 준비를 동시에 고려하며 움직이는 ‘인지적 노동’이야말로 돌봄의 본질이다. 조직과 사회는 돌봄의 복잡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루트임팩트는 이 복잡한 머릿속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정량 지표나 단편적 현상 이면에 있는 돌봄의 서사를 파악하고, 돌봄이 우리의 심리와 정서에

[공익이 이끄는 데이터 과학] 공공 영역 인공지능, 쓰긴 쉬워도 잘 쓰긴 어렵다

미국 정부가 인공지능(AI)을 공공정책에 도입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다. 미 연방정부는 2022회계연도에만 인공지능 관련 조달 계약에 20억 달러(한화 약 2조9200억 원)를 썼다. 불과 5년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액수다. 국가 안보부터 복지 행정까지, AI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 투입되고 있다. 이처럼 막대한 공공 자금이 인공지능에 투입되는 시점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인공지능 도입 자체는 쉬울 수 있지만, 인공지능을 정확하고 공정하게 잘 쓰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미국의 다양한 사례는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최근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해 AI가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지만, 사실 미국 공공 부문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한 알고리즘 기반 업무 자동화는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왔다. ◇ 성공한 AI와 실패한 AI의 차이는?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우정공사다. 약 52만 명의 직원을 둔 미국 최대의 공공기관 중 하나인 우정공사는 하루 평균 3억1800만 통의 우편물을 전국에 전달한다. 따라서 업무 효율화를 통한 비용 절감은 이 기관의 큰 과제다. 1990년대, 우정공사는 손으로 쓴 우편번호를 자동 분류하기 위해 신경망 기반 인공지능 기술을 도입했다. 이 시스템은 매일 약 5500만 통의 수기 주소 우편물을 98퍼센트 이상의 정확도로 처리했고, 1997년 한 해에만 1억 달러, 약 1460억 원의 비용을 절감했다. 이 사례는 잘 정의된 문제에 적절하게 설계된 인공지능이 막대한 공공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반면, 미시간주의 실업수당 시스템은 인공지능이 잘못 설계될 경우

[임팩트비즈니스 인사이트] 아이에게 좋은 투자는 결국 모두에게 좋다

“투자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까?” 최근 글로벌 임팩트 투자 시장에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개념이 있다. 바로 아동관점투자(이하 CLI, Child-Lens Investing)다. 단순히 아동을 위한 복지를 넘어, 아동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해로운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자본을 배분하는 전략이다. 유니세프가 개념을 제안했고, 유럽과 북미의 주요 임팩트 투자기관들이 관심을 보이며 관련 지표 개발과 사례 발굴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국내에선 임팩트스퀘어가 이 흐름에 발맞춰 ‘아동’을 임팩트의 중심 축으로 삼았다. 많은 투자자들이 고령화 대응에 집중하며 시니어 시장을 주목하고 있지만, 이 시장은 소비 중심 구조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반면, 아동은 시간이 흐르면 생산자이자 소비자로 전환되는 존재다. 아동의 삶에 투자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의 순환 구조를 유지하고, 사회 전체의 기반을 다지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임팩트스퀘어는 바로 이 가능성에 주목했다. 아동이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하는 것이 미래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조건이라는 판단이다. 아동에게 투자하는 것은 미래 사회의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건강한 수요와 공급의 균형 속에서 지속 가능한 시장을 만드는, 임팩트와 수익의 교차점에 선 투자다. ◇ CLI, 아동을 바라보는 네 개의 창 CLI는 유니세프가 처음 제안한 개념이다. 아동의 생존, 발달, 보호, 참여를 기준으로 투자 전략을 세우는 방식이다. 유니세프는 여기에 ‘Child-Lens Metrics Bank’라는 자료를 더해, 총 150여 개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CLI가 낯선 이들에게 이 프레임은 너무 방대하다. 임팩트스퀘어는 이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핵심을 재구성했다. CLI의 주요

[우리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며칠 전, 딸의 방을 정리하다 숙제 노트 한 구석에 적힌 문장을 발견했다.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 흔히 듣던 우리 속담이 영어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결국 좋은 친구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늘 곁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는 듯하다. 요즘 국제사회는 우리에게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어떤 친구인가?” 최근 미국, 영국 등 주요 원조 공여국들이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을 잇달아 대폭 삭감했다. 미국은 국제개발처(USAID) 구조조정과 함께 진행 중인 ODA 사업의 90%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은 2027년까지 원조 예산을 국내총소득(GNI)의 0.5%에서 0.3%로 줄인다고 밝혔는데, 이는 약 40%의 감축이며 줄어든 예산은 국방비를 증액하는 데 쓰인다고 한다. 독일, 네덜란드도 10% 규모의 감축안을 내놨으며, 일본 역시 엔화 가치 하락으로 원조 확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문제는 단순한 예산 감소가 아니다. 지금까지 다자주의를 통해 쌓아온 국가 간 신뢰와 연대, 책임의 약속이 함께 흔들리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충격은 국제보건 분야에서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다. 기후변화와 분쟁의 확산으로 감염병 위협은 커지고 있지만, 이를 대응하는 국제 보건 재정은 오히려 줄고 있다. 공여국들의 재원 축소로 인해 보건 시스템 강화와 백신 보급 등 주요 프로그램이 차질을 빚고 있으며, 국제기구들조차 사업 축소를 검토하는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드물게 ODA를 지속 확대하고 있는 국가다. 2024년

[기후 유니버스] 연금개혁하면 기후위기는 어떻게 될까요?

지난 3월 20일, 여야 합의로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보험료율은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은 40%에서 43%로 높아졌다. 그러나 본회의 표결에서는 반대와 기권을 합쳐 84표가 이탈했고, 사흘 뒤 여야 30‧40대 의원들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개정안을 비판했다. 대학교 총학생회 등 청년 세대의 반발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국민연금 개정안은 명확하게 세대 갈등을 보여준다. 더 오래, 더 많이 보험료를 내야 할 미래세대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제한적이다. 부동산 자산과 연금을 모두 누리는 기성세대와 대비되는 구조다. 여기에 연금 부족분을 국고로 메우겠다는 방안 역시 결국 미래세대의 부담일 뿐이다. 군 복무 크레딧 기간 축소, 출생률 1.2명 가정 등도 젊은 세대를 배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 1213조 굴리는 연금…청년은 왜 불안한가 세대 갈등은 보험료율·소득대체율 같은 모수 개혁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납부한 보험료가 어디에, 어떻게 운용되는지도 핵심 쟁점이다. 국민연금은 작년 말 기준 1213조원의 기금을 굴리는 세계 3대 연기금이다. 지난해 수익률은 설립 이래 최고인 15%를 기록했고, 운용수익은 160조원에 달했다. 최근 5년 평균 수익률도 6.8%로, 글로벌 기준에서도 우량 투자기관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보험료 수지가 몇 년 뒤 적자로 전환된다는 점이다. 지난해 7월 국민연금연구원이 발표한 중기 재정전망(24-28년) 보고서에 따르면, 개혁안 통과 전 기준으로 2028년부터는 보험료 수입보다 연금 지출이 많아진다. 개정안 반영으로 시점이 다소 늦춰질 수는 있지만, 적자 전환 자체는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보험료 수지가 적자로 전환되면 기금 운용의 원칙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은 장기 수익률을 추구하지만, 연금

[논문 읽어주는 김교수] 공공의 ESG, ‘오용’ 아닌 ‘확장’입니다

“한국은 ESG를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Misuse).” 2021년 말, 한 영국 대학교수가 한국의 ESG 경영을 연구하러 왔을 때의 이야기다. 2주간 주요 기업과 공공기관, 학계 인사를 인터뷰한 그는 마지막 일정으로 필자를 만났다. 장소는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대학 앞.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ESG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은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ESG라는 단어를 남용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는 2시간가량 이어졌고, 특히 공공조직의 ESG 경영이 주요 화두였다. 당시만 해도 ESG 공시는 투자자와 기업을 위한 기준이 대부분이었고, 한국의 공공조직은 이를 그대로 끌어다 쓰려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모양새였다. 그 교수의 지적이 전혀 틀렸다고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로부터 2년. 필자는 경기도사회적경제원에서 본부장으로 일하며 공공영역의 ESG 경영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기회를 얻었다. 2023년에는 ‘경기도 ESG 기본계획 연구’를 발주했고, 도 내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ESG 경영 컨설팅 사업도 추진했다. 또 대학과 연계해 ‘ESG 선도대학’ 과정을 운영했으며, 올해는 주민참여예산 사업으로 ‘사회복지기관 및 사회적경제조직을 위한 ESG 경영 지원’을 준비 중이다. 해외도 변화를 맞고 있다. ESRS(유럽 지속가능성 보고기준)를 만든 유럽재무보고자문그룹(EFRAG)은 지난해 중소기업용 지속가능성 보고표준(VSME Standard)을 발표했고,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지속가능한 도시와 지역사회를 위한 ESG 항목’을 제시했다. 이제는 ESG가 수출기업이나 대기업뿐 아니라, 지방정부·10인 미만의 소기업·협동조합 등 다양한 조직에게도 구체적인 경영 전략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은 범위를 조금 좁혀 공공의 ESG 경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공공조직은 왜 ESG 경영을 해야 할까? 어떤 ESG

[돌봄의 재발견] 돌봄, 멈출 수 없는 일에 대하여

2018년생 아이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은 조용하고 단출했다. 백 명 남짓한 아이들과 가족들이 모여 치른 짧은 환영 행사였다. 운동장이 가득 차도록 어린이들이 모였고,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마이크를 타고 메아리치던 ‘국민학교’ 시절을 기억하는 내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전국 초등학교 입학생 수가 역대 최저를 기록한 올해, 폐교가 결정된 학교만 49곳에 이른다고 한다. 아이 수가 줄면 오히려 더 나은 교육 환경이 펼쳐질 줄 알았다. 작은 교실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우리 세대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라 기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국 아동·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여전히 OECD 최하위권이다. 교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중간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24년 기준 사교육비 총액은 39조 원. 역대 최고치다. 아이들은 줄었는데, 현장은 왜 더 힘들어졌을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 ‘돌봄’의 정의부터 다시 전문가들은 초저출산의 주된 원인으로 ‘돌봄 공백’을 지목한다. 특히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는 반복적으로 지적돼 왔다. 정부는 ‘빈틈없는 돌봄’을 표방하며 각종 정책을 확대 중이다. 육아휴직 기간과 급여는 꾸준히 늘었고, 배우자 출산휴가 의무화, 가족돌봄휴가 도입 등 일·가정 양립 지원도 강화됐다. 2025년부터는 ‘늘봄학교’가 본격화됐다. 이제는 아동 돌봄을 넘어 노인, 일상 돌봄까지 정책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다.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도 이 과제에 발맞춰 움직여왔다. 2017년에는 샤넬재단과 함께 ‘임팩트 커리어 W’를, 2020년에는 하나금융그룹과 함께 상생형 직장어린이집 ‘모두의숲’을 시작했다. ‘임팩트 커리어 W’는 육아로 유급노동시장을 떠났던 여성들이 다시 경력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2024년까지

김정태 엠와이소셜컴퍼니 대표
[혁신의 목격자] 내가 모르는 것을 함께하는 용기, 협력의 본질

얼마 전 우연히 본 포스터의 한 문장이 마음에 들어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극장엔 나를 포함해 몇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흥행에는 실패한 영화였지만,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마음에 담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지녔지만, 처음엔 각자 혼자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서로를 경계하고, 힘을 합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이들은 깨닫는다.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2017년 개봉한 영화 ‘저스티스 리그’ 이야기다. “협력의 어려움은 정답이 하나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고 ‘협력의 역설’ 저자 애덤 카헤인은 말한다. 정답을 확신할수록 타인의 답은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함께 일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영화 속 영웅들이 협력을 주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자 정답을 알고 있다고 믿었기에 협력은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비효율적으로 여겨졌다. 협력은 원래 난이도가 높은 일이다. 협력의 기본값은 ‘협력이 쉽지 않다’는 인정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우리는 협력을 종종 ‘분업’과 혼동한다. ‘외부에서 이런 협력 제안이 왔는데요?’라는 말에 조직 내부의 분위기가 미적지근해진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일을 나누고, 어려움을 줄이며, 에너지를 아끼려는 협력은 사실 분업에 가깝다. 분업의 반복은 협력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진짜 협력은 서로가 잘하는 것만 연결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협력은 한두 번 가능할 수 있지만 지속되기 어렵다. 공동 목표를 위해 컨소시엄을 형성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강점만을 기반으로 한 협력은 결과와 상관없이 다음에 다시 성사될 확률이 낮다.

[사회혁신가의 두 가지 언어] ‘취준생’이라는 취약계층의 등장,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올해로 겸임교수 4년 차다. 매 학기 학생들과 어울리며 수업을 넘어선 교류를 이어갔다. 때로는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 즐겁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3학년이 되고 취업 시즌이 시작되면, 학생들의 얼굴엔 근심이 드리워진다. 교내 카페에서의 짧은 수다도 사라진다. 웃음보다 침묵이 늘었고, 관계보다 경쟁이 앞선다. 학생들은 친구들과 멀어진 채, 외로운 취업 준비 기간을 보낸다. 대학 커뮤니티에는 이러한 형태의 ‘상실’이 있다. 취업 준비가 시작되면 우리는 서로를 잃어간다. 취업준비생, 이른바 ‘취준생’은 이제 명백한 취약계층이다. 임팩트 비즈니스 전문 조직 임팩트스퀘어는 사회 문제를 ‘구조적으로’, ‘다수의 구성원이’, ‘고통받는 상태’로 정의한다. 취준생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고착된 저성장과 끝나지 않는 경기침체로 사회 초년생들의 노동시장 진입은 구조적으로 어려워졌다. 부지런히 문을 두드리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몇 안 되는 인턴 자리를 얻기 위해 또 다른 인턴 경험을 쌓아야 하는 상황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한 번 인턴십을 경험한 학생들은 이를 바탕으로 두세 번의 인턴을 하며 스펙을 강화하는 반면, 처음 한 번의 기회를 잡지 못한 청년들은 다음의 기회에서도 계속 소외되는 악순환에 시달린다. 이 같은 양극화 속에서 충분한 기회를 경험하지 못한 취준생들은 자신이 영원히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일부 청년들은 사회로 나가는 것을 아예 거부하거나, 사회와 단절되는 고립·은둔 상태로 접어들기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2023)에 따르면 청년들이 고립·은둔을 하는 원인 1위는 ‘취업 실패(24.1%)’였다. 54만 명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고립·은둔 청년 중

[조직문화 pH 6.5] 생존의 갈림길, ‘턴 어라운드’를 만드는 한 끗

필자가 일하고 있는 진저티프로젝트는 올해 4월이면 11살이 된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것처럼 보였던 대표님들도 사실 창업 4년 차의 길을 걷고 있었고, 완벽해 보이던 선배들 역시 성장과 불안 속에서 버텨내고 있던 프로젝트 매니저들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 변화의 흐름 속에서…생존과 지속 사이 달리는 열차의 창밖 풍경처럼, 조직을 둘러싼 생태계도 끊임없이 변해왔다. 소셜벤처, 임팩트, 변화와 같은 단어들이 마치 봄날 새순처럼 피어나던 시절이 있었다. 눈앞의 성과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열정으로 만든 풍성한 잎사귀들이 가득했던 때였다. 우리는 곧 더 나은 세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과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도, 새로운 사람들이 올라타는 일도 반복됐다. 떠나는 이들을 보내며 가끔은 메마른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새로 합류한 이들을 맞이하며 벅찬 환영을 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열차가 멈추지 않도록 연료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치 영화 ‘설국열차’의 배경처럼 경제 한파 속에서 조직을 유지하는 일은 점점 더 힘겨운 싸움이 되었다. 때로는 생존조차 위협받는 순간들도 있었다. 10년을 넘긴 조직은 그 자체로 우리를 설명하는 든든한 간판이었다. 시간 속에 축적된 성과와 평판은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왕관을 쓴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는 말처럼, 그 자산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도 커졌다. 우리가 쌓아온 유산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 한다는 강박은 결정의 순간마다 불안을 키웠다. 최근 비영리 조직의 생애주기 모델을 접하게 됐다. 10년 차가 된 우리 조직은 치열한

[지역의 미래] 불행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 사이에…

‘아이패드 병’이란 게 있습니다. 아이패드를 매우 사고 싶어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애플펜슬로 사각사각 필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주요 증상입니다. 아이패드병의 치료법은 오직 하나, 아이패드를 구매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패드병이 심각해서 두 대나 갖고서야 완치되었습니다. 유튜브와 OTT를 볼 때 주로 사용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어느 인터뷰에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일주일이 주어진다면 어디로 가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아이패드 하나 들고 구석진 카페에 가겠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시나리오가 그렇게 탄생했다는군요. 저에게 아이패드는 원하는 것이었고 봉준호 감독에겐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필요한 것으로 합리화할 때 불행이 시작됩니다. ◇ 관광객과 생활인구 인구감소 지역은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계절마다 지역 자원을 활용해 독특한 컨셉트의 축제를 엽니다. 둘레길을 개발하고 랜드마크도 건축합니다. 이런 관광객을 포함해 지역을 방문하거나 체류하는 사람, 거주하는 사람을 모두 포함해 생활인구라고 부릅니다. 지자체는 생활인구가 필요합니다. 올해부터 지방교부세 산정 기준이 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생활인구가 늘어나면 그만큼 중앙정부로부터 많은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돈으로 출산과 육아도 지원하고 청년 창업도 지원하며 더 큰 축제도 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활인구를 가장 빨리 늘릴 수 있는 관광객 유치는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관광객 유치가 곧 인구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합리화는 경계해야 합니다. 전북 임실은 ‘임실N치즈축제’와 ‘임실산타축제’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생활인구는 2018년 498만 명에서 2023년 853만 명으로 71% 증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10% 줄었고 지방소멸위험지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