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발언대] 1만개 기업이 참여하는 새로운 비즈니스의 미래

정태은 비랩코리아 선임매니저

지난해 만난 한 스타트업이 흥미로운 경험을 들려줬다. 미국의 한 보험사와 협업을 논의하던 중, 예기치 않게 ‘비콥(B Corp) 인증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다. 해당 스타트업은 인증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대 기업은 ‘한국 스타트업과의 첫 거래’라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신뢰 지표로 비콥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비콥이 글로벌 기준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비콥 운동은 처음엔 작고 다소 무모한 시도에서 시작됐다. 비콥 운동의 여정을 보여주는 책 ‘비즈니스 혁명, 비콥’에는 19년 전 비랩(B Lab)의 공동 설립자들이 약속 없이 회사를 무작정 찾아가거나, 콜드 메일을 보내고 음식점에서 답장을 기다리면서 기업 리더들을 설득하던 모습이 담겨있다. 순진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시작이 오늘날의 글로벌 운동으로 이어진 셈이다.

기업의 책임있는 변화를 이끌어 자본주의 시스템의 문제점을 해결한다는 이상주의자의 믿음 같았던 비콥 운동은 이제 전 세계 100여 개국, 1만 개의 인증 기업, 100만 명의 기업 구성원이 참여하는 글로벌 운동으로 성장하는 모멘텀을 맞이하고 있다. 비콥은 재무적 이익과 사회환경적 목적을 균형있게 추구하는 기업에게 성과를 검증하고 부여하는 인증이자, 기업 리더 커뮤니티가 참여하는 기업 문화 운동이다.

이번달 비랩 글로벌이 발표한 2024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11곳에 불과했던 상장 비콥 기업은 2024년 말 75곳으로 늘었다. 시장은 이제 ‘목적 중심 기업도 성장할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소비자와 직접 맞닿아 있는 식품, 화장품, 의류 업계가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비콥의 인지도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56%가 구매 결정에 있어 지속가능성 인증 여부를 고려한다고 답했다. 기업에 대한 기대가 ‘값’과 ‘성능’을 넘어 사회적 책임과 태도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기업이 더 빨리 성장한다는 데이터도 함께 제시됐다. 비콥 인증을 받은 영국의 중소기업은 2024년 23.2%의 매출 성장률 기록해 일반 중소기업 평균인 16.8%보다 높았고, 임직원 수도 영국 내 중소기업은 2024년에 평균 0.5% 감소 수치를 보이는 반면, 오히려 비콥 중소기업은 9.6% 증가했다.

비콥 운동은 법제도 변화에도 관여하고 있다. 기업이 주주뿐 아니라 근로자, 지역사회, 환경 등 이해관계자의 유익을 함께 고려하도록 하는 ‘베네핏 코퍼레이션(Benefit Corporation)’ 법인격 도입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 있다. 2010년 이후 미국의 40여 개 주를 포함해, 이탈리아, 스페인, 에콰도르 등을 포함해서 10여 개국에서 법제화됐다. 지난해에는 스페인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의 법적 인정을 강화하기 위한 ‘그린 페이퍼(Green Paper)’ 캠페인이 이어졌다.

비랩 글로벌의 연례 보고서에서 또한 주목할 만한 키워드는 ‘집합적 임팩트(Collective Action)’였다. 2024년 2월 호주, 3월 캐나다, 5월 아시아, 9월 아프리카에서 지역 내 비콥 기업들이 모여 교류했고, 3월에는 “거침없이 나아가죠(This Way Forward)”를 슬로건으로 더 나은 방법으로도 기업 경영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아 전세계 비콥이 함께 비콥의 달을 기념했다. 11월 G20 브라질 회의를 앞두고는 ‘이해관계자까지 고려하는 수탁자 의무 확대’를 제안하는 의견서를 공식 제출했다. 유럽에서는 기업이 사회환경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법안 옹호 활동의 일환으로 3개 기관과 함께 유럽연합 의회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voteanyway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작년 국내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비콥 네트워크 미팅을 4차례 이상 가졌다. 함께 해외 비콥 기업 방문하고, 토론 참여 경험을 나누거나, 공급망에서 가치를 지키는 방향성과 방법에 대해서 발표하고, 글로벌 비콥 네트워크와 연결하는 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교류를 통해 한 기업의 경험은 다른 기업에게 영감을 주기도 한다. 파타고니아의 책임 경영 변천사를 소개하는 책 ‘파타고니아 인사이드’에서는 불필요한 소비에 경종을 울리고자 블랙 프라이데이에 했던 광고 “이 자켓을 사지 마세요(Don’t Buy This Jacket)”가 사랑받는 것을 보고 글로벌 식품회사 다논의 CEO였던 엠마뉘엘 파베르가 기업의 변화를 주도할 용기를 얻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비콥 운동은 더 이상 기업의 사회환경적 임팩트를 검증하는 단순 인증 제도가 아니다. 기업의 문화와 생태계를 바꾸는 운동이며, 나아가 제도와 법까지 바꾸는 실천적 플랫폼이기도 하다.

올해로 접어들면서 ESG 또는 지속가능경영에 대한 국가 또는 기업의 조치들이 후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가 더뎌지더라도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른 지도자들이 물러서는 동안, 우리는 기업에 대한 사회환경적 역할에 대한 기준을 높이는 ‘새로운 표준’을 발표하면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비콥 공동체가 믿는 것은 한 기업으로 시작되는 변화, 용기 그리고 여럿이 공동체로 모였을 때의 집합적 임팩트다.

결국, 미래에도 사랑받는 기업은 사회와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기업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네핏 코퍼레이션’ 법인격을 미국 캘리포니아에 처음 도입했을 당시, 파타고니아 창립자 이본 쉬나드가 남긴 말을 되새기며 글을 맺는다.

“5년이나 10년 후, 우리는 오늘을 되돌아보며 이것이 혁명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존 패러다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입니다.”

정태은 비랩코리아 선임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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