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친화적’ 혹은 ‘돌봄 친화적’ 직장을 상상해 보라 하면 많은 이들이 비슷한 장면을 떠올린다. 아이들이 회사에 방문해 마스코트 인형과 사진을 찍고, 놀이공원을 대관해 패밀리데이를 열기도 한다. 알록달록하고 따뜻한 풍경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이들이 감당하는 돌봄은 훨씬 다양하고 조용하며 복잡하다.
루트임팩트는 지난 1월 성수동 공유오피스 헤이그라운드에 입주한 임팩트 지향 조직 78개 팀, 총 300명 임직원을 대상으로 자율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가운데 29%는 현재 돌봄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이들 중 절반 이상(59%)은 18세 미만 자녀 외에도 부모, 시부모, 배우자, 형제자매 등 다양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돌봄 책임을 함께 지고 있었다. 병간호나 원격 돌봄처럼 예상치 못한 상황도 주요 유형으로 확인됐다.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다양한 돌봄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 있다.
◇ 모든 사람의 생애주기에 걸쳐 반복·확장되는 ‘돌봄’
그럼에도 일상에서 공유되고 환대되는 돌봄은 여전히 자녀 양육에 치중돼 있다.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했음에도 말이다.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루트임팩트와의 협력 기고문에서 “우리 사회 다섯 명 중 한 명이 65세 이상 고령자이며, 이들의 건강 문제는 장기적인 돌봄을 필요로 한다”고 지적했다. 단지 고령 인구가 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돌봄의 필요가 얼마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를 강조했다.
김 교수는 돌봄이 특정 가족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의 생애주기에 걸쳐 반복되고 확장된다고 설명한다. 특히 고령 가족을 돌보는 구성원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장기화하는 돌봄 상황에 놓이지만, 이들의 요구는 공식 제도로 잘 수렴되지 않는다. 고충 처리 시스템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호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사회가 여전히 돌봄을 ‘일시적이고 특정 대상에게만 해당하는 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기업이 진정한 포용성을 지향하려면, 직원의 생애주기와 가족 구조에 따른 다양한 돌봄 상황을 전제로 한 유연한 조직 문화를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누구를 돌보느냐’보다 돌봄의 구체적 장면을 들여다봐야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범위와 기간이 다양한 돌봄을 조직과 사회는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까. 단지 돌봄 대상자 목록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돌봄이 어떤 삶의 조건에서 발생하는지 감각적으로 포착할 필요가 있다.
돌봄의 스펙트럼은 돌보는 이의 생애 맥락 속에서 드러나며, 정형화된 기준만으로는 조명받지 못하는 노력이 여전히 많다. ‘누구를 돌보는지’를 묻기보다, 돌봄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장면과 상황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다양한 서사를 구조적으로 설계하려는 태도가 요구된다.
일본의 방문형 병아동 돌봄 서비스 ‘NOBEL’은,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가지 못할 때, 이른 아침부터 돌봄 인력을 연결해 주는 서비스다. 이들은 부모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얼마나 자주, 얼마나 갑작스럽게, 얼마나 복잡한 고민 속에서 돌봄 결정을 내리는지를 깊이 이해한다. 갑작스러운 열로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니지만 단체생활은 어려운 상황, 휴가를 내기엔 빈도가 너무 잦은 상황. NOBEL은 바로 그 현실에 주목했고 긴급 상황에 훈련된 인력이 즉시 투입될 수 있도록 체계를 설계했다. 2013년 간사이 지역에서 시작된 서비스는 현재 오사카를 포함한 16개 지역으로 확장돼 누적 2만2000건 이상의 사례를 기록 중이다.
◇ ‘돌보는 사람의 서사’에 관심을 두고 이해하려는 감각이 필요하다
결국 필요한 것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의 서사에 관심을 두고 이해하려는 감각이다.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은 최근 다양한 인터뷰 대상자들과 그들의 돌봄 여정을 시각화하고 있다.
돌봄 책임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시점은 언제인지, 그때 필요했던 지원과 자원은 무엇이었는지 등 이야기를 상세히 듣고 있다. 돌봄이 개인의 결정과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환경 요인이 돌봄을 더 어렵게 혹은 가능하게 만드는지를 배우는 과정이다.
이러한 작업은 돌봄의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킨다. 필자가 일하는 성수동 헤이그라운드에는 이제 멤버들이 돌보는 아이들과 반려견이 함께하는 풍경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언젠가 누군가의 나이 든 어머니가 이 공간에 함께 앉아 쉬어가는 모습은 어떨까. 어떤 장면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될 때까지, 우리는 돌봄의 감각을 계속 확장해 나가야 한다.
선종헌 루트임팩트 DEI 이니셔티브 팀장
※ 참고
– 김수한 (2025). 『고령화 시대의 기업 DEI: 고령 가족 돌봄을 위한 다양성과 포용성』, 루트임팩트 기고문.
– 루트임팩트 블로그 『아이가 아프면 엄마가 멈춘다: 일본 비영리단체가 제안하는 솔루션
– NOBEL사 홈페이지 https://www.nobel.co.jp
루트임팩트의 <돌봄의 재발견> ‘포용’이라는 말은 낯설지 않지만, 많은 조직들이 여전히 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포용적인 조직이란 결국 ‘돌볼 줄 아는 조직’이라고 믿습니다. 루트임팩트는 돌봄이 더 이상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함께 책임져야 할 과제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돌봄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조직의 선택이 아니라,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필수 전략이자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은 ‘돌봄’을 자신과 조직의 일로 다시 생각해보고, 포용적 조직을 위한 돌봄의 범위와 정의,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누구의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